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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53화 (448/1,794)

템빨 29권 - 19화

“어서 죽이지 않고 뭐하는 거지? 설마 너는 내게 자비라는 이름의 치욕을 선사하려는 거냐? 큭큭큭, 정중히 사양하마. 나는 시간의 흐름을 거머쥐는 예지안의 귀족. 인간의 동정을 받아가면서까지 목숨을 연명하는 것은 수치다. 내 몸속 혈류를 역행시킬 정도의 지독한 수치.”

‘뭐 이딴 놈들이 다 있지?’

벌러덩 드러누운 채 어서 죽이라고 떼쓰는 마안족들.

그리드는 난처했다.

‘그냥 처음부터 죽일 걸 괜히 살려줬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었네.’

역시,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피곤해지는 법이다.

‘애초에 말을 섞은 게 잘못이야.’

마안족의 말투가 라우엘과 워낙 닮은 탓에 정감이 생기고 적개심이 옅어진 듯하다.

‘아?’

난감해하고 있는 그리드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 녀석들, 라우엘이랑 친구 먹으면 죽이 잘 맞을 것 같은데?’

기껏 살려주기로 결정해놓고서 이제와 죽이기에는 영 찝찝한 상황.

그리드가 궁리 끝에 묘안을 내놓았다.

“너희들 말이야, 괜한 목숨 버리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내 부하가 돼라.”

“하?”

섬겨라.

NPC가 아닌 몬스터에게도 과연 이 말이 통할까?

평소의 그리드였다면 아예 기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최초의 왕>칭호 효과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왕은 존경받습니다. NPC와 몬스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력, 위엄, 통솔력 등의 능력치가 더 큰 효력을 발휘합니다.

‘이게 어쩌면.’

마안족을 부하로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밑져야 본전.

반신반의하면서도 기대하는 그리드에게 마안족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작 인간 따위가 우리 마안족 주민들과 귀족을 부하로 삼겠다고? 크큭,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봐도 너처럼 황당무계한 인간은 없었다. 너의 개념은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 같군.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개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무개념인가.”

“충격적이군.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는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어서 죽이라고 누워있던 17마리의 마안족들이 끙끙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머리가 너무 큰 탓에 몸을 가누기 어려운 듯하다.

‘때리는 족족 얻어맞더라니, 체중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민첩성도 최악인가보군.’

마안족은 필시 단점이 많은 종족이다.

하지만 마안의 위력이 절대적인 바.

‘이 녀석들을 부하로 만들 수만 있으면 그냥 대박인데.’

두근두근.

기대감이 점점 더 고조된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예지안의 마안족이 그리드에게 가까이 다가와 섰다. 녀석의 마안은 붉은 광채를 발휘하고 있었다.

“우리가 한낱 인간 따위를 섬길 것 같으냐? 앞서 말했듯이 그건 큰 수치다. 있을 수 없는 일… 뭣이?”

차라리 죽겠다는 각오를 굽히지 않던 예지안의 마안족이 화들짝 놀랐다.

그의 떨리는 시선이 그리드의 뒤쪽으로 향했다.

“저 고양이는…!”

동그란 손에 곡괭이를 쥔 채 끙끙, 어색한 몸짓으로 벽을 부수는 고양이.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뱃살이 인상적인 녀석을 예지안의 마안족은 귀신 보듯이 했다.

“멤피스!!”

오직 대악마만 따른다는 고귀한 혈통의 마수.

지옥 제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그 최강의 마수가 왜 인계에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왜 곡괭이질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납득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하던 예지안의 마안족이 이내 질색했다.

“헥헥… 주인, 나 좀 쉬면 안 되냐옹? 힘들다옹.”

“!!!!!”

이럴 수가!

지옥 제일 마수 멤피스가 고작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다니?

“아직 스태미나 빠방하구만 뭐가 힘들다는 거야? 엄살 피우지 말고 일에 집중해.”

“곡괭이질 재미 없다옹…”

“노동이 재미있으면 그게 노동이냐?”

“니양…”

완고한 그리드.

그의 곁으로 다가와 발라당 드러누운 노에가 통통한 배를 드러냈다. 두 눈은 바둑알처럼 크게 뜨고서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제발 선처해달라고 애교를 부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고, 결국 노에는 다시 곡괭이질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련의 광경을 지켜본 마안족 모두가 벙 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소원대로 죽여주마.”

마안족에 대한 미련을 털어낸 그리드.

그가 무시무시한 곡괭이를 거머쥐자.

“섬기겠다.”

“나도.”

“나 또한 마찬가지다.”

17마리의 마안족 전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비록 네가 인간이라고는 하지만 멤피스를 한낱 순한 고양이로 만들어 버린 점을 보아 존경할만하다.”

“사실 너를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시하는 게 민망하던 차였다. 너는 우리 전부를 쓰러뜨린 존재니까.”

“하지만 섬기기에 앞서서 조건이 있다.”

“조건?”

목숨을 연명하려고 고개까지 숙인 마당에 조건을 내세우다니?

그리드는 괘씸하다기보다 당당한 녀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안족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종족이었으니까.

“조건이 뭐지?”

“우리 마안족의 염원은 대악마의 멸절. 마안족 주민들을 지옥에서 쫓아낸 대악마들을 우리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대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조력자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광룡 네바르탄의 자식.”

“녀석이라면 자신의 아버지를 미치게 만든 대악마들에게 큰 원한을 품을 터.”

