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6화
“으으, 춥다. 여긴 도무지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네.”
“윈스톤의 NPC들이 털옷을 사가는 게 좋을 거라고 말했던 이유가 있었구만.”
“이래서 NPC의 조언은 새겨 들어야해…”
프론티어.
템빨국 최북단에 위치한 영토로 스테임 공작령의 수도이다.
1년 내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플레이어들은 그 추위 때문에 당황하곤 한다. 저레벨 플레이어 중에는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이렇게 추운 곳이 어떻게 북부 최고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러게 말이다. 추우면 농작물을 재배하기도 힘들고 백성들의 활동 범위도 축소돼서 발전하기 힘들 텐데.”
에트날 왕국 시절, 이곳 북부는 금역으로 설정되었을 정도로 대량의 몬스터가 서식했었다.
하지만 용맹한 스테임 공작이 몬스터를 토벌하고 개척하여 북부는 풍요로운 성장을 이룩했다.
추위 탓에 농사조차 짓기 힘든 이곳이 풍요롭게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여전히 남아있는 대량의 몬스터 서식지 덕분이다.
북부인들은 몬스터를 사냥해서 몬스터의 고기를 먹고 몬스터의 부속품을 타지로 수출, 이를 토대로 생필품을 마련하고 부를 축적해 왔다.
추위도 문제가 아니다.
예전부터 ‘북부인들은 추위를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부인들은 추위에 강했다.
누군가는 타고난 체질 덕분이라고 평가하지만 진실은?
“북부인들이 추위에 강한 이유는 모두 이 속옷 덕분이지. 자네들도 이 속옷을 구매해보지 않겠나?”
덜덜덜덜.
프론티어에 도착하자마자 추위에 몸을 떠는 플레이어 집단에게 NPC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팬티를 들고 있었다. 털 팬티였다.
“에티의 털로 만든 이 속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몸을 냉기로부터 보호하고 동상을 방지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지녔다네. 북부에서 활동하려면 이 속옷이 필수야. 우리 북부인은 모두 이 속옷을 입고 있어.”
‘웬 속옷 장사꾼들이 이렇게 많아?’
어느 도시나 여행객을 노리는 잡상인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객들에게 굳이 속옷을 판매하려는 상인은 처음 봤다.
“어휴, 됐어요. 그런 쓸모없는 물건은 안 삽니다.”
팬티 한 장 입는다고 얼마나 따뜻해지겠는가?
속옷에 대한 편견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장사꾼들의 상술에 넘어가지 않았다.
일부 플레이어들은 속는 셈 치고 팬티의 상세 정보를 확인해봤지만 이내 실망하며 손사래 쳤다.
<북부인의 팬티>
천에 두툼한 에티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팬티입니다.
냉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효과를 지녔지만 너무 두꺼운 탓에 다소 불편한 감이 있습니다.
*냉기 저항력 +5%
*민첩성 ?5%
*하반신을 사용하는 스킬의 전개 속도 ?10%
고작 냉기 저항력 5퍼센트 올려주는 것치고 페널티가 너무 많은 아이템이다.
‘팬티에 옵션이 붙었다는 게 놀랍긴 하지만.’
‘민첩성이 무려 5퍼센트나 떨어진다는 점이 영 걸리는군.’
‘안 그래도 몬스터가 많은 지방인데 추위 좀 덜 타려다가 약해져선 괜한 위험을 자처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지.’
애초에 민첩성 스탯이 낮은 마법사라면 또 모를까, 대부분의 직업군에게는 민첩성 5퍼센트 하락이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실망한 플레이어들이 장사꾼을 거부하고 각자 갈 길을 떠나는 그때였다.
“그 팬티들 좀 줘보세요.”
웬 한 명의 사내가 불쑥 나타나더니 장사꾼들이 판매 중인 팬티의 상세정보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추위를 아예 타지 않는 것인지, 털옷 한 장 걸치지 않고도 몸을 떨기는커녕 입김 한 번 내뿜지 않는 사내였다.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 쓴 탓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팬티 종류와 옵션이 다 똑같네. 더 좋은 속옷은 없는 겁니까?”
“더 좋은 속옷이야 있지만 그건 귀족님들께만 판매된다네.”
“왜요?”
