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5화
‘이제야 첫 번째 숙제를 끝낸 기분이군.’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생산 시스템을 구축한 그리드는 뿌듯했다.
그 어떤 나라가 무한한 자원으로 무한한 무구를 생산할 수 있겠는가?
영원토록 찬양 받아 마땅한 템빨왕의 첫 번째 위업이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리드 세트의 생산 속도가 느리겠지만 훗날 더 많은 고급 대장장이와 광룡 망치, 모루가 확보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사하란 제국보다 더 빠른 속도로 군사력이 성장할 가능성이 열렸다.
‘…아니, 그건 역시 불가능하려나.’
서대륙의 인구와 자원은 제국에 편향되어있는 실정이다.
제국은 광룡철보다 더 훌륭한 광물을 훨씬 더 많이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급 대장장이도 수백 명은 있을 테지. 플레이어만 봐도 대부분의 랭커 대장장이가 제국 소속이니까.’
평범한 플레이어였던 그리드는 제국의 전력 따위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각이 달라졌다.
사하란 제국은 존재만으로 템빨국을 위협하는 잠재적인 적인 바, 템빨왕 그리드는 제국을 주시하며 소상히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제국에 대해서 생각해 봤자 사기만 저하되었으니 문제다.
‘뭐… 지금 당장의 제국은 우리한테 관심도 없는 눈치니까. 괜히 사서 걱정하지 말고 일단은 신경 끄자.’
플레이어들 사이에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제국은 여전히 템빨국을 변방의 약소국으로 인식한다는 눈치다.
템빨왕 그리드가 15개국의 사절단을 압도하고 그중 1개국을 바로 속국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소문을 듣고도 말이다.
‘피라미들 간의 알력 다툼 따위 신경 쓸 일도 아니라 이거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이는 기회이기도 하다. 제국이 템빨국을 우습게 보고 방심하는 이때 철저히 힘을 비축해야 한다.
힘을 갖추기 위한 기본 전제가 바로 그리드의 성장이었고.
‘일단 벨리알 마검부터 제작하고 나서 틈틈이 사냥하도록 하자.’
강함에 대한 그리드의 열망은 여전히 컸다.
플레이어 중에서는 최고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하지만 여전히 ‘최강’을 자부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했고, 몬스터와 NPC 중에는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가 산재한 상황이었다. 더 큰 힘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가짐이다.
‘당장 제국의 적기사라는 놈들만 해도 굉장한 것 같고.’
특히 솔로 넘버 나이트들이 절대강자 수준이라고 한다. 소문을 종합해보면 크라우젤조차도 한 손가락으로 제압할 경지랄까.
‘놈들한테는 나도 눈 깜짝할 사이에 죽겠지?’
후덜덜!
두려움에 몸을 떠는 그리드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손수 지하 감옥에 가둬놓은 <레이도른>이 바로 그 유명한 솔로 넘버 나이트 중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드 님.”
어떤 형태의 마검을 만들까.
고뇌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아름다운 엘프 남성이 다가왔다.
최근 라인하르트에 세워진 <템빨 아카데미>의 교장직을 맡은 스틱세이였다.
현자. 그것도 대현자로 칭송 받는 자신이 왜 학원장이나 맡아야하는 걸까? 이거 너무 심각한 인력 낭비 아닌가?
스틱세이는 진지하게 의문을 느꼈지만 그리드에게 대놓고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그리드는 생명의 은인이자 번헨 열도의 저주를 풀어줄 유일한 열쇠.
어지간해서는 그의 뜻을 따라주고 싶었다.
“무슨 일이야?”
스틱세이를 오래간만에 만난 그리드가 반기기는커녕 표정을 굳혔다.
스틱세이가 싫어서가 아니라 미남에 대한 반감이다.
스틱세이는 모두가 상상하는 이상적인 엘프의 미모를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란히 서있기가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오징어가 되는 기분.’
그리드의 기분이야 어찌됐든, 스틱세이는 자체 발광하는 미모를 숨기지 않고 말해나갔다.
“대악마 벨리알이 소멸하고 지금까지, 당신의 행보를 지켜보던 도중에 문득 눈치 챈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이 보유한 무구 제작법은 무척 한정적인 것 같더군요.”
“…!!”
그리드는 총 2,080가지의 아이템 제작법을 보유 중이다.
이중 본인이 직접 획득하거나 창조한 제작법은 약 200여 개에 불과했고, 나머지 1,880가지의 제작법은 모두 템빨단원들이 구해다준 것이다.
