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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55화 (450/1,794)

템빨 29권 - 21화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

개 조심 던전에서 탈출한 포식이불족발이 상태 창을 확인하고 한숨 돌렸다.

침입자 그리드가 던전의 몬스터를 몰살시키고 모든 함정을 파괴한 까닭에 포식이불족발은 위로금 차원의 경험치를 대량으로 획득한 상태였다.

‘덕분에 레벨이 두 개나 더 올랐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무력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점이 좋다.’

그리드 같은 절대강자와 전력으로 겨뤄볼 수 있는 기회는 억만금을 주고도 쟁취하기 어려운 것이다.

포식이불족발은 그리드와 싸워본 경험을 성장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그렇다.

무려 1년 동안 지켜온 광룡의 알을 잃고도 포식이불족발은 좌절하지 않았다. 고작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하고 무너지기에는 그의 정신력이 너무나도 견고했다.

극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인의 의지요, 외국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인의 독기다.

e스포츠가 성행하던 시기, 반세기 이상 게임 강국으로 군림했던 대한민국의 저력이 Satisfy에서도 슬슬 개화되고 있는 것이다.

‘플레이어 최초로 드래곤의 주인이 되겠다던 꿈이 무산 된 것은 아쉽지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애초에 그 꿈은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마안족들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토대로 추측해봤을 때 드래곤이 인간을 따를 가능성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드도 마찬가지겠지.’

Satisfy 스토리와 설정 상, 광룡의 알은 지옥 세력 견제 패일 가능성이 높다. 일개 플레이어에게 다뤄지기 위해서 안배 된 존재가 아니다.

마음을 다스린 포식이불족발이 블러드 카니발의 창립 멤버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인 세 사람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그리드에게 정체가 발각됐다.

-뭐? 어쩌다가?

-놈의 정보력이 우리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거지. 내가 블러드 카니발의 수장인 것은 물론이고 광룡의 알에 대한 정보까지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세상에 뭐 그런 괴물이…

-괜히 최초의 왕이 된 게 아니야.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상대다. 괜히 더 큰 위험을 자처하지 말고 블러드 카니발을 해산시키자. 우리는 당분간 재야에 있는다.

***

<광룡의 알>

제단 위에 놓여있는 타원형의 알은 그리드보다 족히 배 이상 컸다.

그리드가 181센티미터 신장의 근육질 체형 남성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엄청난 크기다.

“이걸로 달걀 간장 비빔밥 만들면 몇 백 명이 먹겠네… 드래곤 새끼는 갓 부화한 순간부터 사람보다 더 크단 뜻인가?”

“드래곤 새끼가 아니라 헤츨링이라고 부르던데요.”

“아, 그래?”

전투 내내 숨어있던 마이너가 다가왔다.

마안족들도 함께였다.

마안족은 그리드와 포식이불족발의 싸움에 어째서 참전하지 않았나?

계약관계 때문이다.

마족은 계약관계에 놓인 인간을 해치는 것이 불가능한 종족이었으니까.

이는 신의이기에 앞서서 제약이었지만, 마안족은 마족 중에서도 특이해서 긍지가 높았다. 포식이불족발을 대놓고 적대하지 않은 것은 그들 나름의 의리이자 자비였다.

“알의 부화 예정 시간이 언제지?”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을 사용했지만 광룡의 알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예지안의 마안족이 대답했다.

“두 개의 달이 밤하늘의 어둠을 잠식하기를 9회 반복하고, 그 운치에 취한 내가 한 편의 시를 읊게 될 쯤… 이랄까? 큭큭큭.”

“두 개의 달이 뜨는 것은 4개월에 한 번이니까 대략 3년쯤 후라는 이야기군.”

말 알아먹기 더럽게 힘들다.

마안족이 지옥에서 쫓겨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은 그리드였다.

한숨 쉬는 그에게 알림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성공!]

[퀘스트 보상으로 17인의 마안족이 당신의 부하가 됩니다.]

[마안족 종족과의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마안족과 교류가 가능해집니다.]

“광룡의 알을 확보하였으니 약속대로 너의 부하가 되겠다. 크크큭, 영광으로 알아라.”

“뭐든지 명령만 내려라. 네가 그 무엇을 기대하든,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놓을 터이니. 후훗.”

“……”

예의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충성심이 묻어나는 대사들이다.

자꾸만 라우엘이 생각나서 도통 미워할 수가 없다.

“내가 너희들을 직접 데리고 다니기에는 부담감이 너무 크고. 아무래도 너희들은 라우엘 직할부대로 활동해줘야겠다. 녀석이라면 너희들의 능력을 거국적으로 잘 활용할 수 있을 테니까.”

