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7화
XX시 XX동.
서울 외곽에 위치한 이곳은 본래 아주 조용한 동네였다. 사방이 논밭에다가 간단한 편의 시설조차 전무한, 소위 말하는 촌 동네 수준이었다.
하지만 템빨왕 그리드가 100억짜리 초호화 건물 <영우 빌딩>을 건설한 이후부터 동네 분위기가 급격히 변했다.
그곳에 가면 그리드의 실물을 볼 수 있다!
기대감을 품은 사람들이 XX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XX동 주민들은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덕분에 영우 빌딩이 건설되고 7개월이 지난 지금, XX동은 XX시에서 가장 번화한 구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XX시민들은 XX동의 이름을 그리드동으로 바꿔야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그리드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
영우 빌딩은 층수가 낮지만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외견을 갖추고 있었다.
고가의 자재들만을 사용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건물을 디자인하였으니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괜히 100억을 들인 게 아니다.
영우 빌딩 앞.
“여기가 바로 그리드의 건물인가.”
“옥상에 그리드의 펜트하우스가 있다고 하는데 구경해 보고 싶군.”
“구경하면 되지. 설마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생각이었어?”
일단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던 XX동의 인도 곳곳에 가래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려 놓은 주범들이다.
영우 빌딩 주변의 상인들이 그들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저대로 영우 씨 빌딩에 쳐들어갈 기센데…”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지. 모든 중국인들이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다수의 중국인 관광객들은 몰상식하기로 유명하니까. 외부인 출입 금지라는 푯말을 저들은 신경도 안 쓸걸.”
“이거 어쩌지… 영우 씨 게임하는데 방해하는 거 아니야?”
XX동 주민들에게 있어서 그리드 신영우는 영웅이자 은인이었다.
순전히 영우 덕분에 동네 상권이 발전하고 자신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니 영우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영우에게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던 상인들이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다가갔다.
“관광객 여러분, 이 건물은 1층의 카페와 음식점을 제외하고 대부분 오피스텔로 이용되고 있어요.”
“입주민들을 위해서 마련된 엘리베이터 입구를 관광객 여러분이 막아서고 있으면 안 됩니다.”
“이 한국 놈들이 뭐라고 떠드는 거지?”
“건물에 출입하지 말라는 것 같은데?”
“하, 지들이 뭔데?”
중국인 관광객들의 눈빛이 흉흉해졌다.
영우의 프라이버시를 지켜 주기 위해서 합심한 상인들을 원수처럼 노려보더니 이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우리한테 간섭하는 거지?”
“정말이지 한국 놈들은 주제 파악을 못한다니까! 소국의 촌놈들 주제에 뭐 그렇게 따지는 게 많아!”
“으으…”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상인들이 위축되었다.
중국인 관광객의 숫자가 워낙 많고 하나 같이 인상이 험악하였으므로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상식이 통하질 않는 상대와 얽힌다는 것 자체가 곤욕이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도 가릴 수 없는 미모의 소녀가 등장했다.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와 작은 얼굴,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가 마치 모델의 비율을 보는 듯하다.
그녀의 정체, 다름 아닌 영우의 친동생 세희였다.
“루비다…!”
“성녀 루비야!!”
“게임 속 모습이랑 다른 게 하나도 없잖아!”
“경국지색이로군!”
중국인 관광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상기된 얼굴로 콧김을 내뿜으면서 세희에게 달려들었다.
“사인 해줘!”
“사진 찍어줘!!”
“악수…! 아니, 포옹하자!!”
완전히 난리도 아니다.
무려 50명에 가까운 중국인 관광객들이 작고 연약한 소녀를 둘러싸고서 그녀를 자기들 멋대로 다루기 시작했다.
“세, 세희 양…!”
상인들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세희를 보호하고자 몸을 날려보았지만 중국인 관광객들의 억센 손길에 도리어 떠밀려서 어이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꺄악!”
우락부락한 중국인 남성들에게 강제로 껴안긴 세희가 급기야 비명을 지름과 동시였다.
끼이익-!
“…?!”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초호화 대형 승용차.
길이가 족히 10미터 이상 되는 리무진 한 대가 달려와 중국인 관광객들의 옆에 섰다.
