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39화 (434/1,794)

템빨 29권 - 8화

레이도른.

그는 제국의 기둥이었던 피아로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평가 받는 솔로 넘버나이트 중 하나다.

그것도 무려 여섯 번째 기사.

여덟, 아홉 번째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무력을 자랑한다.

단신으로 하나의 국가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실로 재앙급 존재라 할 수 있다.

그 거물 중의 거물이 지금 템빨국 건국식 현장에 와있었다.

‘그리드라…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겠군.’

레이도른의 성격은 꽤 신중한 편이다.

제국 황실이 그리드와 템빨국을 자연히 멸망할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는 이때, 레이도른만큼은 그리드를 경계하였다.

경계할 근거야 많았다.

그리드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드는 ‘전설의 후예’다운 기적을 숱하게 일으켜왔으니까.

‘레베카교와 힘을 합쳐서 대악마를 봉인하였다는 소문 또한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 이 소문은 그리드가 자신의 왕위를 정당화하고 백성들을 현혹하기 위해서 꾸며낸 거짓이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건국식이 시작되기 전.

라인하르트 곳곳을 살펴본 레이도른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라인하르트에 레베카 신전이 무려 세 개나 건설 중이라는 점이었다.

이는 레베카교가 템빨국에 절대적인 호의를 보낸다는 뜻이다. 레베카교 신전이 세 개 이상 건설 된 도시는 여태까지 제국의 수도밖에 없었다.

정말 대악마라도 봉인하지 않은 이상 레베카교가 신생 국가에 이토록 큰 호의를 보낼 리 없다. 그 소문이 진실일 가능성은 무척 높았다.

‘하위 서열 대악마의 무력이라는 것이 우리가 상정한 것보다 훨씬 미약했다는 반증.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드의 무력을 무시해선 안 되겠지.’

레이도른은 판단했다.

자신이 오늘 친히 예까지 행차한 이상, 반드시 그리드를 죽이고 템빨국을 멸해야한다고.

어쩌면 제국을 위협할 수도 있는 변수를 괜히 방치할 필요는 없었기에.

‘시작할까.’

판단한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신분을 속이기 위해서 레드 아머도 무장하지 못한 상태라고는 하나 딱히 두렵지는 않다. 방어구? 없어도 그만이다. 자신은 검 한 자루만으로 적들을 모조리 베어버릴 수 있는 실력자이고 적들은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죽어나갈 예정이다.

뚜벅뚜벅.

인파 속에 숨어있던 레이도른이 한 걸음, 두 걸음 단상으로 다가가는 그때였다.

“피아로 앞으로.”

‘피아로라고!!’

개국공신들을 호명하는 그리드의 목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란 레이도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전 적기사단 단장이자 제국의 기둥이라고 칭송 받았던 검호, 피아로.

이제는 제국을 배신하고 떠난 그의 이름을 설마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배신자 놈…! 이런 변방에서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건가…!’

꿀꺽!

피아로 이상의 재능을 지닌 인물들만을 선별하여 육성한 것이 현재 적기사단의 1~7번 기사다.

그래, 레이도른은 피아로보다 우위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피아로가 과거에 쌓아올렸던 위명이 워낙 대단한 바.

레이도른은 본능적으로 위축되어서 더 이상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단신으로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을 궤멸시키리라 자부하였던 그가 피아로의 이름 석 자에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아니?’

다시금 인파 속에 숨어든 채 단상 위를 주시하던 레이도른이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렸다.

피아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단상 위에 오른 템빨국의 개국공신.

소문으로 들어온 검호 피아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영락없는 농부의 행색이었다.

‘동명이인이었나…!’

빌어먹을, 괜히 쫄았다.

맥이 빠져서 한숨 쉰 레이도른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마법이 귀속 된 농기구로 무너진 땅을 순식간에 수복해 보이는 농부를 무시하고 단상 위 그리드를 노려봤다.

‘내 오늘 너와 너의 나라를 멸하고 제국의 영원한 안녕을 불러오겠다.’

꾸욱!

피아로라는 이름을 듣고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킨 레이도른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거성마저 양단하는 발도술 <태양 가르기>의 전조였다.

제국이 멸망시킨 소국의 왕가에 대대로 전해져왔던, 서대륙 역사상 최강의 발도술.

그것을 레이도른은 6번 기사의 자격을 얻은 이후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키링-!

칼집에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태양처럼 찬란한 오라가 폭사하는 순간.

“템빨국을 섬겨라.”

“…!!”

단상 위 그리드가 사절단 대표들에게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였다.

레이도른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발도술을 도중에 멈춰버렸고 사절단 대표들은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망발을…!!”

템빨국.

오늘 막 생긴 나라가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을 지닌 15개 왕국에게 속국이 되라고 요구하다니?