“라우엘? 그게 누구지?”

“우리는 너를 섬긴다고 하였을 텐데? 너 외의 다른 인간을 섬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 너 외의 인간에게 우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을 리도 만무하고.”

“아니, 직접 만나보면 너희들의 마음에도 쏙 들 거야. 라우엘은 너희들 전생의 친구거든.”

“전생의 친구라…? 호오, 그것 참 울림이 좋은 단어로군.”

“그보다 광룡의 알은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광룡의 알을 내가 가질 수는 없겠느냐, 혹은 광룡의 알이 부화하게 될 경우 나를 따르게 되느냐.

그리드는 이런 식의 질문은 던지지 않았다.

클로즈베타 시절부터 Satisfy를 플레이하고 끊임없이 성장한 그리드의 게임 이해도는 이제 무척 높은 편이었으니까.

그래, 그리드는 퀘스트 내용을 토대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부화할 광룡의 새끼… 아니, 헤츨링은 자신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단 사실을 말이다.

‘애초에 대악마보다 강하다는 드래곤이 플레이어 개인의 소유물이 되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랬다가는 게임 망할 거다.

오버 밸런스 수준이 아니라 버그 수준이니까.

납득하면서 미련을 버리는 그리드에게 마안족들이 설명해주었다.

“우선 마안족의 도시로 가지고가서 부화할 때까지 잘 모셔놓을 거다.”

“드래곤은 부화와 동시에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는 존재. 우리 마안족과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할 테지.”

“광룡의 자식이 성체가 되는 천 년 후쯤에는 지옥이 혼돈으로 물들 것이야. 후후훗.”

“천 년?”

미친.

헤츨링이 성체로 성장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려 천 년이라고?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대악마들은 멀쩡하단 소리네.’

이번 광룡의 알 퀘스트는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류의 에피소드가 아니었다는 뜻.

‘차라리 잘 됐지. 드래곤 규모의 스토리가 전개되면 우리 플레이어들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테니까.’

재미없었을 것이다.

그리드는 마안족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인간이여, 우리와 함께 일단 마안족의 도시로 가자.”

“마안족의 왕께서 네게 큰 포상을 하사하실 것이다.”

‘포상은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주는 개념 아닌가.’

그리드는 다소 불쾌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템빨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새로운 종족. 그것도 강력한 종족과의 교류는 필요했으니까.

‘괜한 자존심은 버리고 마안족 전체를 우군으로 만들 수 있게끔 신경 써야겠어.’

결정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안족의 도시로 가자.”

하지만 그 전에.

“곡괭이부터 들어.”

8구역의 모든 벽을 허물고 채광부터 하는 것이 우선이다.

개 조심 던전의 단물을 쪽쪽 뽑아먹으려고 작정한 그리드 탓에 마안족들만 지칠 노릇이었다.

***

“예지안의 귀족이여, 마안족의 주민이며 점화안의 소유자인 이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다.”

“타오르는 불꽃의 눈을 지닌 주민인가? 크큭, 좋다. 말하라. 귀족의 명예를 걸고 너의 질문에 성실히 답해주겠노라 맹세하마.”

“우리는 이미 저 그리드라는 인간을 섬기기로 약조하였고 그리드에게는 우리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 한데 그를 우리의 도시로 안내하겠다고? 이건 배신행위가 아닌가?”

마안족 도시에는 약 1천 명의 마안족이 살아가고 있다.

비록 개체 수는 적지만 그들 모두가 위대한 마안의 소유자였다.

특히 대신급 마안족이 소유한 마안 중에는 <복종안>이 있었다.

예지안보다 상위의 마안인 그것에 그리드가 노출될 경우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드는 영원히 마안족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그리드를 함정에 빠뜨리는 셈이 되는 거야. 긍지 높은 마안족이 할 짓은 아니라고 본다.”

“걱정마라. 그리드는 광룡의 알을 확보하도록 도와준 인간이다. 우리보다 훨씬 더 긍지가 높은 대신들이 그에게 위해를 가할 리 없다.”

따앙! 따앙! 따앙!!

초토화 된 개조심 던전의 8구역.

경험 끝에 <채광> 스킬을 습득한 마안족이 곡괭이질 도중에 그리드를 걱정하고 있었다.

마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의리였다.

물론 이건 마안족 전체의 성향이 아니다.

인간이 저마다 다른 성격을 지녔듯이 마안족도 마찬가지다.

여기 있는 17명의 마안족은 그리드와의 약속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반면 마안족 도시의 대신들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이 사실을 그리드는 알 리 없다.

