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13화
20XX년, Satisfy에 생성 된 플레이어 계정 숫자는 20억 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구 전체 인구의 5분의 1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 세계 경제가 Satisfy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 20억 유저 중 대다수가 라이트 유저였고 휴면 계정도 많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템빨국으로 이주한 유저가 이제 고작 5만에 불과하다는 점은 사람들이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템빨국은 플레이어가 최초로 세운 나라로서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한데 왜 이토록 이주민이 적은 걸까요? 관심도만 놓고 보면 인구수가 급격히 증가했어야 정상일 것 같은데 말이죠.』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첫째, 해외 이주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백성이란 국가의 원동력인 바, 서대륙 모든 왕국들은 자신의 백성이 줄어드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주를 원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세금이나 특정 퀘스트 완료를 요구하는 등, 플레이어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죠. 특히 현재 플레이어들이 이주하려는 국가가 템빨국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굽니다. 15개 왕국 중 템빨국에게 호의적인 왕국은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제국은요? 제국도 플레이어가 템빨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나요?』
『제국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죠. 제국은 서대륙 최고의 국가인데 제국민 중에서 그 누가 굳이 템빨국으로 떠나려하겠습니까? 어떻게 놓고 비교해 봐도 템빨국보다 제국에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은데요.』
『바로 이 부분에서 템빨국 이주민이 적을 수밖에 없는 두 번째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템빨국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신생국가라는 점이죠. 레베카교의 비호를 받고 수인족 왕국 세이렌을 편입시키는 등 굉장한 수완을 보이고는 있으나, 현재로써 템빨국은 뚜렷한 장점이 없는 소국에 불과합니다. 이미 각 나라에 자리를 잡은 플레이어들이 굳이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템빨국으로 이주할 이유가 없죠.』
***
“생각보다 더 느리네.”
백성 현황을 살펴보는 그리드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퀘스트 사건으로 크게 늘어났던 인구 유입률이 다시 적어진 까닭이다.
플레이어의 퀘스트를 지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퀘스트 난이도를 다시 정상적으로 되돌리자 발생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당장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템빨국으로 이주하게 만들만한 방안… 뭐 없을까?’
그리드는 혼자서 궁리해봤다.
이미 이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있을 라우엘에게 가서 굳이 상담해봤자 별다른 대책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오직 나만이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자.’
그리드의 고민은 몇날며칠 동안 이어졌다.
나랏일을 하는 동안에도, 대장일을 하는 동안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노에의 털을 빗겨주는 동안에도, 그리드는 백성을 늘리는 방법만을 모색했다.
결과.
‘퀘스트 보상으로 내가 만든 아이템을 주면 어떨까?’
누가 전설의 대장장이 아니랄까봐, 그리드는 대장장이의 시각으로 이번 문제에 접근하게 됐다.
‘물론 너무 높은 가치의 아이템을 풀 생각은 없어. 내 아이템의 희소성을 떨어뜨리지 않는 선이여야 한다. 또한, 플레이어들이 아이템만 날름하고 떠나지 못하도록 강제성을 함께 부여할 수 있다면… 가만, 이거 딱 세트 아이템인데?’
예를 들어서 <양산형 그리드 세트> 말이다.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2~3개 클리어할 때마다 특별보상으로 양산형 그리드 세트 한 부위를 포상하는 거지.’
양산형 그리드 세트는 무기, 보조무기, 갑옷, 건틀릿, 투구, 부츠 총 여섯 부위로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두 부위 이상의 아이템을 동시에 착용할 때부터 준수한 세트 효과를 적용받게 된다.
플레이어들에게 그리드 세트를 보상으로 내놓는다면, 이는 플레이어들의 수집욕구를 강하게 자극할 것이 자명한 사실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여섯 부위 세트 아이템을 전부 다 모으기 전까지 템빨국을 떠나지 못할 테고…’
템빨국 입장에서는 그들의 수집욕구를 이용해서 온갖 퀘스트를 떠넘기고 국력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드 세트를 전부 수집할 때쯤이면 템빨국도 충분히 발전할 테지.’
