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7화
“……..”
이제 10명밖에 남지 않은 사절단 대표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템빨국의 무력을 목도한 그들은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일개 병사가 기사보다 강하다니…’
‘병사가 저 정도인 것을 보면 검은 갑주를 무장한 저 1천 기사들의 실력은 상상을 초월하겠군.’
‘웅변가가 비룡을 거느렸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실로 강력한 저력을 지닌 나라다.’
템빨국의 병사와 웅변가가 보여준 솜씨는 온갖 개념을 파괴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크음….”
사절단 대표들이 깊은 고민에 빠졌다.
템빨국을 적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도리어 손을 잡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현재 대륙의 세력 판도는 1강 15약 구도를 이루고 있다.
1강이란 당연히 사하란 제국이다.
사하란 제국이 젊고 용맹한 사자라면, 나머지 15개 왕국은 팔다리가 구속 된 토끼였다. 15개 왕국은 언제 잡아먹힐지 몰라 노심초사하며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신세였다.
한데 그 공물의 양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했다. 15개 왕국은 제국에 공물을 바치느라 돈이 없어서 발전 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때 템빨국의 출현은 천운일 수도 있었다.
‘템빨국의 소수정예 무력과 우리 15개국의 300만 병력이 결합한다면…’
‘우리 모두 자위권을 갖추고 제국의 속국으로부터 탈피할 수도 있다.’
‘시기도 아주 좋아. 현재 제국은 이민족 말살 정책이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외부로 시선을 돌리기 어려운 입장이니까.’
사절단 대표들이 그리드를 바라보는 시선이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멸시와 적대감이 사라지고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리드 국왕전하!”
누군가가 용기내서 소리쳤다.
폴드 왕국의 가이 남작이었다.
“조금 전 저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북북!!
놀라운 광경이 연출됐다.
그리드에게 고개를 조아린 가이 남작이 품에서 칙서를 꺼낸 후 그것을 찢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섬기는 왕의 뜻이 담겨있는 칙서를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찢어버리다니!
가이 남작이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멸문지화까지 각오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리드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서 지껄였던 개소리를 철회한다는 뜻인가?”
“그렇사옵니다! 그리드 국왕전하, 감히 제가 확신하건데 우리 폴드 왕국은 템빨국을 영원한 동반자로 삼아야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왕께 템빨국과 맹우가 되어야하는 이유 100가지를 설명드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저의 왕께서 제 설명에 납득하시고 템빨국과 화친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만큼 템빨국은 훌륭한 나라이옵니다!!”
“…..”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와 템빨국을 인정할 수 없다며 공물이나 바치라고 요구하던 인간 중 하나다. 한데 금세 태도를 바꾼 것이다. 왕의 뜻을 어겨가면서까지 말이다.
사절단의 도중 입장 변경!
이 유례없는 대사건은 템빨국의 명성을 대륙 전역에 널리 퍼뜨려줄만한 가치를 지녔다.
그리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주 좋아. 기대 이상이야.’
15개국 중 몇 개국하고만 동맹을 맺어도 템빨국의 성장 기반은 탄탄해진다. 제국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해야할 힘을 축적해야하는 와중에 잡졸들 상대하느라 진땀 뺄 필요가 사라진다.
찬란한 미래를 떠올리며 들뜬 그리드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대답은 보류하시고 개국공신들에게 논공행상부터 하십시오.
라우엘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여태껏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며 모든 일을 그리드에게 맡겼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자 그리드는 좌시할 수 없었다.
‘속뜻은 알 수 없지만…’
라우엘은 그리드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다. 큰 의문을 품지 않고 라우엘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리드의 반응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가이 남작을 무시하고 개국공신들에게 논공행상을 시작했다.
“….무례한.”
병풍이 되어버린 가이 남작이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자신은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걸 버린다는 심정으로 칙서까지 찢어보였건만, 그리드가 이를 보고 감명하기는커녕 지나가는 똥개처럼 무시하였으니 분노가 충천했다.
