템빨 30권 - 9화
“저은하아아!! 전하께서 친히 저를 구원해주실 줄은 감히 상상조차 못하였나이다!! 일개 백성의 안위까지 일일이 돌봐주시는 전하야말로 대륙 모든 왕의 귀감일 것이옵니다!!”
“그… 그래…”
“저 파티마는 오늘 전하께 입은 성은을 자손 대대로 갚아 나갈 것이옵니다!! 전하를 위해서라면 속옷을 벗고 길거리를 활보할 수도 있사옵니다!!”
“아… 음…”
절을 올리며 감사하는 파티마 앞에 선 그리드는 민망해서 뺨을 긁적일 뿐이었다.
그리드가 파티마를 구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으니까.
‘파티마가 브루노 백작의 저택에 감금당해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브루노 백작.
스테임 공작의 최측근이라는 자가 반란군의 수장이었을 줄이야…
힐끗, 시선을 돌려보니 스테임 공작은 여전히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숨 쉰 그리드가 그를 격려했다.
“지금 누구보다도 상심이 큰 사람은 바로 장인어른 아니십니까? 저는 괜찮으니까 너무 심려치 마시고 어서 영지를 안정시켜주세요.”
“…알겠사옵니다. 앞으로는 이런 끔찍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게끔 더욱 더 철저하게 주변을 살피도록 하겠나이다.”
다짐하듯이 대답한 스테임 공작이 병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떠났다.
브루노 백작이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이었고, 이를 포착한 그리드가 친히 프론티어에 강림하여 그를 벌했다.
이와 같은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간 지금의 프론티어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스테임 공작은 불안해 하는 민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바삐 움직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었다.
“파티마.”
“예, 전하.”
부름에 공손히 대답하는 파티마의 마른 몸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강자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당한 흔적.
‘어딜 가나 똑같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마음이 무거워진 그리드가 품에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그것을 파티마에게 건넸다.
“귀한 약이다. 우선 이걸 마시고 회복하도록 해라. 그리고 짐에게 속옷 제작법을 알려 주기 바란다.”
“저, 전하께서 친히 포션을 하사해주시다니…!”
그리드는 생색내고 있었지만, 사실 그리드가 파티마에게 준 포션은 값싼 하급 포션에 불과했다. 50레벨 미만의 초보 유저들이나 복용할만한.
하지만 파티마의 입장에서는 억만금보다 귀한 포션이 되어버렸다.
“가, 가보로 삼겠나이다아!!”
“…..”
기껏 마시라고 준 포션을 품에 꼭 끌어안으면서 소리치는 파티마.
포션을 마실 생각은 도통 없어 보인다.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이 자식이 포션 한 병 더 떼어먹으려고 수작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아쉬운 입장은 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포션 한 병을 더 꺼낸 그리드가 파티마에게 재촉했다.
“이건 가보로 삼지 말고 당장 마셔. 그리고 어서 속옷 제작법을 알려달라고.”
“전하의 말씀이시다!”
“재단사 파티마는 어서 어명을 받들지 않고 뭐하는가!”
이번에는 기사들이 난리다.
자결한 브루노 백작이 남겨 놓은 28인의 기사들.
그들이 그리드의 명령을 즉각 수행하지 않는 파티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파티마가 허겁지겁 포션을 마셨다.
기사들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표정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하나 같이 쓸 만해.’
이미 대영주의 검을 통해서 전력 파악은 끝냈다.
브루노 백작 덕분에 공짜로 얻게 된 이 28인의 기사, 전원 250레벨을 달성한 실력자들이었다.
레이단에서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육성한 8인의 젊은 기사들과 비교하면 습득하고 있는 스킬의 수준이 크게 뒤떨어졌지만.
‘그 여덟이 비상식적으로 뛰어난 거니까 문제 삼을 부분이 아니지.’
그리드는 8인의 기사에게 이 28인의 기사를 통솔하게끔 시킬 계획이었다.
그리드 본인이 직접 부하로 부리는 편이 당장은 더 편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드는 젊은 인재들이 지휘관의 역량을 갖출 수 있게끔 선도하고 싶었던 것이다.
템빨국의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
***
‘바로 여기가 재단사의 공방인가.’
파티마의 거처로 이동한 그리드가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공방을 살폈다.
재단사의 공방은 대장간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늘 망치 소리로 시끄러운 대장간과 달리 고요하였으며, 뜨거운 열기도 없었다. 쇠 비린내 대신 가죽 냄새가 공기 중에 맴돌았다.
고요하고 차분한 장소다.
천과 가죽을 자로 정확히 재고 마름질하는 작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집중력임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뭐, 집중력이 필요한 건 대장일도 마찬가지지.’
대장장이의 작업이 분주하고 어수선하다고 해서 막일은 아니다.
대장일 또한 재단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고 전설의 대장장이인 그리드는 당연히 높은 집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누구인가?
남들은 <제작> 버튼 한 번 클릭하는 것으로 뚝딱뚝딱 찍어 내는 아이템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제작해온… 신이다. 노가다의 신. 남들과 비교해서 집중력이 떨어질 리 없다.
‘자, 와라.’
환경적인 요인 탓에 프론티어의 재단사들만이 습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 제작법.
필시 습득 난이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려 3,500에 육박하는 손재주와 무한한 끈기를 지닌 바, 속옷 제작법의 난이도가 제아무리 높다 한들 빠른 시간 내에 마스터할 자신이 있었다.
기세등등한 그리드를 보면서 파티마는 걱정했다.
‘국왕전하께서는 전설의 대장장이로써 자부심이 엄청나실 게 분명하다. 아마 재단 일을 만만하게 보고 계실 테지.’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 쉬운 기술이란 드물다.