발전한 템빨국은 플레이어들의 마음에 쏙 들 것이 분명하다. 한 번 이민 온 플레이어들이 굳이 다시 템빨국을 떠나려할 이유가 없을 만큼.
‘좋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그리드가 당장 라우엘에게 달려갔다.
그리드가 왕이고 라우엘이 신하이니만큼, 원래라면 그리드가 라우엘을 소환해야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리드는 안 그래도 바쁜 라우엘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
“묘안이로군요.”
보상이 <양산형 그리드 세트>인 연계 퀘스트를 생산해서 플레이어들을 유혹하고, 이들의 퀘스트 수행능력을 이용해서 빠른 국력 발전을 도모하자.
플레이어가 장기적인 목표를 갖게 될 경우 품는 열정과 집중력은 대단한 것이므로, 이를 이용할 수만 있다면 템빨국은 급격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발전한 템빨국은 이후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을 테고 말이죠…”
그리드의 계책을 설명 받은 라우엘이 그럴듯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것은 씁쓸한 미소였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수천, 수만 개씩 생산할 정도의 자원과 인력은 있고요?”
“……”
그리드는 아차 싶었다.
아이템 대량 생산에 필요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라 자원과 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는 점을 상기한 것이다.
“어… 으으음…”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한 그리드가 난처하단 표정을 지었다.
자신 혼자서는 대량의 아이템을 빠르게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할뿐더러, 템빨국에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주재료가 되는 <흑철>을 대량으로 공수할 정도의 자본력도 없었던 까닭이다.
“하, 내 생각이 또 짧았네.”
본인의 무지를 한탄한 그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라우엘이 인자한 미소를 그렸다.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라 발전을 위해서 궁리해준 전하의 노고는 찬사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요. 후훗.”
“말이라도 고맙다. 하지만 정작 아무런 도움도 안 됐잖아.”
“아니요, 가능성이 열린 겁니다. 전하의 계책이 실현 될 경우 템빨국 발전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제 역할은 전하의 계책이 실현되게끔 강구하는 것이고요.”
“어떻게 실현시켜?”
“혹시, 양산형 그리드 세트의 제작법을 다른 대장장이들에게 전수해주시는 게 가능합니까?”
“아.”
어째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여태까지 그리드는 대장장이 육성을 칸에게 전담시켰다. 현재 레이단에 주둔 중인 약 1,000명의 대장장이들은 모든 제작법을 칸에게 전수 받았고, 그리드는 가끔씩 그들의 기술 숙련도를 높여줬을 뿐이다.
그리드 본인이 대장장이에게 특정 제작법을 전수해준다는 발상은 하지 못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다.
충분히 생각해 본 그리드가 대답했다.
“고급 대장장이라면 양산형 그리드 세트 제작법을 습득할 수 있을 거다.”
“레이단에 고급 대장장이 숫자가 몇이나 되죠?”
“건국식 전에 10명이었으니까 지금쯤이면 15명 정도 되지 않았을까?”
레이단 대장장이들은 하나 같이 재능이 뛰어나다. 그리드가 일일이 <대영주의 검>으로 관찰해서 재능 있는 자들만을 선별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수 년 동안 장인급 대장장이 칸 밑에서 꾸준히 수련하였으므로 레이단 대장장이들의 성장속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라우엘의 안색이 밝아졌다.
“국고를 털도록 하죠. 현재 라인하르트에 존재하는 대장간 13개를 템빨국 명의로 매입한 뒤, 레이단으로부터 칸님과 고급 대장장이들을 소집하여 양산형 그리드 세트 생산에 돌입합시다. 아, 물론.”
전제가 붙는다.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력을 갖춘 후에 말이죠.”
“그게 언제쯤인데?”
“넉넉잡아 3~4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극검 후작에게 흑철 광산 개발을 서두르라고 지시한다면 반 년 정도 시기를 단축시킬 수도 있겠고요.”
“4년….”
4년이면 군대를 두 번 다녀오고도 남을 시간이다.
대체 그때가 언제 온단 말인가?
좌절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웃어주었다.