속옷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이 사내,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굳이 정체를 노출하고 다녔다가는 플레이어들의 이목을 끌게 될 터였으니 활동하기 편하게끔 정체를 감춘 상태다.
“에티의 속옷보다 더 좋은 속옷을 제작할 수 있는 재단사는 프론티어 전체를 통틀어 봐도 단 1명밖에 없거든. 그가 제작한 속옷은 귀하고 수량이 부족해서 일반인에게까지 판매하기에는 무리가 커.”
‘속옷 제작자는 재단사였나.’
그리드가 추측하건데, 재단사라고 해서 누구나 속옷을 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만약 모든 재단사가 속옷의 제작법을 습득하고 있었다면, 속옷은 당연히 상품화 되었을 것이고 현재 플레이어들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속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프론티어의 재단사들이 속옷 제작법을 습득하게 된 이유는 이곳의 날씨 때문일 테지.’
북부인들은 추위에 견딜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따뜻한 속옷 제작이었을 것이다.
“그 팬티 장인… 아니, 재단사는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거든.”
“재단사가 사라졌다고요? 어쩌다가요?”
“그야 모르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버렸으니까.”
“크음…”
과연 전직 퀘스트답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일단 단서를 모아야겠군.’
속옷 장인이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고 그의 행방을 쫓아 속옷 제작법을 배워야한다.
사명감에 불타오른 그리드가 프론티어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NPC 주민을 만나는 족족 속옷 장인에 대해서 질문하는 그는 결국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
“최근 웬 수상한 사내가 파티마 경에 대해서 캐묻고 다닌다는군.”
고급 재단사 파티마.
프론티어의 보배 같은 존재인 그가 행방불명되자 많은 귀족들이 난처해하고 있었다. 파티마가 제작한 속옷을 두 번 다시는 입지 못하게 될까봐 불안해했다.
하여, 귀족들은 파티마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 중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파티마를 찾을 수 없었다.
찾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파티마는 프론티어의 명문 귀족 브루노 백작에게 납치, 감금당한 상태였으니까.
설마 브루노 백작이 파티마를 납치했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파티마 경, 그대를 애타게 찾는 사람이 이토록 많으니 참으로 행복하겠구려?”
“대체… 대체 제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브루노 백작의 저택, 지하.
사슬에 묶인 채 구속당한 파티마는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최고 귀족에게 납치를 당하였으니 그저 불안할 따름이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손톱을 정리하던 브루노 백작이 피식 웃었다.
“경에게 원하는 것이야 당연히 속옷이지 뭐겠소?”
“소, 속옷이라면 백작님께도 이미 몇 번이나 판매하였을 텐데요?”
“내가 원하는 것은 속옷의 제작법이야. 자네가 독점하고 있는 고급 속옷의 제작법들을 내게 알려준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지.”
브루노 백작은 속옷 사업에 주목하고 있었다.
프론티어의 귀족과 주민들은 속옷을 그저 ‘몸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물건’으로 인식할 뿐이었지만, 브루노 백작이 봤을 때 속옷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다양한 기능성 속옷을 제작해서 이를 각국의 왕족과 귀족들에게 판매한다면 억만금을 모을 수 있으리라 보았다.
“스테임 공작각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입니까…?”
브루노 백작의 배후에 스테임 공작이 있는 것인가.
최악의 가정을 해보면서 조심스레 묻는 파티마에게 브루노 백작이 냉소를 날렸다.
“그딴 변절자와 이런 좋은 사업 내용을 공유할 생각은 없지.”
“변절자…?”
브루노 백작은 스테임 공작의 오른팔이다.
스테임 공작이 그리드 국왕에게 공작위를 받자마자 처음으로 한 일이 브루노에게 백작위를 수여한 것이었다.
그만큼 스테임 공작은 브루노 백작을 신뢰했다.
한데 브루노 백작은 스테임 공작을 변절자라 부르고 있었다.
브루노 백작의 두 눈에 짙어 살기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왕실에 대한 충의를 버리고 사위의 반란을 도운 스테임이 변절자가 아니면 또 뭐겠나?”
파티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당신… 반 그리드 연합원이셨던 겁니까?”
반 그리드 연합.
