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57화 (30권) (452/1,794)

템빨 3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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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30권 - 1화

혈통과 출신에 의거해서, 무력으로 쟁취해서, 도구로 이용당해서, 백성의 바람으로 등등.

왕이 되는 이유와 수단, 방법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아무나 왕이 될 수는 없다. 왕이란 하늘이 내린 존재라고 봄이 옳았다.

Satisfy개발자 임철호는 왕이라는 존재의 특별함에 주목했다.

국가 전복 에피소드와 벨리알 강림 에피소드를 발생시킴으로써 게임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스란 국왕.

아티팩트 제작 재료를 생산하는 한편 강력한 무력을 지닌 맥스옹 국왕.

이들처럼 Satisfy의 왕들은 모두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했고, 이는 모두 임철호 회장의 안배였다.

그들을 직접 겪은 그리드는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마안족 왕도 필시 특별할 테지.’

그래, 명색이 왕이다.

중2병 걸린 다른 마안족들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후우.”

대신들의 안내를 받아서 대전 앞에 선 그리드가 심호흡했다.

마안족.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플레이어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최강의 종족.

그들과 템빨국이 정확히 어떤 관계가 될지는 오로지 그리드의 손에 달려있는 바.

그리드는 부담감에 짓눌렸고 긴장을 금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굳이 위축되어서 냉정함을 잃는 우를 범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마안족과 좋은 관계를 맺어 보이겠다.’

저벅.

마음을 추스른 그리드가 대전의 입구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지고한 존재. 우리 마안족 대신들의 복종심마저 불러일으키는 템빨왕 그리드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마안족 대신들이 왕에게 그리드의 입장을 알렸다.

누가 보면 그리드의 신하 같은 본새다.

“당신 덕분에 광룡의 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들었소. 모든 마안족을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성격 마음에 드는군.’

촛불 하나 밝혀지지 않은 대전.

그 어두컴컴한 장소 안쪽 왕좌에 마안족 왕이 앉아있었다. 그리드가 입장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예절을 표하였으니 그리드는 흡족했다.

‘내가 인간이라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고 감사할 줄 알며 예의까지 갖추다니, 마족 같지가 않아. 과연 왕은 다르군.’

목소리와 말투로부터 느껴지는 위엄부터가 일반적인 마안족과는 다르다. 중2병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상대가 마안족이기 때문에 기꺼이 광룡의 알을 넘긴 거요. 마안족과 교류를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우리 템빨국은 마안족과 맹우가 되기를 원하오.”

그리드 또한 존중으로 대응했다. 마안족 왕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자신의 뜻을 솔직하게 피력했다.

마안족 왕이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맹우라… 인간이 마족과?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보오?”

“종족이 무슨 상관이겠소?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면 피차 의지하는 편이 이득 아니오?”

“그것 참 합리적인 사고관이군. 하지만 당신의 백성들은 입장이 다르지 않겠소? 평범한 인간은 마족을 겁낼 텐데? 과연 그들이 우리 마안족과 교류를 맺는 것을 달가워할까?”

“겁먹기보다는 오그라질 우려가 있지만… 뭐, 내 백성들은 이미 충분히 라우엘에게 적응된 상태이니까 아마 괜찮지 않을까 싶소.”

“오그라진다? 라우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어찌됐든 내 백성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이거요.”

“흐음… 뜻은 이미 확고한가. 맹랑하군.”

뚜벅. 뚜벅.

미소를 흘린 마안족 왕이 계단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넓은 대전 중앙에 홀로 당당히 서있는 그리드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뭐….?’

어둠을 꿰뚫고 나타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두 눈을 전부 다 가리고 있다고?’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마안을 통제하고자, 모든 마안족은 한쪽 눈에 안대를 착용하고 있다.

그리드는 마안족 왕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제로 본 마안족 왕은 그리드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두꺼운 띠를 둘러서 양쪽 눈 전부를 가리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앞은 어떻게 보지? 설마… 심안?’

마음의 눈으로 만물을 꿰뚫어 보는 경지.

영화 속에서나 봤던 그 지고한 경지를 실제로 보게 되자 그리드는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급인가?’

시조의 죽음 이후, 뱀파이어는 마리로즈가 통치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리드는 마리로즈를 직접 본 경험이 있다. 그녀는 지금의 그리드와 템빨국조차도 한낱 티끌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래, 마안족 왕이라면 필시 그녀와 동급일 터다.

‘내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나?’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긴장하는 그 때였다.

툭.

“…?”

한 걸음, 두 걸음.

그리드에게 점차 가까이 다가오던 마안족 왕이 갑자기 갸우뚱, 휘청거리더니 그리드에게 와서 부딪쳤다.

마안족 왕의 큼지막한 대두가 단전에 닿아오자 당황한 그리드가 그를 부축했다.

“무슨 일이오?”

“앞이 안 보여서…”

“???”

마안족 왕의 대답에 그리드가 두 귀를 의심했다.

“앞이… 안 보여?”

재차 묻는 그리드에게 마안족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빵 같은 두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보다시피 나는 두 눈을 전부 다 가리고 있지 않소. 그러니까 앞이 안 보이는 것이 당연지사지.”

“…..”

앞이 안 보여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주제에 왜 두 눈을 가리고 다니는 거지?

‘변탠가?’

어처구니없어하는 그리드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쓴 미소를 머금은 마안족 왕이 이유를 설명했다.

