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30권 - 4화
‘멋있어져야 해.’
템빨왕 그리드는 수십만 백성의 어버이다.
5살짜리 꼬마도 그리드를 알아보고 의지했다.
그리드에게는 품격을 갖춰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부끄럽지 않도록, 누군가에게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또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을 안겨주도록.
왕이 품격을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외관이라는 것은 품격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이다.
‘템빨국은 아직 약소국. 잠재적인 적도 많다.’
특히 그들이 쉬이 볼 수 없게끔 위압적인 외관을 갖추는 편이 좋을 거라고 그리드는 판단을 내렸다. 그가 마검을 제작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라우엘과 마안족에게 중2병이 옮았기 때문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인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리드의 미적 감각이 평균보다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마검이라… 붉은 눈동자를 연상하게 만드는 커다란 보석을 손잡이 중앙에 쑤셔 박아 넣고, 손잡이 좌우 날개는 박쥐 날개 모양으로 디자인하면 음침하고 강해보이겠지? 왕관은 벼락 맞은 것처럼 뾰족뾰족하게 디자인해서 눈에 띄고 위협적으로…’
음음.
혼자 생각해 보고 흡족해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
그의 곁에서 광룡철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던 칸이 의문을 표해왔다.
“한데 전하, 광룡철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광룡철과 같은 수량의 광룡석이 확보되어야할 텐데요. 광룡철은 무한히 증식하는 반면 광룡석은 유한하지 않습니까?”
“이미 광룡의 둥지에 광부들을 파견했어요. 그들이 광룡석을 꾸준히 공급해 줄 겁니다. 그보다 칸, 사석에서는 편하게 대하시라니까요.”
“전하와 나란히 서는 영광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전처럼 전하를 편히 대하기에는 제가 전하를 존경하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이 양반 자꾸 왜 이래, 서운하게.”
“그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전하, 제가 감히 한 가지 추측을 해보건데 광룡의 둥지에 매장 된 자원은 무한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젠가 광룡석은 고갈될 터이고 광룡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게 될 거라고 봅니다.”
“흠… 그야 나도 알지만…”
그리드는 이미 광룡석에 대해서 충분한 실험을 해보았다.
광룡철의 증식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광룡철10:광룡석5 비율로 섞어서 제련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무한히 증식하는 광룡철의 수량을 결국 광룡석의 수량이 따라잡지 못하게 될 거란 사실을 시사하는 실험 결과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광룡석을 직접 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섭리에 따르는 수밖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나중에 광룡석이 다 떨어지면 광룡철은 버리고 다른 자원으로 무구를 생산하는 수밖에.”
“흐음… 혹시 광룡석으로 망치와 모루를 제작하면 어떨까요?”
“엥?”
“광룡석에 깃들어 있는 억압의 이능, 광룡철에 깃든 증식의 이능처럼 도구로 제작한 뒤에도 발현될 수 있지 않습니까?”
“아!”
Satisfy를 처음 시작하는 플레이어는 세상천지 모르는 벌거숭이나 다름없다. 그들을 인도하는 존재가 바로 NPC다. 플레이어가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NPC도 성장하면서 꾸준한 가르침을 준다.
칸의 조언은 새겨듣는 것이 마땅했고, 이를 토대로 그리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광룡철로 제작한 아이템이 이능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것처럼 광룡석으로 제작한 아이템 또한 이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겠구만?’
광룡석으로 제작한 망치와 모루로 광룡철을 단련할 경우, 광룡철에 깃든 증식의 이능이 억압의 이능에 의하여 무효화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즉, 무한히 증식하는 광룡철의 이능을 유한한 광룡석으로도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는 뜻.
“바로 실험해보도록 하죠.”
광룡석 자체의 경도는 낮다.
광룡철을 단련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망치와 모루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광룡석 뿐만 아니라 다른 광물을 함께 재료로 사용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드는 광룡석에 흑철을 섞어서 모루와 망치를 제작해봤다.
결과는?
[아이템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검은 광룡 망치>
등급:에픽
내구력:410/410 공격력:130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는 중인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대장장이용 망치입니다.
흑철로 구성되어서 상당히 튼튼합니다. 대부분의 광물을 무리 없이 단련할 수 있습니다.
단, 이 망치에는 광룡석이 대량으로 함유되어있습니다. <억압>의 이능 탓에 광물 고유의 특성을 삭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유 특성을 보유한 광물 단련에 이 망치를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기를 당부합니다.