부들부들!
치를 떠는 가이 남작과 단상 위의 그리드를 번갈아 쳐다보는 사절단 대표들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그리드 저자는 결코 큰 그릇이 못되는군.’
‘가이 남작이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찬란한 미래를 제시하였건만, 앞서 우리의 무례를 여전히 염두에 두고 언짢아하는 것인가.’
‘저토록 속이 좁은 자가 어찌 나라를 다스릴꼬.’
‘역시 이런 야만적인 국가와 수교를 맺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쯧쯧쯧.
사절단 대표들이 그리드를 한심하다 생각하며 연신 혀를 차는 그때.
“라우엘 공작은 앞으로.”
그리드가 개국공신들을 차례대로 호명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단상 위로 오른 라우엘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게 그리드가 한 쌍의 건틀릿을 건네주었다.
도대체 무슨 금속을 재료로 사용한 걸까?
마치 흑수정처럼 반들거리고 반짝이는 표면을 지녔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느낌의, 신비로운 묵색 건틀릿이었다. 누구의 시선이라도 단박에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넘쳤다.
‘하지만 그래봤자 고작 건틀릿. 명색이 공작위까지 수여한 1등 개국공신에게 하사한다는 포상의 수준이 저따위라니…’
‘템빨국이 소수정예의 무력을 거느렸다고는 하나 가난하다는 증거. 스테임 후작의 세력을 흡수하여 안정적인 기반을 갖췄다고는 하나 그것도 다 우리가 도와줬을 때의 이야기지.’
‘만약 템빨국이 우리와 손을 잡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멸 뿐.’
건틀릿은 손과 팔뚝을 보호하는 용도의 물품에 불과하다.
적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명검,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명갑이라면 또 모를까 고작 건틀릿을 개국공신에게 하사하다니.
그리드의 포상은 참으로 하찮은 것이다… 라고 사절단 대표들이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큭큭…! 크크큭!! 벨리알의 건틀릿이라… 이것은 저의 기대와 바람을 아득히 초월해버리는 물건이로군요. 벨리알의 뜨겁고도 서늘한 피부가 나의 두 팔에 각인되어 날뛰고 있던 흑염룡의 기운을 봉인하는데 성공해버렸습니다. 훗, 후후훗!”
라우엘.
그 명성이 15개 왕국에게까지 조금은 전파 된 템빨국의 공작이 자신의 얼굴 절반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헛소리를 지껄였다. 그가 당최 뭐라고 떠들어대는 것인지 사절단 대표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라우엘과 벌써 몇 년째 함께하고 있는 템빨단원들조차 그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힐끗.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사절단 대표들에게 라우엘이 시선을 돌렸다. 눈병이라도 걸렸는지 한쪽 눈은 검은 안대로 가린 상태다.
“약소국의 우민들이여, 그리드 국왕전하께서 하사해주신 이 위대한 보구의 위력을 잘 보아라.”
슬쩍.
그래, 슬쩍.
라우엘은 손을 그저 슬쩍 한 번 휘둘렀을 뿐이다.
한데 파장은 컸다.
키잉-!
라우엘이 착용하고 있는 건틀릿의 다섯 손가락 끝으로 일제히 다섯 개의 백색 구체가 생성됐다.
뜨거운 화염과 서늘한 마기를 내포한 구체였다.
쿠콰콰콰콰콰콰쾅!!
“……”
라우엘이 손을 휘저은 방향.
사절단 대표들이 서있는 방향으로 다섯 개의 구체가 날아가 폭발한다.
갑자기 발생한 영문 모를 사태에 사절단 대표들은 놀랄 틈도 없었다.
붕어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주둥이만 뻐끔거릴 뿐이었다.
돌아가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피식, 조소해준 라우엘이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또 한 번 건틀릿으로부터 다섯 개의 백색 구체가 생성되더니 사절단 대표들의 발치까지 날아와 폭발했다.