“불편하지만 어쩌겠소. 나는 전설의 삼마안의 소유자… 단지 눈빛만으로도 세계를 파멸로 몰아넣는 저주받은 숙명의 주인… 스스로 눈을 봉하지 않으면 살육의 역사를 써내려갈지니… 이는 내 전생의 업보요, 짊어져야할 책임이라 할 수 있겠소.”

“…..똑같구나.”

왕은 다르긴 개뿔.

역시 마안족은 마안족이다.

여태껏 마안족 왕이 정상인인 줄 알고 있던 그리드는 대화 도중 갑자기 튀어나오는 오글 멘트에 배신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싫은 기색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리드는 마안족을 의지할 수 있는 친구로 두고 싶었으니까.

오그라지는 손발을 간신히 편 그리드가 마안족 왕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저런, 참으로 딱한 일이구려. 너무 강력한 마안을 타고난 까닭에 눈을 가리고 다닐 수밖에 없다니, 그거 완전히 저주가 아니요?”

“맞소. 지독한 저주요. 나는 심지어 내 부인과 자식들의 얼굴조차도 모르오. 내 마안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기에… 훗,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두 눈을 가리고 있는 이 띠를 풀어본 적이 없다오.”

‘어?’

번쩍!

그리드의 뇌리에 번개가 쳤다.

마안족 왕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묘안을 떠올린 것이다.

이는 오로지 NPC전문가인 그리드이기 때문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었다.

험험, 헛기침하면서 입을 푼 그리드가 생각을 정리한 후 말문을 열었다.

“그것 참 딱하게 됐구려. 그럼 당신은 여태껏 그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한 거요?”

“그렇소. 내 가족과 백성들이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지조차 나는 모르지. 마치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기분이랄까. 지독한 고독이 내 마음과 영혼을 병들어 썩게 하고 있다오.”

순간.

씨익!

그리드의 입 끝이 말려 올라갔다.

하지만 마안족 왕에게 굳이 웃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억양을 최대한 진정시킨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안했다.

“나와 친구가 되는 게 어떻겠소?”

“…뭐요?”

마안족 왕이 귀를 의심했다.

오늘 처음 본 상대. 그것도 심지어 인간이 친구를 운운하였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나를 동정해서 하는 말이요?”

“아, 그런 게 아니니 혹 불쾌해하지 마시오. 나는 그저 당신에게 사람과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즐거움을 주고 싶을 뿐이었소.”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즐거움…? 당신! 여태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은 게요! 나는 삼마안의 주인! 세상 모든 만물을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멸절시키는 저주 받은 존재란 말이요! 나는 절대로 이 띠를 풀지 않을 거요!”

“아니, 풀어보시오.”

“…이!”

제정신이 아닌 건가?

이제는 괘씸할 지경이다.

‘설마 이 나를 허풍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마안족은 결국 마족이다.

일반적인 마족과 달리 쓸데없는 살육을 즐기는 등의 흉포함은 없었지만, 마족 특유의 살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감히 나를 도발하다니…! 나는 마안족의 왕! 설사 당신이 광룡의 알을 확보해준 은인이라고 해도 나를 무시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소!”

광분한 마안족 왕이 두 눈을 가리고 있던 띠를 풀어버렸다.

적색의 왼쪽 눈과 백색의 오른쪽 눈이 동시에 드러나는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대전이 격동하였고 그리드의 시야에는 무수한 알림 창이 떠올랐다.

[저주 받은 삼마안의 시야에 포착되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모든 행동이 예측당합니다!]

[상태이상 ‘지옥불 화상’에 걸립니다!]

[상태이상 ‘지옥빙결’에 걸립니다!]

[상태이상 ‘절대공포’에 빠집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상태이상 반사에 실패합니다.]

쩌정! 쩌저저저정!!

쾅! 콰르르르르륵!!

지독히도 아름다운 광채를 내뿜는 마안족 왕의 마안.

그 시야에 닿는 모든 대상이 얼어붙고, 타올랐으며 무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대전이 순식간에 소멸할 지경이다.

한데.

“…멀쩡하다고?”

폐허가 된 대전 중앙.

마안족 왕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선 그리드는 얼어붙지도, 불타지도 않았을 뿐더러 조금도 떨지 않았다.

제왕의 품격을 유지한 채, 초연한 얼굴로 마안족 왕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마안족 왕은 믿기지가 않았다.

“나의 삼마안이 해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문득, 옛 이야기가 떠오른다.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가 내뿜는 열기에도 불타지 않고 그를 멸하였다는 인간.

검성 뮐러.

“전설…”

부르르.

생전 처음으로 세상을 마주한 눈동자가 떨린다.

자세히, 천천히 그리드를 관찰한다.

“우리 마안족도… 그리고 나도 당신처럼 생겼는가?”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마안족 왕에게 그리드가 대답했다.

“아니, 너희가 훨씬 더 멋있게 생겼지.”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담기지 않은 대사!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다.

작은 가식, 사소한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만약, 과거의 못났던 자신에게 누군가가 따스한 말을 한 마디라도 해주었다면 그리드는 더 큰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런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리드의 대답이 마안족 왕의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대전을 인지하고 눈물을 훔친 마안족 왕이 다시 띠를 둘러 눈을 봉했다. 그리고 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마안족은 템빨국의 든든한 우방이 될 것이다.”

“고맙다. 후회되지 않는 선택이 될 거라고 단언하마.”

[템빨국과 마안족이 동맹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날.

아직 플레이어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절대 최강의 마족이 템빨국의 맹우가 되었다.

템빨국의 저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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