재단 또한 대장일처럼 난이도가 높았고 결코 쉽게 익힐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속옷 제작법은 중급 최고 레벨 재단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수준의 높은 손재주가 요구되는 기술이었다.
‘전하께서 속옷 제작법을 익히시지 못한다면 필시 상심하실 터인데.’
존경하는 국왕전하께서 상심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자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지는 파티마였다.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어서 속옷 제작법을 알려주지 않고 뭐해?”
“…마음 단단히 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드가 재촉하자 파티마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부디 그리드가 좌절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자신이 창안한 속옷 제작법을 그리드에게 전수해주었다.
[파티마가 <중급 속옷 제작법>의 전수를 시도합니다!]
[수천 개의 무구를 제작해온 당신이 봤을 때 중급 속옷 제작법의 난이도는 높지 않습니다. 쉽게 이해합니다.]
[중급 속옷 제작법을 습득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손재주가 2,000 이상입니다. 당신의 현재 손재주는 3,487입니다.]
[<중급 속옷 제작법>을 습득하였습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1)>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레벨이 2 상승합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와 <최초의 왕>칭호 효과의 영향으로 총 28개의 능력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의 영향으로 스탯 포인트 12개가 지력에 강제적으로 투자됩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1)>퀘스트가 <새로운 제작법 수집(2)>퀘스트로 연계됩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2)>
전직 퀘스트
당신은 드디어 속옷의 제작법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속옷의 제작을 위해서는 높은 재단 기술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속옷 제작법을 활용하려면 재단 기술을 습득해야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2. 재단 기술 습득. 다음 퀘스트 연계.
[<중급 속옷 제작법>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중급 재단 기술>Lv.8을 자연히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2)>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레벨이 2 상승합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와 <최초의 왕>칭호 효과의 영향으로 총 28개의 능력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세컨드 클래스 <대마법사>의 영향으로 스탯 포인트 12개가 지력에 강제적으로 투자됩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2)>퀘스트가 <재단 기술 단련>퀘스트로 연계됩니다!]
<재단 기술 단련>
전직 퀘스트
대장 기술에 이어서 재단 기술까지 습득한 당신의 발전 가능성은 더욱더 커졌습니다.
만약 대장 기술과 재단 기술을 결합하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대장장이로서 당신의 저변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재단 기술을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중급 재단 기술과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중급 재단 기술이 도리어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의 퀄리티를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재단 기술을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과 결합하기에 손색이 없을 수준까지 단련시키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재단 기술을 고급 마스터까지 단련.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6. 장인급 재단 기술 개방.
“야, 이 XX.”
반란군의 수장을 우연히 토벌(?)하고 속옷 제작법을 손쉽게 얻은데 이어서 전직 퀘스트를 연달아 자동 클리어하는 등.
어쩐지 운이 너무 좋다 싶었다.
‘대장장이한테 재단 기술을 마스터하라는 게 말이야, 방귀야?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천 옷을 제작해야 재단 기술을 마스터할 수 있을까?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렇다.
이번 전직 퀘스트는 그리드에게 역대급 노가다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절로 욕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놈의 전직 퀘스트는 어느 세월에야 끝나는 건지!’
@$*#!
연신 욕설을 지껄이면서 씩씩거리는 그리드.
그의 곁에 선 파티마는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리고 있었다.
프론티어의 다른 재단사들은 죽어라 노력해도 습득하지 못하고 있는 속옷 제작법을 대장장이인 그리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습득하였으니 놀랄 노자였다.
‘이것이 진정한 전설의 실력…! 가히 신이나 다름이 없구나!’
또 한 명의 그리드 신봉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하오 님을 실제로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요.”
“실례가 안 된다면 이따가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요.”
영우 빌딩 1층 카페.
활기찬 카페 종업원들이 하오에게 열렬한 팬심을 드러냈다.
이게 바로 Satisfy 하이 랭커의 입지다.
Satisfy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운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현실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대머리 반트너조차도 번화가에 나가면 팬들에게 둘러싸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 반트너의 경우는 남자 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고구마 라떼 주문하는 겁니다.”
하오는 딱히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는다.
설령 열성팬을 만날지언정 그들에게 영업용 미소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그저 성격대로 행동할 뿐이었고 그 쿨함이 오히려 여성 팬을 늘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는 하오의 주문을 접수한 종업원들이 놀라워했다.
“어머, 신기해라.”
“그리드 님이 매일 아침마다 드시는 것과 같은 음료를 주문하시는군요?”
“하이 랭커들은 하나같이 고구마 라떼를 좋아하시나 봐요?”
“….!!”
무표정하게 서있던 하오의 두 귀가 쫑긋 섰다. 동공도 커다래졌다.
그가 종업원들에게 반문했다.
“그리드 님이 매일 고구마 라떼를 먹는다입니까?”
“네, 아주 좋아하세요.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늘 고구마 라떼만 드세요.”
“그러고 보니까 그리드 님이 커피 드시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네. 쓴 거 싫어하시나?”
“귀엽지 않아? 헤헤.”
“…..”
그리드가 화제가 되자 본분을 잊고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종업원들.
잔뜩 들뜬 표정을 짓는 그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하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고구마 라떼 두 잔. 아니, 세 잔 주문하는 겁니다.”
세계 최대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에서도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천재인 하오는 긍지가 무척 높았다.
본인을 인류 정점의 인재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드와 크라우젤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지금의 하오는 자신이 그리드와 크라우젤보다 아래임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고, 그들을 선망하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리드와 크라우젤처럼 성장해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를 꿈꿨다.
그렇기에 이 순간 고구마 라떼를 먹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드의 식성을 따라하면 자신 또한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앞으로 나도 아침마다 고구마 라떼를 먹겠다. 그리드가 게임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고구마 라떼일 수도 있으니까.’
한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하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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