사용 조건:고급 대장장이 기술 레벨 1.
무게:400
<검은 광룡 모루>
등급:에픽
내구력:2,500/2,500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는 중인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모루입니다.
흑철로 구성되어서 상당히 튼튼합니다. 강하고 지속적인 마찰을 견딜 수 있는 내구력을 갖췄습니다.
단, 이 모루에는 광룡석이 대량으로 함유되어있습니다. <억압>의 이능 탓에 광물 고유의 특성을 삭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유 특성을 보유한 광물 단련에 이 모루를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기를 당부합니다.
사용 조건:고급 대장장이 기술 레벨 1.
무게:6,900
“좋아!”
칸의 예상대로였다.
억압의 이능은 도구로 만들어진 후에도 발휘되었다.
회심의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검은 광룡 망치와 모루를 이용해서 광룡철의 단련을 시도했다.
그리고 실망했다.
[<검은 광룡 망치>와 <검은 광룡 모루>가 <광룡철>의 이능을 억제하는 것에 실패하였습니다.]
“아.”
아무래도 순수한 광룡철의 이능을 억제하기에는 광룡 망치와 모루의 억압 이능이 약한 듯하다.
“쩝.”
너무 크게 기대하였던 바람에 실망감도 크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그리드에게 칸이 사견을 내놓았다.
“모루와 망치를 광룡석과 광룡구 조합으로 제작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광룡구의 폭주 이능이 광룡석의 억압 이능을 증폭 시켜서 억압의 효과가 강해진다면 광룡철의 이능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잰데?”
그리드가 칸을 괜히 의지하는 게 아니다.
장인급 대장장이답게 칸은 무척 유능했고 그리드에게 실제로 큰 도움이 됐다.
칸의 가설이 확실하다고 믿은 그리드가 단 7개밖에 없는 광룡구 중 하나를 투자해서 새로운 망치와 모루를 제작했다.
<광룡 망치>
등급:유니크
내구력:630/630 공격력:290
전설을 넘어서 신화가 되어가는 중인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대장장이용 망치입니다.
광룡구로 구성되어서 무척 튼튼합니다. 어떤 광물이라도 단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 이 망치에는 광룡석이 대량으로 함유되어있습니다. <억압>의 이능이 광룡구의 <폭주>이능과 맞물려 증폭된 상태입니다.
이 망치를 이용해서 광물을 제련할 경우, 광물의 고유 특성이 무조건 삭제됩니다. 고유 특성을 보유한 광물 단련에 이 망치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해주십시오.
사용 조건:고급 대장장이 기술 레벨 3.
무게:600
<광룡 모루>
등급:유니크
이하 생략.
“크으…!”
칸의 가설은 정답이었다.
전율한 그리드가 광룡 망치와 광룡 모루로 광룡철을 단련해보았고 결과는 훌륭했다.
광룡철의 증식 이능이 완벽하게 억제됐다.
이 광룡 망치와 모루만 있으면, 앞으로 템빨국은 무한히 증식하는 광룡철을 재료로 언제까지고 아이템 생산이 가능할 것이었다.
“좋았어! 대박이야!”
신나서 방방 뛰는 그리드.
반면 칸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광룡 망치와 모루 세트를 하나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광룡구가 1개… 말인 즉 광룡 망치와 모루 세트는 총 7개밖에 제작할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아, 맞네. 광룡구는 7개밖에 없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섯 개에요.”
7개의 광룡구 중 하나는 그리드가 마검의 제작 재료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니까.
‘광룡의 둥지에 파견한 광부들이 광룡구를 더 찾아 줄 가능성은 없으려나?’
하여튼 어떤 일이든 간에, 딱! 하고 한 번에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없다.
좌절하는 그리드를 칸이 위로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할 문제는 아닌 듯합니다. 애초에 우리의 인력은 한정되어 있으니까요.”
옳은 말이다.
광룡 망치와 모루 세트를 사용할 수 있는 대장장이는 칸과 그리드를 포함해도 총 26명에 불과했다.
그중 개인 활동에 집중할 그리드와 레이단으로 파견할 렉터를 제외하면 24명이 된다.
만약 더 많은 망치와 모루 세트를 확보한다고 해봤자 24명의 작업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우리 24명이 6개의 망치와 모루를 교대로 사용하면서 24시간 내내 그리드 세트를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크음… 고급 대장장이들 하루에 잠 4시간씩만 재우고 혹사 시킬 생각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널널한 작업 시간을 주게 생겼군…”
“예?”