깜짝 놀란 중국인 관광객들의 시선이 리무진으로 집중되었고,
“콰이 치 펑 러.”
리무진에서 내린 말총머리 사내가 서늘한 눈빛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살기.
날카로운 눈빛이 중국인 관광객들의 심장에 비수처럼 꽂힌다.
“하, 하오…!”
말총머리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중국인 관광객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륙의 기적, 하오.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Satisfy랭커를 한국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꿈인지 생신지 몰라 두 눈만 껌뻑이는 중국인 관광객들을 헤치고 나아간 하오가 세희를 보호하고 서며 말했다.
“이국땅까지 관광을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너희들의 몰상식한 행동이 중국인 전체를 욕보인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모르는 거냐? 당장 대사관에 연락해서 추방시켜 버리기 전에 이곳에서 썩 꺼져라.”
“윽…”
하오의 중국 내 입지는 어마무시하다.
주석조차도 하오의 팬이라는 소문이었다. 하오의 입김은 충분히 대사관에까지 통할 것이었다.
사색이 된 중국인 관광객들이 꽁무니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의 사건은 중국에서 기사화되게 된다.
중국인들은 타국에서 나라 망신시키는 중국인이 더 이상 발생하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했고, 이는 영우 빌딩 앞에서 소란 피우는 중국인 관광객이 없어지게 되는 계기였다.
“괜찮습니다? 루비 양?”
하오가 다소 어색한 한국어로 세희에게 묻는다.
고개를 끄덕인 세희가 감사를 표했다. 커다란 눈동자로 올려봐 오는 모습, 마치 작고 귀여운 다람쥐를 보는 듯하다.
“덕분에요.”
“그것 참 다행이다군요.”
하오가 세희를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보았다.
중국 최고의 인기인답게 수많은 미인을 만나온 하오라고 해도 세희 정도 되는 미모의 여성을 실제로 보는 건 드문 경험이었고, 자연히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상냥한 오빠처럼 구는 그에게 편안함을 느낀 세희가 질문했다.
“그런데 하오 님이 한국에는 무슨 일이세요?”
“크라우젤 님의 일로 그리드 님과 상의하고 싶어서입니다.”
“크라우젤…”
오빠와 두 번이나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천외천.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 세희가 흰 얼굴에 홍조를 피어올렸다.
아무래도 대다수의 여성이 그렇듯, 세희 또한 크라우젤이라는 매력적인 남성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하오가 물었다.
“집에 그리드 님 계십니다?”
“네, 당연히 약속은 하고 오신 거겠죠?”
“물론이다입니다. 하지만 예정 된 시간보다 1시간 15분이나 빠르게 도착하고 말았고요.”
“어머… 그럼 약속 시간까지 기다리셔야할 걸요. 최근의 오빠는 스케줄을 철저히 지키면서 생활하고 있거든요. 약속 시간이 되기 전까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게임에서 로그아웃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래도 왕이 된 후로 할 일이 많다보니까 시간이 부족한 거겠죠.”
“에…”
그래도 명색이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랭커인 내가 친히 방문했는데도?
당황하는 하오에게 세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시장님께서 방문하셨을 때도 3시간을 기다리게 했어요.”
“….여기 카페 커피 맛있다입니까?”
“제가 아직 학생이라 커피는 안 먹어 봐서 모르겠네요. 하지만 고구마 라떼는 엄청 맛있어요.”
“그렇습니까… 고구마 라떼 먹으면서 기다립니다.”
하긴, 이제 그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 아니던가.
이해한 하오가 오늘만큼은 자신의 황금 같은 시간을 희생하리라 결심했다.
***
브루노 백작의 저택.
프론티어에서 두 번째로 큰 건축물이다.
저택의 규모를 확인한 그리드는 브루노 백작의 프론티어 내 입지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장인어른의 오른팔답게 으리으리한 곳에 사는군.’
필시 훌륭한 인물이기에 스테임 공작의 총애를 받는 것일 터.
그리드는 템빨국을 지탱하는 대귀족 중 하나인 브루노 백작과의 만남을 크게 기대하였다.
프론티어의 내정을 담당하고 있다는 그라면 파티마의 행방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누구냐!”
그리드가 저택 현관 앞까지 다가서자 경비병들이 경계하였다.