레이도른과 사절단 대표들은 물론이고 방송을 시청 중인 수억 명의 인구 모두가 상상치 못했던, 실로 황당한 미친 소리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내지 못하는 사절단 대표들에게 그리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라의 성장을 방해할 정도로 과한 공물을 요구하는 제국보다야 템빨국을 섬기는 편이 너희들에게도 좋을 거다. 나는 황제만큼 비양심적이진 않거든.”

사절단 대표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노하였다.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근본도 없는 나라.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소국의 왕이 자꾸만 오만방자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었으니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가는 앞서 다른 대표들처럼 목숨을 잃을 터였다.

간신히 화를 삭이고 냉정을 되찾은 가이 남작이 입을 열었다.

“우리 15개 왕국이 사하란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이유는 제국이 강대한 힘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 15개 왕국을 언제라도 멸망시킬 수 있는 압도적인 무력 말입니다. 반면 템빨국은 어떻습니까? 뛰어난 저력을 지녔음은 인정하는 바이나 홀로 우리 15개 왕국을 압도하고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가이 남작은 그리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실력 이상으로 자만하는 경향이 있는 그리드라면 필시 그렇노라고 대답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상종할 가치도 없는 인간이었다.’

평가하고 실망하며, 그리드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가이 남작이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니지.”

“…?”

그리드가 예상과 다른 대답을 꺼내자 가이 남작이 멈칫했다.

그리드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 템빨국은 아직 미약하다. 제국과 비할 바가 못 되고 너희들의 나라를 홀로 압도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순간의 이야기일 뿐. 봐라.”

스윽.

그리드가 눈짓하자 노에가 다가왔다.

“냥.”

최근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운동량이 부족한 것일까, 아니면 성장하는 과정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변화일까.

살집이 살짝 더 올라 포동포동해진 노에는 귀여움이 한층 더 배가되어 있었다.

통통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ㅅ’자 모양의 입 끝을 활짝 올리는 모습을 보면 깨물어주고 싶을 지경이다.

“험험.”

체통을 지키고자 노에의 귀여움을 애써 외면한 그리드가 노에로부터 무구를 전달 받았다.

<벨리알의 칼집>

내구력:916/916 공격력:350

*발검 속도 50퍼센트 상승.

*착검 속도 60퍼센트 상승.

*발검 공격력 150퍼센트 추가.

*발검 시 고정 데미지 4,000을 주는 <매직 미사일(강화)> 발동.

*<매직 미사일(강화)>에 적중당한 대상은 초당 1,500의 화염 데미지를 최대 20초 동안 입고 마기에 지배당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이 20퍼센트씩 감소합니다. 단, 대상이 암흑 속성일 경우 공격력과 방어력이 20퍼센트씩 추가됩니다.

신화적 경지에 오르고 있는 대장장이 그리드가 대악마 벨리알의 뼈를 마법으로 단련하여 제작한 칼집입니다.

대마법사 브라함의 강화마법과 대악마 벨리알의 뼈에 깃든 화염, 암흑 기운이 함께 융합 된 이 칼집은 기본 내구력과 공격력도 무척 우수하여 무기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발검술에 최적화 된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300여 명의 은기사 길드원을 이끌고 템빨단에 합류해 준 극검.

그는 늘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해서 분투해왔고 코크로 섬 전투에서는 에트날 해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는 등의 대활약을 펼쳤다.

이 칼집은 개국공신 목록에 포함 된 그를 위해서 그리드가 제작한 것으로 <극검꺼>의 완벽한 상위 호환이라고 보면 좋았다.

키링-!

<+7검은 귀신>을 뽑은 그리드가 이것을 벨리알의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발검의 자세를 취했다.

발검술 관련 스킬을 보유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깡스탯과 템빨이 워낙 뛰어난 바.

그리드는 이를 활용함으로써 사절단 대표들에게 자신의 무력과 마법 무구의 위력을 증명하고, 이를 토대로 그들에게 신뢰를 얻고 싶었다.

“너희들이 템빨국을 섬긴다면 나는 너희들에게 이와 같은 보구들을 하사하고 제국에 대항할 힘을 함께 갖춰나갈 것이다. 초(超).”

쿠오오!!

대기가 격동한다.

그리드가 발검술을 더욱 화려하게 선보이기 위해서 기본 공격을 강화시키고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대장장이의 분노, 흑화.”

쿠와아아아앙!!

버프를 사용한 후 <다크버스의 귀걸이>를 착용, 상승한 악마력을 기반으로 더욱 강력해진 흑화까지 발동한 그리드.

심지어 크라우젤과 파티까지 맺음으로써 검술 스킬의 위력까지 상승시킨 그가 발검술로 하늘을 갈라 보이려는 순간이었다.

“놈…! 이미 나의 존재를 간파하고 나를 도발하는 것인가!!”

“??????”