전 에트날 귀족들이 만든 세력이다. 그리드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외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리드를 왕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템빨국 건국식 당일, 스테임 공작과 크리스 공작의 손에 의해서 격파 당했다고 알려진 반 그리드 연합이지만 여전히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고 그중 하나가 놀랍게도 브루노 백작이었다.
“현재 템빨국의 귀족 중 10퍼센트 이상이 반 그리드 연합 소속이다. 물론 겉으로는 그리드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지만 말이야.”
브루노 백작은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더 많은 사병을 고용하고 무기를 마련할 자금!
“우리 반 그리드 연합은 우선 스테임 공작을 없애고 북부를 삼킨 뒤 그리드에게 맞설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니까 그대의 속옷 제작법에도 친히 관심을 가져주는 게다. 자, 파티마 경. 그대 또한 한때는 에트날의 백성이지 않았는가? 괜히 어리석은 생각 말고 순순히 우리에게 협력하도록 해라.”
‘이자는 미쳤어.’
전란이 끝나고 드디어 안정되어가는 나라를 다시 또 발칵 뒤집어 놓겠다고?
결국 백성들만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강제로 전쟁에 징집되는 소년들이 속출하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목숨과 가족을 잃게 될 터였다.
파티마는 화가났다.
“웃기는군. 브루노 백작 당신은 충성이라는 빌미로 자신의 야욕을 채우고 싶은 것이겠지. 백성의 안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한낱 재단사 주제에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철썩철썩!
얼굴을 대춧빛으로 붉힌 브루노 백작이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맞아 죽고 싶지 않다면 어서 속옷 제작법을 내놓아라!”
“으윽…!”
금세 상처투성이가 된 파티마는 아프고 두려웠다. 펑펑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재단사로써 그의 긍지는 결코 값싼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브루노 백작의 폭력과 협박은 몇날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이어졌고 파티마의 의지는 점차 약해졌다.
브루노 백작은 확신했다.
“버텨봤자 아무 의미 없다. 그대를 구해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그대는 내게 굴복하게 될 것이야.”
“윽… 으윽…”
철썩철썩!
브루노 백작의 채찍질이 가혹해질수록 파티마의 의지는 바람 앞의 등불이 되어갔다.
***
“마지막으로 목격된 게 브루노 백작의 저택 근처라 이건가.”
지난 나흘.
그리드는 쉬지 않고 프론티어를 누비면서 주민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했다.
결과, 속옷 장인의 이름이 파티마라는 것과 그의 마지막 동선을 포착하는데 성공했다.
“브루노 백작이라… 냠냠쩝쩝. 장인어른의 측근이던가요?”
프론티어에 머무는 동안 그리드는 땡전 한 푼도 안 썼다.
배고프거나 잠이 올 때마다 스테임 공작의 성으로 불쑥 찾아가서 신세를 진 덕분이다.
“그렇습니다, 전하.”
오늘은 성까지 찾아갈 시간이 없으니 도시락을 준비해 달라.
이와 같은 그리드의 요청을 받고 친히 도시락을 배달 온 스테임 공작이 공손한 태도로 설명했다.
“브루노 백작은 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입니다. 고지식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문무가 출중할뿐더러 충성심이 무척 강하지요. 전하, 거기 그 에티의 심줄 요리도 꼭 드십시오. 정력에 좋답니다.”
“우물우물, 꿀꺽. 흐음, 일단 브루노 백작을 만나러 가봐야겠군요. 어쩌면 그자가 파티마를 목격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차도 드십시오. 하온데 전하, 무슨 연유로 파티마를 찾으시는 겁니까?”
“속옷 제작법을 배우려고요.”
“…?”
내가 잘못 들었나?
귀를 의심한 스테임 공작이 두 눈을 꿈뻑였다.
일국의 왕이 된 그리드가 속옷 제작법을 배운다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니, 전하. 전하께서 왜 속옷 제작법을 배우셔야 한다는 겁니까?”
“…제가 잡캐라서.”
“…???”
“어찌됐든 잘 먹었습니다, 장인어른.”
스테임 공작이 직접 배달해 준 도시락을 전부 다 비우고 스태미나를 최대치로 회복한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챙 넓은 모자를 다시 눌러쓰며 빙글빙글 웃었다.
‘장인어른의 오른팔과 만난다고 생각하니까 기대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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