말인 즉, 플레이어가 혼자서 2,000단위의 제작법을 습득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뜻이다.
한데 스틱세이는 그리드의 무구 제작법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리드는 부정하지 않는다.
왜?
‘한정적인 게 사실이니까.’
2천 개가 넘는 아이템 제작법을 보유했으면 뭐하는가?
이중 절반 이상의 제작법이 무기와 갑옷이다.
그리드가 보유한 제작법의 ‘종류’는 스틱세이의 표현대로 무척 한정적이었다.
단적인 예로 천 옷 계열 제작법은 아예 없다.
왕이 된 이후 대량으로 필요해진 예복을 직접 만들지 못하고 아깝게 돈 주고 사야하는 입장이다.
‘왕관의 제작법도 하나뿐이지.’
이해도 100퍼센트를 달성하고 획득한 <성스러운 빛의 왕관>제작법이 유일.
<최초의 왕>칭호를 얻고 왕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그리드이지만, 당장 쓸 만한 왕관을 제작할 능력은 없는 것이다. 물론 창조를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창조는 결코 남발해선 안 될 횟수 제한 스킬이고.
‘스틱세이가 새삼스레 제작법을 논하는 이유는…’
이거 딱 봐도 퀘스트 각이다!
두근!
기대감에 차오른 그리드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맞아. 내가 제작할 수 있는 무구는 당신의 말대로 무척 한정적이다. 아직 결코 파그마와 비할 수준은 못 되는 거지. 당신은 이런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가?”
“제가 대현자라고 불리는 이유는 방대한 지식에 있으니까요. 이제는 멸망한 에트날 왕국의 문화와 역사, 전설과 신화 등을 복기해보던 도중에 떠오른 정보가 하나 있습니다.”
“정보…!”
과연 대현자답게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리드는 스틱세이와의 대화가 퀘스트의 전조임을 확신했고 역시나, 알림창과 대면하게 됐다.
[<파그마의 후예>의 전직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제작법 수집(1)>
전직 퀘스트
당신은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한 인물이지만 정당한 후계자는 아닙니다. 당신이 얻은 파그마의 기술은 단지 파그마가 남겨 놓은 서적을 토대로 배운 것에 불과합니다.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는 기술력을 갖췄으나 지식 전반적으로 아직 많이 부족한 당신!
대장장이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종류의 제작법을 습득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현자 스틱세이가 알려주는 단서를 쫓아 새로운 종류의 제작법을 획득하세요!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2. 속옷 제작법. 다음 퀘스트 연계.
“오…! 오오!!”
브라함의 영혼을 획득한 이후 한동안 감감무소식이었던 전직 퀘스트가 새롭게 시작됐다!
“보상도 무려 레벨 2개에다가 속옷 제작법이라니!! 응?”
기쁨에 환희하던 그리드가 거짓말처럼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죄 없는 스틱세이에게 버럭 소리쳤다.
“속옷 제작법이라고!! 장난하냐!!”
“역시 인간은 재미있는 생물이로군요. 이토록 급격한 감정의 변화라니, 늘 침착하고 냉정한 우리 엘프들과 달리 보는 맛이 좋…”
“아니, 우라질! 속옷 제작법이라는데 화 안 나게 생겼어?!”
물론 속옷은 중요하다.
모종의 이유로 속옷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옷을 필수적으로 착용했다. 속옷의 안정성과 청결함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Satisfy에서 속옷의 개념은 현실과 약간 다르다.
단지 가리개용에 불과했다. 플레이어가 쓸데없이 중요 부위를 노출할 수 없게끔 가려주는 천조가리.
현재 그리드가 착용 중인 속옷의 이름도 단순히 <팬티>다.
Satisfy의 모든 남성 플레이어에게 공통적으로 지급되는 회색 천 속옷으로써 아무런 기능이 없다.
“봐!”
흥분한 그리드가 갑자기 바지를 내렸다. 그리고 Satisfy시간상 거의 9년째 매일 입고 있는 자신의 팬티를 가리켜보였다.
“나보고 이딴 거나 만들라고!”
대장장이. 그것도 전설의 대장장이인 내가 고작 속옷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힌다.
오래간만에 얻은 전직 퀘스트의 보상이 고작 속옷 제작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을 넘어서 분노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반문했다.
“우리 엘프족에도 대장장이와 재단사 같은 직업군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어떤 종족이든 당연히 필수 직업군은 있겠지. 그래야 의식주가 충족이 되니까.”