인파 속에서부터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그리드에게 노발대발하였다.

“그 누구도 아니고 이 레이도른 님의 앞에서 발검과 발도를 논하다니! 보자보자 하니까 네놈의 오만함이 정녕 하늘을 찌르는구나!!”

‘레이도른?’

…누구야?

그리드는 물론이고 템빨단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길길이 날뛰는 NPC를 미친놈 보듯이 하였다.

반면 사절단 대표 중 가이 남작은 귀신을 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 솔로 넘버 나이트…! 어째선지 레드 아머를 무장하지 않고 있다고는 하나 필시 솔로 넘버 나이트가 맞다!!’

레이도른.

사하란 제국 최강의 발도사.

가이 남작은 그를 무척 잘 알고 있다.

왜?

약 5년 전, 제국의 속국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비밀리에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폴드 왕국에 레이도른이 직접 방문한 바 있으니까.

당시 레이도른이 보여준 신위는 가공할만한 것이었다. 가이 남작은 당시를 회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리고 오금이 지렸다.

‘그가 검을 한 번 뽑을 때마다 수십 기사와 수백 병사가 나가떨어졌었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폴드 왕국이 자랑했던 정예 기사와 병사들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자각도 없이 온몸이 토막 나서 죽어버렸었다.

레이도른의 발검술은 마치 섬광 같았다.

‘저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즉…’

지금 이 순간 템빨국이 멸망한다는 뜻이 된다.

가이 남작이 겁에 질렸다.

‘내가 템빨국과 화친을 요구한 것을 저자 또한 보았겠구나!’

망했다. 폴드 왕국에까지 불똥이 튀게 생겼다.

‘끝장이야!’

후환을 두려워하며 덜덜, 몸을 떠는 가이 남작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국을 위한답시고 국왕전하의 뜻을 어겼다가 도리어 조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으니 죄책감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도대체 뭐하는 자식이지?”

단상 위 그리드가 불쾌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긴장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를 보고 치를 떤 레이도른이 허리를 앞으로 기울이며 발도의 자세를 취했다.

“내가 누군지 뻔히 알고서 도발한 주제에 이제와 모르는 척 하는 의도가 뭐지? 나를 더욱 분노시키고 동요하게끔 유도하는 것인가? 흥! 같잖다!”

스파앗-!!

일갈한 레이도른의 허리춤에서 태양처럼 찬란한 오라가 폭사했다.

서대륙 최강의 발도술 <태양 가르기>의 전개였다.

“씁…!”

피할 수 없다.

찰나지간에 판단한 그리드가 긴장하는 순간, 이미 갓 핸드들과 노에, 랜디가 날아와 그를 비호하고 있었다.

“캬앙!”

“꺄악!”

노에와 랜디는 태양 가르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무슨 스킬을 써보기도 전에 이미 섬광이 둘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 갓 핸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개국공신에게 하사할 예정인 각종 마법 무구를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 무구에 귀속 된 스킬들을 활용하기도 전에 이미 섬광이 그들의 사이를 파고들어가 그리드에게까지 도달했다.

“큭!!”

서걱-!!

이를 악 무는 그리드의 가슴으로부터 선혈이 솟구침과 동시에,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그리드의 발검 또한 완성 됐다.

<벨리알의 칼집>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7검은 귀신>이 흉포한 마수처럼 포효했다.

“뭣이…!!”

불꽃과 마기, 거기에 백색의 섬광까지 깃들어서 강력한 기파를 발생시키는 칠흑의 검기가 날아오는 모습을 목도한 레이도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위력이 어째 태양 가르기보다 훨씬 더 강력해보였던 까닭이다.

“말도 안 되는…!!”

황급히 레드 아머를 꺼내보지만 늦다.

쿠콰콰콰콰콰콰쾅!!

검기와 충돌한 레이도른이 폭발에 휩쓸렸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여 피를 토하는 그에게 달려간 템빨단원들이 다구리를 놓았다.

“윽! 컥! 억! 엑!!”

“와, 얘 겁나 안 죽네. 갑옷도 안 입은 주제에 더럽게 단단하다.”

“단순한 네임드 NPC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감옥에다가 갖다 가두자.”

“…..”

솔로 넘버 나이트.

그것도 여섯 번째 기사가 순식간에 제압당하다니?

털썩!

가이 남작이 그리드 앞에 무릎 꿇었다.

“우리 폴드 왕국은 기필코 템빨국을 섬겨야할 것이옵니다!! 저 가이가 목숨과 명예를 걸고 반드시 국왕전하를 설득해보이겠나이다!!”

“어? 그, 그래…”

내가 그렇게 대단했나?

설마 이렇게 바로 템빨국을 섬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나타날 줄이야, 예상치 못했던 그리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사절단 대표들은 가이 남작이 노망이 들었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소란과 사건의 연속 속에 건국식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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