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22화
“크윽… 끓어오르는 열기의 저주가 나의 고귀한 영혼에 심대한 크리티컬을 안기는구나.”
“큭큭큭…! 이게 바로 위대한 마안족의 숙명인가? 온 세상이 우리를 경계하고 견제하니 여러모로 피곤하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서늘한 그늘 아래 앉아 바람의 축복을 맞이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 후훗.”
한 마디로 쉬고 싶다 이거다.
마안족과 함께하는 나흘 동안, 그리드는 마안족의 대사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몇 년 동안 라우엘과 함께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쉰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또 쉬자는 거야? 조금만 더 참아봐.”
마안족들은 체력이 정말 저질이었다.
10킬로미터 구간마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마안족들 탓에 이동속도가 현격히 느렸다.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마안족 도시에 도착한다는 거지?’
마안족 도시는 가우스 왕국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안족이 도시의 위치를 알려줬을 당시만 해도, 그리드는 그곳이 템빨국과 비교적 가깝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하지만 가까우면 뭐하는가?
마안족들이 몇 걸음 채 걷지도 못하고 헥헥거렸으니 실제로는 멀게만 느껴진다.
‘3일이면 도착할 줄 알았는데 벌써 나흘 동안 절반도 못 가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스틱세이를 동행할 걸 그랬다.
매스 텔레포트를 아쉬워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의 영혼이 속삭여왔다.
‘초조해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겨라. 인간이 마안족과 교류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천운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짜증이 날지언정 감사하게 여기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마안족에 대해서 잘 아나봐?”
‘당연하다. 우리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쫓겨난 마족을 모를 리 없지. 놈들이 지옥에서 쫓겨난 이유는 뱀파이어가 쫓겨난 이유와 많이 다르지만…’
그리드가 농담 삼아서 유추해보았다.
“하도 오글거리게 말해서 쫓겨난 거 아니야?”
‘맞다. 마안족이 한 마디 지껄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던 대악마들은 점차 마안족을 기피하게 되었고, 결국 지옥에서 영영 추방하는 선택을 내렸다고 하는군.’
“지, 진짜냐…”
마안족의 지옥 추방 비화를 알게 된 그리드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브라함이 피식 웃었다.
‘잘 된 일이지. 마안족의 힘은 편리하고 강력하거든. 만약, 마안족이 지옥에서 쫓겨나지 않고 여전히 대악마를 섬겼다면 대악마의 권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대단했을 것이다.’
‘브라함이 이렇게까지 남을 극찬하는 건 드문 일인데.’
역시, 그리드의 예상대로 마안족은 대단한 종족이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피라미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중얼중얼.
마안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브라함과 대화 중인 그리드.
나무 그늘 아래 앉은 채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마안족들이 피시시 웃기 시작했다.
“과연, 그리드 너는 인간답지 않게 굉장하다. 제2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는 경지에 오르다니, 우리 평범한 마안족 주민보다 더 대단하군.”
“그리드 너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 속에 잠재 된 제2의 자아를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도 그것과 대화까지 가능한 사람은 참 드물 텐데 말이지.”
“…..”
설마 이 녀석들, 나를 자신들과 동류로 인식하고 있는 건가?
그리드는 몹시 불쾌하였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브라함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은 누가 봐도 중2병 말기 환자를 연상하게 만들었으니까.
‘제길.’
왠지 모를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는 그리드.
그는 모르고 있었지만 마안족과 그리드의 호감도는 엄청난 속도로 상승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마안족의 중2병 대사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 크게 작용하는 중이다.
라우엘과 브라함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엄마 보고 싶다…’
그리드 곁의 마이너는 고통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그리드와 마안족들이 대화를 나눌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오그라졌으니 고통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뻘뻘 흐르고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으며 머리는 핑글핑글 돌았다.
그렇다.
마안족은 굳이 마안을 개방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종족이었다. 괜히 마족이 아닌 것이다.
***
“내가 어쩌다가 이런 변방으로 좌천 당하는 신세가 된 거지?”
아모레.
가우스 왕국 소속 플레이어인 그의 클래스는 <기사>다. 그것도 국왕 직속 기사단 소속의 기사.
한마디로 최상위 전투 클래스 전직자였다.
실제로 그는 보르네오 전투 당시 템빨국 병사를 34명이나 사살하는 무용을 세우기도 했다.
보르네오 성벽 위에 진을 치고 있던 템빨국 병사들을 일일이 활로 저격해서 사살한 그의 활약은 여전히 회자 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에이스 중의 에이스인 내게 고작 이딴 촌동네 방위를 맡기다니, 국왕 그거 치맨가?’
하아, 한숨을 내쉰 아모레가 새로 파견 온 마을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논이요, 맑은 공기 중에는 소똥 냄새가 감돌고 있었으니 영락없는 농촌이다.