그저 새로운 종족과의 교류를 기대하며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리드의 인벤토리에 광룡과 관련 된 광물들이 산처럼 쌓이고 있었다.

***

[<블러드 카니발>이 해산되었습니다.]

“뭐?”

세상에는 악인이 셀 수 없이 많고 그들을 필요로하는 사람 또한 많다.

덕분에 블러드 카니발은 지난 몇 년 동안 급속도로 성장해왔다.

이제 블러드 카니발 소속원 숫자는 무려 400에 육박할 정도였다.

한데 그 거대한 세력이 하루아침에 해산 된 것이다.

심지어 소속원들에게조차 아무런 공지가 없이 말이다.

“다크 그 새끼…”

“낯짝 한 번 볼 수 없다 싶더니 역시나, 우리를 한낱 장기말로 봤을 뿐이군. 그래도 몇 년을 같이 활동한 사이인데 아무런 말도 없이 조직을 해산시키다니.”

“뭐, 우리 같은 놈들에게 누가 정을 붙이겠어. 하지만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조직을 하루아침에 해산시킨 건 너무 어리석고 성급한 결정 아닌가?”

“흠….”

혼란에 빠졌던 블러드 카니발 소속원들이 원인 규명에 나섰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다크가 블러드 카니발을 해산시킨 것에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것 같았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며칠 후.

“반 블러드 카니발 연합이라는 놈들이 우리 본거지에 쳐들어왔었다는군.”

“연합원 숫자는 300명에 육박했고 그중에 하이 랭커도 20명 가까이 있었다네.”

“본거지라고 해봤자 특별한 일 없을 때는 다크 혼자 있었잖아?”

“다크 녀석 혼자 있다가 당하고 열 받아서 블러드 카니발을 해산 시킨 건가?”

“아니, 그렇지 않아. 믿기지 않겠지만 도리어 연합이 전멸했다고 한다.”

“뭐?”

다크 혼자서 300명을 궤멸시켰다고?

그것도 하이 랭커가 20명이나 포함 된 연합을?

“다크 녀석 도대체 얼마나 강했던 거지? 백요 자매 이상이었던 건가?”

“볼 때마다 장막 뒤에 숨어있을 때부터 알아봤어. 뭔가 포스가 남달랐다니까?”

“아니, 그럼 뭐야. 무슨 이유로 블러드 카니발을 해체시킨 건데?”

“그게….”

뛰어난 정보력을 기반으로 블러드 카니발이 해산 된 경위를 알아봤던 노페.

모험가 상위 랭커인 그가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뒤에 입을 열었다.

“연합이 다크에게 궤멸 당한 직후에 그리드가 나타났다고 한다.”

“뭐…?”

“그리드가!!!”

블러드 카니발 소속원들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반 블러드 카니발 연합이 만들어지게 된 배후에는 그리드가 있었던 건가?”

“확실해. 그리드는 연합을 이용해서 블러드 카니발의 전력을 파악하고 그 뒤에 직접 나서서 다크를 처치한 것 같다.”

“그리고 협박을 했겠지. 당장 블러드 카니발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템빨국의 힘으로 짓밟아버리겠다고.”

“…코크로 섬을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인가?”

“무시무시한 놈…”

“우리는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그놈이랑은 애초에 상종을 하면 안 됐던 거라고.”

“타, 타르마, 어쩌지? 우리도 그리드에게 죽는 거 아니야?”

“…..”

코크로 섬을 침략했던 타르마와 그 일당들이 바들바들, 공포에 몸을 떨면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몇 년 동안 그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블러드 카니발의 본거지를 찾아내고 단 하루 만에 궤멸시킨 그리드의 저력은 소름끼칠 정도로 굉장한 것이었다.

정작 그리드는 자신이 헤집어 놓은 광산이 블러드 카니발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게 문제다.

“어쩔 수 없지… 템빨국에 무한 척살당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 몇 달이든, 몇 년이든 한동안 몸을 숨기고 다닐 수밖에.”

“하지만 그래서는 행동에 제약이 생겨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리드 그 악마 같은 놈에게 붙잡혀서 탈탈 털리는 것보단 낫잖아?”

“크음…”

이날부터 한동안 Satisfy에 평화가 찾아왔다.

어떤 영웅의 활약으로 다크 게이머들의 활동이 현격히 줄어든 까닭이었다.

정작 그 영웅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요즘 따라 왜 이렇게 귀가 가렵지?”

마안족들과 함께 마안족의 도시로 이동하는 길.

블러드 카니발을 해산시킨 영웅 그리드는 영문도 모른 채 귀만 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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