“아니, 아니에요. 작업 통솔은 당신께 맡기도록 할게요. 칸, 부디 건강에 유념하시고 스미스라는 게이 영감을 조심하도록 해요. 괜히 홀아비끼리 눈 맞지 말고.”
“……”
이제 준비는 끝났다.
무한히 증식하는 광룡철을 대량으로 확보해놨고, 광룡철의 증식 이능을 컨트롤할 수 있는 망치와 모루,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그리드 세트를 제작할 수 있는 고급 대장장이들 또한 준비 됐다.
앞으로 템빨국은 그리드 세트의 대량 생산에 주력할 것이고 이는 템빨국 최강의 무기가 될 것이다.
-라우엘, 이쪽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슬슬 연계 퀘스트를 풀도록 해.
-크큭큭…! 드디어 고난이도 퀘스트의 봉인을 해제할 때가 도래한 것이로군요? 크윽, 이 떨림은 뭐지? 내 몸 속에 봉인 된 흑염룡이 즐거워 날뛰려하는 것인가?
-…..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떠올리지 못했다.
광룡철의 또 다른 사용법 말이다. 아주 획기적인 사용법이었다.
***
[국가 퀘스트 <조국을 위하여>가 생성되었습니다.]
<조국을 위하여(1)>
연계 퀘스트
템빨국의 치안을 위협하는 몬스터, 혹은 비인가 조직을 퇴치하십시오.
퀘스트 보상:경험치와 골드
<조국을 위하여(2)>
연계 퀘스트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노동으로 획득한 자원의 일정량을 템빨국에 헌납하거나 템빨국 내에 존재하는 상점에서 일정량 이상의 상품을 구매하십시오.
퀘스트 보상:경험치와 골드
<조국을 위하여(3)>
연계 퀘스트
라인하르트 주민들의 바람을 들어주고 그들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끔 도와주십시오.
퀘스트 보상:양산형 그리드 무기
[<조국을 위하여> 퀘스트는 총 21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간제한은 없으며 도중에 포기 가능합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는 세트 전부를 수집할 경우 높은 능력치를 자랑합니다.]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 10만여 명에게 이와 같은 내용의 퀘스트가 공고됐다.
하지만 퀘스트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사냥해야하는 몬스터의 레벨, 템빨국에 헌납해야하는 제물의 양 등이 상당했기 때문에 최소 180레벨 플레이어나 도전해볼 수 있는 퀘스트였다.
10만 명의 플레이어 중 채 1만 명도 안 되는 플레이어만이 도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1~3단계 퀘스트 난이도가 이렇다. 단계가 오를 경우 얼마나 더 난이도가 높아질지 섣불리 추측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반발은 없었다.
이 고난이도 퀘스트는 템빨국 소속 플레이어들에게 뚜렷한 목적의식을 심어줬다.
‘나도 빨리 강해져서 퀘스트에 도전해야지!’
템빨국이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템빨의 힘이었다.
***
<(칼럼)신영우>
최근 유저들 사이에서 템빨국의 연계 퀘스트가 화제다. 총 21단계로 구성 된 이 연계 퀘스트는 3단계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보상으로 준다.
그리드 세트.
비록 이름 앞에 ‘양산’이라는, 다소 값싸게 느껴지는 단어가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그 가치를 폄하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범한 유저에게 전설의 대장장이가 제작한 아이템을 사용해볼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오겠는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 세트를 목표로 템빨국 이주를 꿈꾸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나는 템빨국이 공고한 연계 퀘스트의 내용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8단계까지 공개 된 연계 퀘스트의 내용들, 하나 같이 템빨국 국력 발전과 직결된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이번 퀘스트 사태가 템빨국의 빠른 발전을 유도하리라고 확신한다.
템빨국은 부유해질 것이다. NPC들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기존의 왕국들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오로지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의 위력 하나로 말이다.
그가 대장장이의 힘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적어도 나는 예상치 못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드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당시를 돌이켜 보라.
아마 당신은 그를 보고 ‘템빨’이라며 비하하고 비웃었을 것이다. 템빨의 진정한 위력을 몰랐을 테지.
그리드, 신영우.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 아니, 평범 이하였다는 청년이 이제는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리고 그의 지금은 당신의 미래일 수도 있다.
가상현실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몰입해라. 미친 듯이 즐겨라.
당신은 제2의 신영우, 제2의 그리드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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