“맞습니다. 인간이나 드워프와 비교해서 제작 기술이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우리 엘프 중에도 대장장이와 재단사는 있죠. 그리고 엘프 재단사 중에 유명한 속옷 장인이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속옷 또한 그 재단사가 제작한 것이죠. 벌써 613년째 입고 있는데 기능이 무척 뛰어납니다. 통풍이 잘 돼서 늘 좋은 컨디션을 유지시켜주죠.”
“아니, 지금 무슨 헛소리야…”
태클 걸 부분이 너무 많다.
대장장이에게 속옷 제작법 습득하라고 퀘스트를 떠넘긴 것부터 시작해서, 갑자기 엘프 재단사 이야기를 꺼내더니 뭐? 팬티 한 장을 613년째 입고 있다고?
‘더럽게.’
벌써 9년째 같은 팬티를 입고 있는 자기 자신은 더럽다고 자각하지 못하는 그리드였다.
그에게 스틱세이가 설명해 나갔다.
“기술이 뛰어난 자가 만든 속옷은 평범하지 않은 기능성 속옷이 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드 님 당신께서 만들게 될 속옷이 뛰어난 기능을 자랑할 수도 있단 뜻이죠.”
“허?”
생각해보자.
Satisfy에서 속옷은 이하생략 부분이 아닌 이상 반드시 착용해야하는 기본 아이템이다.
어차피 착용해야하는 아이템에 특정한 옵션이 붙는다면?
‘개이득인데?’
만약 눈곱만큼의 방어력만 붙어도 아무 기능 없을 때보다야 훨씬 낫다. 남들보다 보조 방어구 하나 더 착용했다는 개념이 되니까.
“또한 속옷은 천으로 제작하는 거지요. 속옷 제작법을 습득한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천을 다루는 방법을 익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드 님 당신은 아직 천 계열 무구를 제작할 수 없지요?”
“아…! 그렇구나!!”
투명 후드 집업과 란스티어의 망토를 만들 당시를 돌이켜보자.
대장장이인 그리드는 천 계열 아이템인 그것들을 제작할 수 없었고 결국 창조 스킬을 소모한 바 있다.
‘하지만 천 방어구 제작법을 익히게 되면 앞으로 망토 계열 아이템을 만들 때 굳이 창조 스킬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전직 퀘스트 보상이 속옷 제작법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던 그리드가 거짓말처럼 다시 또 환희 웃었다.
‘겸사겸사 아이린에게도 속옷을 만들어서 선물해주면….’
밤에 보는 아이린의 모습이 더욱 더 아름다워질 터.
헤벌쭉.
뱀파이어의 잠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욱 더 유혹적인 모습이 될 아이린의 모습을 상상해보던 그리드가 문득 유라와 지슈카를 떠올렸다.
‘그 둘의 정확한 사이즈가 늘 궁금했었는데…’
기능성 속옷을 제작해준다는 핑계로 사이즈를 물어볼 수도 있겠구나?
“헤헤.”
그리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예의 그 탐욕 깃든 미소가 아니라, 보다 순수한 미소였다.
스틱세이가 다소 놀랐다.
‘이런 소년 같은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분이셨나?’
영혼이 깨끗한 인간이었구나.
하긴, 평소의 그리드가 동료와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를 돌이켜보면 참 올곧은 인물임을 엿볼 수 있다. 보통의 인간과는 필시 다르다.
그리드에게 더 큰 호감을 품게 된 스틱세이가 그에게 보다 자세한 퀘스트 정보를 전달해주었다.
“북부로 가십시오. 스테임 공작이 다스리는 영토 말입니다. 그곳에서 속옷 장인에 대한 단서를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이참에 장인어른 얼굴도 보면 되겠군.”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곧바로 채비를 갖췄다.
마검 제작은 일단 뒤로 미뤘다.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제작법들을 습득하고, 아이템 제작에 대한 식견이 높아지면 그때 가서 마검을 설계하는 편이 좋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후후훗!”
기능성 속옷으로 무장해서 템빨을 높이는 동시에 세계 최고 미인들의 사이즈를 알 수 있는 기회까지 거머쥐게 되다니!
그리드는 너무 신나고 기뻐서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지나가던 플레이어들이 우연히 그를 보고 수군거렸다.
“헉. 저거 그리드 맞아?”
“그럴 리가… 길바닥에서 바지 내리고 있는 사람이 그리드일 리가 없지…”
“…못 본 거로 하자.”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들이 기본적으로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참 다행인 부분이다.
만약 타지의 플레이어들이 그리드의 지금 모습을 봤다면 인터넷에 또 온갖 루머가 확산됐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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