가우스 왕국의 에이스라고 자부하는 아모레의 입장에서 이번 파견은 실로 부당한 것이었다.
연신 불만을 토하고 있는 그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레피오의 영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NPC 웨스턴이었다.
남작이자 이곳 촌동네의 영주인 그가 아모레를 격하게 환영했다.
“왕실 기사단의 신성 아모레 경을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별말씀을… 저야말로 명망 높은 웨스턴 남작을 뵙게 되어 기쁘군요.”
기사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첫 번째 덕목은 예절이다.
연신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끔 화사한 미소를 지은 아모레가 웨스턴 남작에게 화답했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웨스턴 남작이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가 왕실에 지원을 요청한 이유는 최근 마을에서 종종 마족이 목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족을 퇴치해주시길 바랍니다.”
“마족이라고요?”
마족은 일반 몬스터와 완전히 다른 종으로 분류된다.
지옥의 주민쯤으로 이해하면 좋다.
마족이 인간계에서 목격됐다는 것은 썩 좋은 소식이 아니다.
“혹시 뱀파이어입니까?”
인계에서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마족이라 하면 단연코 뱀파이어다.
유추해보는 아모레에게 웨스턴 남작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최근 주민들에게 목격 된 마족의 생김새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3등신 체형의 대두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3등신 체형의 대두 괴물이라…”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이란 말인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치게 혐오스럽다.
절로 눈살을 찌푸린 아모레가 질문했다.
“놈들이 마을에 어떤 피해를 입힌 겁니까?”
절도, 방화, 납치. 심하면 살인까지…
마족이라면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어도 이상하지 않다.
퀘스트 보상을 확인하고 흡족해진 아모레는 마을의 피해 현황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마족의 단서를 잡아갈 계획이었다.
한데.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뭔 소리야?
영주의 답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모레가 재차 물었다.
“마족이 주술을 사용해서 마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고요?”
“아니요, 주술이 아니라 그냥 헛소리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포 분위기가 아니라 이상한 분위기를 조성한다고 할 수 있고요. 마족의 대사를 한 번이라도 들은 마을 사람들은 손발이 오그라져서 한동안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다고 합니다.”
“…?”
뭔 헛소리지?
영주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모레의 혼란은 커졌다.
‘도대체 무슨 마족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군.’
이런 변방까지 파견 온 것만 해도 서러울 지경인데 퀘스트 스토리까지 혼선을 빚자 아모레는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웨스턴 남작이 안겨준 퀘스트 난이도는 무려 S등급으로 보상이 무척 훌륭했기 때문에 아모레는 퀘스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까지 자신을 파견한 사람은 국왕인 바, 거부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흠… 어찌됐든 그 마족을 퇴치하면 되는 거지요?”
“네, 맞습니다. 아모레 경만 믿겠습니다.”
살짝 목례한 웨스턴 남작이 성으로 돌아갔고 혼자 남은 아모레는 마을을 시찰했다.
마을의 특성을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마족 사냥 계획을 짤 요량이었다.
‘사람 진짜 없네.’
정말 작은 마을이다.
주민의 숫자는 천 단위에 불과하고 플레이어는 보이지도 않는다.
무료함을 느끼면서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아모레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마을의 입구 쪽에서부터 일단의 무리를 발견한 까닭이다.
‘이 야심한 시각에?’
웨스턴 남작과 헤어지고 반나절.
어느덧 밤이 깊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이때 마을에 20명가량의 방문객이 찾아온 것은 심상치 않다.
골목 어귀에 숨어서 기척을 지운 아모레가 방문객들을 관찰하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3등신…!’
방문객의 숫자는 정확히 19명이었다.
우선 두 명은 인간 남성이다.
한 명은 마이너라는 이름의 NPC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NPC인지 플레이어인지 구분이 안 된다.
어찌됐든 그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하고 있는 나머지 17마리의 몬스터가 문제였다.
안대를 쓰고 있는 그들은 하나 같이 3등신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매를 지닌 대두들. 앳된 얼굴에 젖살이 포동포동 오른 것이 어째 상당히 귀엽다.
‘바로 저놈들이 웨스턴 남작이 말한 마족들인 것 같은데.’
상상했던 것과 달리 혐오스럽지 않고 귀엽자 의외다.
‘뭐, 생김새는 중요한 게 아니지.’
나의 임무는 마족을 퇴치하는 것이다.
퀘스트를 수락하고 반나절 만에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심지어 숫자도 열일곱. 저것들을 모조리 처치한다면 엄청난 보상을 획득할 수 있겠군.’
이건 절호의 기회다.
더 높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
철컥.
의욕을 불태운 아모레가 허리춤의 칼집 위로 손을 얹었다.
마족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기회가 찾아오면 불시에 습격하여 모조리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아모레의 레벨은 무려 303.