“국사를 돌봄에 있어서 초조해하시면 안 되죠. 천천히, 꾸준히 발전시켜나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4년 후면 고급 대장장이의 숫자도 몇 배는 많아질 테니까 양산형 그리드 세트 생산이 한층 더 수월해질 겁니다.”
“으음… 그래, 나랏일이 어디 개 밥 주는 일처럼 쉽고 간단한 것도 아니고 초조해하면 안 되는 거겠지.”
납득한 그리드가 마음을 추스르는 그때, 집무실로 달려온 병사가 보고했다.
“마이너가 귀환하였습니다.”
“마이너?”
지난 1년 동안 감감무소식이기에 잊고 있었다.
“난 또 도망친 줄 알았네.”
대체 지난 1년 동안 어디서 뭐하고 다닌 거지?
광부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기는 하였으나, <새로운 광물을 발견하고 위치를 탐색할 수 있다>라는 독보적인 특기를 보유한 마이너.
한때 그리드는 그에게 커다란 기대를 품었었다. <광물 탐지기>라는 유례없는 직책(?)을 맡은 마이너가 새로운 광물을 찾아내어 자신에게 큰 도움을 주리라 믿었다.
하지만 넓은 대륙에서 새로운 광물을 찾아내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여태껏 마이너는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 그리드는 그에게 기대감을 완전히 버렸다.
“그 자식, 설마 여자 손 잡고 오는 거 아니야?”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라우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자라뇨?”
“한창 이성에 관심 많을 나이잖아. 지난 1년 동안 내가 준 노잣돈으로 여자 꼬이고 다녔을지 누가 알아?”
“하하, 설마요.”
세상에 그런 미친 NPC가 있을까?
라우엘은 그리드가 괜한 걱정을 한다고 여겼다.
한데 웬걸.
“바이란이라는 개천이 낳은 용. 제2의 평민 신화를 써내려갈 희대의 천재 마이너가 지금 막 귀환하였습니다. 그리드 공작… 아니, 이제는 국왕전하라고 불러드려야겠지요? 훗, 오래간만에 저를 만나셔서 기쁘시겠군요?”
“….”
마이너는 진짜로 여자 손을 붙잡고 왔다.
야한 옷차림과 진한 화장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뒷골목 주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장난 하냐? 어린놈이 발랑 까져가지고.”
그리드가 도끼눈을 부라리자 뒤늦게 사태를 눈치 챈 마이너가 황급히 설명했다.
“아, 이 여인은 오늘 막 라인하르트에 도착하고 방문한 주점에서 알게 된 겁니다. 지난 1년 동안 이 여인과 놀아나느라 감감무소식이었다거나 그런 게 절대 아니라고요.”
짙은 화장의 여성이 그리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총각이 외상을 했거든요. 국왕전하께서 갚아주실 거라고 하기에 따라왔어요.”
“…..”
낭중지추는 개뿔.
부들부들.
그리드가 떨리는 손으로 여성에게 돈을 건넸다.
“이건 마이너 네 봉급에서 까는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드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솟구쳐있었다. 마이너에게 곤장을 내리리라 다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분노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진다.
“화는 삭이고 이것부터 보시죠. 희대의 천재인 제가 지난 1년 동안 누구보다 고생해서 찾아낸 새로운 광물입니다.”
커다란 자루를 꺼낸 마이너가 그것을 그리드의 앞에 풀어놓았고, 내용물을 확인한 그리드의 두 눈은 찢어져라 커졌다.
“이건…!!”
펼쳐진 자루 속에 가득 담긴 광물!
호화찬란한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것에 시선을 사로잡힌 그리드의 심장 고동소리가 두근! 두근! 빨라졌다.
<광룡의 숨결이 깃든 광물>
광룡 네바르탄의 둥지에 자생하는 광물입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네바르탄의 숨결을 쐰 영향으로 특수한 성질을 지녔습니다. 미쳐있는 광물이라고 해석함이 옳습니다.
무게:5
“미친 광물…?”
광물의 상세정보를 확인한 후 어리둥절해하는 그리드.
기고만장한 표정을 지은 마이너가 짤막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광물, 증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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