일반적인 사람들과 달리 털옷 한 장 걸치지 않고 돌아다니는 그리드의 모습은 기이한 것이었다.
‘이자는 뭐지? 추위도 못 느끼는 건가?’
‘인간형 몬스터일 수도 있다.’
바짝 긴장하며 경계하는 경비병들!
그들이 겨눠오는 창칼의 상태를 확인한 그리드는 뿌듯해졌다.
‘북부의 병사 수준은 다른 왕국 수도의 병사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편일 거야.’
과연 몬스터 서식지가 많은 구역답다.
스테임 공작은 병사들의 훈련과 무장에 총력을 쏟고 있음이 분명했고, 이는 템빨국의 든든한 저력이었다.
“누구냐니까!”
추위도 타지 않을뿐더러 얼굴은 챙 넓은 모자로 가린 그리드.
경비병들이 겨눈 창칼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유심히 관찰하면서 흐흐흐, 음침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이제 경비병들에게 두려움마저 심어 주고 있었다.
‘아차.’
겁에 질려서 경계심을 높이는 경비병들을 뒤늦게 눈치챈 그리드가 모자를 벗었다.
순간 드러나는 흑발이 차가운 밤하늘에 가득 찬 달빛과 별빛 아래 찰랑인다.
“…그리드 국왕전하?”
경비병들의 넋이 나갔다.
수상하기 짝이 없어 경계하던 대상이 우리들의 국왕전하셨으니 놀랍고 황당할 따름이었다.
“문을 열어라.”
“헉…! 예, 옙!!”
국왕은 자신의 영토 내에서 무조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절대권력 프리패스를 발동한 템빨왕 그리드가 명령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허겁지겁 저택의 대문을 열었다.
***
브루노 백작 저택, 지하 고문실.
“으윽… 그, 그만… 이제 제발 그만…”
벌써 며칠이 지난 걸까?
밤낮으로 계속 된 고문 끝에 파티마의 정신력에 한계가 찾아왔다.
파티마는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 이 고통을 끝낼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백기를 드는 파티마를 확인한 브루노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속옷 제작법을 넘길 마음이 든 건가?”
“너, 넘기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지?”
“기능성 속옷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이 필요합니다. 제가 제작법을 넘긴다고 해서 아무나 습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술 좋은 재단사 따위야 대륙 전체에 널렸지. 파티마 경, 그대만이 특별하다는 착각은 관두는 편이 좋다네.”
“크으….”
파티마는 프론티어 최고의 재단사이다. 스스로 자부하기에 템빨국 전체, 아니 서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자신보다 뛰어난 재단사는 드물다고 생각했다.
재단사로서 파티마의 자부심과 긍지는 엄청난 것이다.
한데 브루노 백작이 하찮은 것 취급하자 파티마는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이는 채찍에 얻어맞으면서 느꼈던 육체적 고통과 비할 수 없이 커다란 상처였다.
“호오, 그 반항적인 눈빛은 뭐지? 아직 매가 부족한가보군?”
브루노 백작이 다시금 채찍을 손에 쥐는 그때.
“배, 백작님!!”
지하실 문이 허락도 없이 벌컥 열리더니 집사가 뛰어 들어왔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확인한 브루노 백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호들갑이냐? 설마 그리드가 내 집에 쳐들어오기라도 한 거냐?”
“마, 맞습니다!”
“잉? 하하, 그것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저, 정말입니다! 그리드 국왕이 저택에 찾아왔습니다!!”
“뭐라고!!”
브루노 백작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그리드 그놈…! 내가 반 그리드 연합의 수장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직접 처단하기 위해서 찾아온 건가!’
상상을 초월하는 정보력, 그리고 두려울 정도의 행동력이다.
이 순간, 브루노 백작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해온 그리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왕이 된 게 아니야.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꽈드득!
설마 이토록 빨리 그리드에게 꼬리가 잡힐 줄이야.
이를 간 브루노 백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전군을 소집해라.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그리드와 함께 죽겠다.”
한편,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파티마는 만나본 적도 없는 그리드에게 무한한 호감과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설마 국왕전하께서 친히 나를 구원해 주실 줄이야… 제가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전하께 평생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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