한 눈에 봐도 약해보이는 귀여운 마족들 17마리 따위야 순식간에 해치워 버릴 자신이 있었다.
‘저놈들과 같이 있는 두 명의 인간은 노예일 수도 있어. 마족들을 해치우고 구출하면 추가 연계 퀘스트를 획득할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봐도 최상의 상황이다.
아모레의 입가로 차츰 미소가 피어오르는 그때였다.
“후후훗, 달빛에 젖은 고요한 마을의 풍광이 여행에 지친 나그네의 마음을 달래주는군. 내 한쪽 눈에 봉인 된 암흑의 기운조차도 평온함에 심취하여 흉포한 본능을 잠재웠을 지경이니 이 어찌 아름다운 밤이 아닐쏘냐.”
“…?”
“호오?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내 영혼 속에 잠재 된 냉기를 자극하는군. 이거 꽤 좋은 감각이야. 정신이 맑아지고 힘이 끓어오르는 것이 오늘 밤의 나는 「측정 불가」 「감당 불가」의 괴물이다.”
“???”
“훗, 그래도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걸? 내 눈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잔학한 불길이 너의 냉기를 집어삼키는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으니까.”
“????”
생전 처음 겪는 일이다.
마을에 입장한 17마리 마족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는 순간, 아모레는 전신에 닭살이 돋았고 몸이 배배꼬였다.
특히 칼집 위에 올려두었던 손이 오그라지면서 칼을 쥘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
‘크윽…! 이게 바로 웨스턴 남작이 말했던 저주인가?’
손발이 오그라지는 상태이상이라니?
아모레는 혼란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만해도 만만하게 보였던 저 17마리의 꼬마 마족들에게 도무지 덤빌 엄두가 안 났다.
놈들의 헛소리를 정면에서 들었다가는 저항조차 못하고 그대로 위험에 빠질 것이 자명했다.
‘귀, 귀마개.’
그 쓸모없는 잡템을 필요로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응?”
우왕좌왕하던 아모레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을 중앙으로 이동하고 있던 17마리의 마족들과 두 명의 인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까닭이다.
“역시 마족…”
귀신같은 놈들이다.
무섭다.
아모레는 퀘스트 포기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
[<마안족 도시>에 입장하였습니다!]
[마안족 도시의 최초 발견자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열흘 동안 마안족 도시에 존재하는 ★히든 퀘스트★ 발견 확률이 5배 상승하고 퀘스트 보상이 강화됩니다.]
‘드디어 나도!’
마안족 도시에 입장한 그리드가 전율에 휩싸였다.
특정 지역을 최초로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퀘스트를 선점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으니 기쁘기 짝이 없었다.
드디어 그리드도 크라우젤처럼 선두에 서는 입장이 된 것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이분은 진짜 보면 볼수록 대단하시다.’
마족들이 득실거리는 도시에 입장하고도 긴장하기는커녕 신나서 싱글벙글 웃는 그리드.
그의 담대함이 마이너는 그저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었다. 자신도 그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을 새삼 다시 품었다. 겁에 질려서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자 이를 악물고 견뎠다.
그를 본 그리드가 기특해하는 사이.
“여기가 바로.”
“우리 마안족의 왕께서 기거하시는 성. 이름하여 다크 플레임 화이트 아이스 캐슬이랄까. 후훗.”
“….”
마안족들의 키가 작기 때문일까?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도시 끝에 우뚝 선 성 또한 무척 작았다. 성이라기보다는 대저택 수준이다.
성문 높이도 1미터 60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그리드는 허리를 한껏 숙여야 성에 입장할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마안족의 대신들이었다.
“바로 그대가 광룡의 알을 확보하도록 도와준 소문의 인간이란 말이지? 인간치고는 제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윤회전생의 상징이며 다크 플레임과 화이트 아이스를 다루시고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보시는 우리의 위대한 왕을 영접할 자격까지 있을 지는 의문이군.”
“이건 적의가 아니다. 마안족의 왕은 단지 눈빛만으로 인간의 목숨과 운명을 빼앗는 절대적인 존재. 자격도 없는 자가 그분을 영접하였다가는 영겁의 지옥에 빠지고 결국 죽음에 도달할 수 있다. 하니 그대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험해봐야 한다. 복종안.”
[위대한 마안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상태이상 ‘복종’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최초의 왕> 칭호 효과로 인해서 <대왕의 위엄>이 발동합니다.]
[상태이상을 반격합니다.]
“크큭… 우리의 왕과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인간이시여, 그대의 방문을 격렬하게 환영하는 바입니다.”
“……”
아주 그냥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잘도 논다.
넙죽 고개를 조아리는 대신들에게 안타까움이 깃든 시선을 보낸 그리드가 대전에 입장했다.
브라함도 인정하는 마안족의 왕과 대면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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