“우리는 곧 부화하게 될 광룡의 알을 확보하고 싶다.”

잠자코 듣고 있던 그리드가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망상이지?”

라우엘이 자신의 손에 흑염룡이 봉인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 아닐까?

갑자기 드래곤 스케일의 스토리가 전개되자 너무 비현실적이다.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마안족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 던전의 끝에 광룡의 알이 있다.”

“어떤 인간의 수중에 있는 그 알을 확보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면 우리 마안족은 영원히 너와 함께 운명을 공유할 것이다.”

“아니.”

드래곤과 얽히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거 아닌가?

“나는 됐…”

드래곤 브레스 한 방에 라인하르트가 멸망하는 광경을 상상한 그리드가 마안족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순간이었다.

[★히든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광룡의 알>

★히든 퀘스트★

마안족은 지옥에서 쫓겨난 마족입니다.

마안족 주민들은 네바르탄의 자식과 협력하여 대악마에게 복수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던전의 주인이 지키고 있는 광룡의 알을 확보하여 마안족에게 넘겨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 광룡의 알 확보.

퀘스트 클리어 보상: 마안족 17명을 부하로 습득. 마안족과의 친밀도 상승. 마안족과 교류 가능.

퀘스트 실패 시: 레벨 ?3.

“미친!”

레벨을 세 개나 저당 잡혀버리는 자동 전개 퀘스트라니?

그리드가 좌절감에 휩싸였다.

‘광물 캐러 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야?’

싸워 이긴 마안족을 살려주고, 부하가 되라고 제안하고, 멤피스의 주인인 탓에 그 제안이 수락되고.

이렇듯 우연에 우연이 겹침으로써 발생한 히든 퀘스트다.

어쩌면 영원히 사장됐을 에피소드가 순전히 그리드의 공로로 세상에 공개 된 것이다.

평소의 그리드였다면 자부심을 느끼고도 남았다. 히든 퀘스트 보상에 눈이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

무려 드래곤의 알과 관련 된 퀘스트니까.

드래곤 알을 어디 보통 놈이 지키겠는가?

그리드는 퀘스트 보상이 탐나기는 했지만 퀘스트에 실패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보았다.

“하… 염병… $%@#!”

“…..”

연신 한숨과 욕설을 토해내는 그리드.

분위기가 요상해지자 마안족들이 그리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드로부터 살기를 느낀 탓이다.

“너희를 그냥 죽였어야했는데.”

“…..꿀꺽.”

자기 멋대로 살려주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또 죽였어야 한다며 후회하다니? 그것도 면전에 대놓고 말이다.

마안족이 봤을 때 그리드는 참으로 악랄하고 변덕스러운 인물이었다.

“과연 지옥 제일 마수 멤피스의 주인답게 사악하군.”

“이미 인간이 아니라 악마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이끌리는 것일 테지. 큭큭.”

겁먹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여전히 주둥이는 살아있는 마안족이었다.

잠자코 있는가 싶던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17자루의 곡괭이였다.

“…?”

얼떨결에 곡괭이를 건네받은 마안족들이 멍청한 표정을 짓자 그리드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광룡의 알은 던전 끝에 있다며? 가는 길에 채광을 잊지 말아야지.”

“큭큭…? 설마 우리에게 곡괭이질을 시키려는 것이냐? 위대한 마안족 주민은 하찮은 노동 따위 하지 않…”

“죽이고 싶으니까 조용히 해.”

“…..”

***

침입자가 4구역에 진입하였다는 알림을 확인한 후.

“역시 야식은 족발이 최고지.”

잠시 로그아웃한 다크는 밥을 먹고 왔다.

침입자가 마안족에게 퇴치당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그 빌어먹을 침입자 놈. 진즉 죽어서 쫓겨났겠… 어?”

확신하던 다크의 얼굴이 문득 굳어버렸다.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개 조심 던전이 여전히 ‘전시 모드’를 유지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뭐지? 설마 침입자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무려 20마리의 마안족이 머물고 있는 4구역에 침입하고도 아직 살아있다는 뜻은 즉.

“마안족이 당했다?”

아니, 그건 성립되지 않는 가설이다.

마안족은 단지 상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 무력화시키는 절대 최강의 몬스터인 바. 그런 마안족이 당했을 리 없다.

“아까 그 침입자는 진즉에 격퇴 당했고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난 건가? 헉.”

새로운 가설을 세우며 던전의 방어 기록을 열람한 다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새로운 침입자의 기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아까 그 침입자가 4구역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이 된다.

“어떻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다크를 혼란에 빠뜨렸다. 시야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갈 정도로 커다란 혼란이었다.

“이, 일단 사태 파악을.”

최악의 사태를 상상해버린 다크가 황급히 개 조심 던전의 상태 창을 띄움과 동시였다.

[<개 조심>던전의 7구역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개 조심>던전의 침입자가 8구역에 입장했습니다.]

끔찍한 알림 창이 다크의 시야에 떠올랐고,

“여기가 바로 광산… 아니, 던전의 끝인가?”

귓가에는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네놈… 네놈은 누구냐!!”

분노로 벌벌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른 다크.

살기 가득한 음성으로 소리친 그가 침입자를 향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드?”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이자 최초의 왕.

그 거물 중의 거물이 씹어 먹어도 부족할 침입자의 정체였다니?

당황하는 다크에게 그리드가 흥미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이 거대한 던전의 주인이 플레이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너, 정체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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