활활활활!!
폭발 지점을 불타게 만드는 화염과 대기를 오염시키는 마기.
넋 나가 있던 사절단 대표들이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사색이 되었다.
“허, 허억…!”
“이럴 수가! 시동어도 없이 단지 손만 휘둘렀을 뿐인데 이토록 강력한 마법이 발현되다니!!”
“서, 설마, 저 건틀릿의 힘인가…?”
아티펙트라고?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파그마의 후예 그리드.
비록 전설의 대장장이라고는 하지만 아티펙트를 제작할 역량은 없을 것이다. 아티펙트 제작은 대마법사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가능한 영역이었으니까.
“피아로 후작은 앞으로.”
사절단 대표들이 건틀릿의 위력을 부정하고자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이번에는 단상 위로 한 명의 중년인이 올라섰다.
“…??”
사절단 대표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중년인, 필시 농부의 행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와 흙으로 범벅이 된 낡은 천 옷과 허리춤에 착용하고 있는 각종 농기구가 중년인이 농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쳤나?’
후작이 농부라니?
아니, 농부가 후작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귀족의 망신이다. 고귀한 귀족이 밭일을 한다고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니, 다 떠나서.’
지금은 건국식 행사 중이다. 격식을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피아로라는 이름의 저 중년인이 설령 진짜 농부일지언정 건국식에서만큼은 격식에 맞는 옷차림을 하는 것이 예절이었다. 한데 흙투성이 천옷 하나 달랑 걸쳤을 뿐이라니!
‘기본예절조차 모르는 야만인…’
‘왕에게 근본이 없으니 신하 또한 근본이 없는 겐가.’
쯧쯧.
사절단 대표들이 또 다시 혀를 차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상 위 피아로는 그리드에게 낫과 호미를 전달 받고 있었다.
“사실 오늘만큼은 예복을 입고 싶었습니다.”
경건한 표정으로 농기구를 받들며 속삭이는 피아로. 그는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드가 작업복 차림 그대로 참석하라 해서 따르기는 하였지만, 역시 영 찝찝했던 것이다.
미소 지은 그리드가 그의 단단하고 든든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대의 예복은 농부의 작업복이다. 다음부터는 밀짚모자도 쓰고 다니도록.”
피아로에 대한 그리드의 호감은 이제 무한에 가까웠다.
템빨국의 절대무력이며 대악마를 해치우고 획득한 전리품까지 망설임 없이 그리드에게 바칠 줄 아는 충신.
그리드는 피아로를 인정해주고 싶었고, 그를 온전한 농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는 피아로를 감격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신 피아로! 더욱 더 정진하여 밭을 갈겠나이다! 우리 템빨국 국민 모두가 늘 배불리 먹을 수 있게끔 식량고를 꽉꽉 채워두겠나이다!!”
“…..농부다.”
“진짜 농부야!!”
그래도 반신반의하고 있던 사절단 대표들이 피아로의 외침을 듣고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후작이 농부일 리가 있겠냐는 마음 속 믿음이 산산이 조각나버렸으니 충격이 컸다.
또 한 번 넋이 나간 사절단 대표들.
단상에서 내려온 피아로가 그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움찔!
피아로는 바위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구릿빛 근육의 소유자였다.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옷에 묻은 겨를 흩날리며 다가오자 사절단 대표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피아로의 손에 들린 묵색의 낫과 호미가 번들번들, 날카로운 예기를 발휘하자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사절단 대표들이 뒷걸음쳤다.
“히, 히익…!”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피아로!
그가 낫과 호미를 치켜세우자 살해위협을 느낀 사절단 대표들이 겁을 지려먹었다.
동시였다.
털썩!
피아로가 갑자기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앞서 라우엘의 마법 폭격에 넝마가 된 지면을 호미로 갈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폭발과 화염, 그리고 마기에 오염되어 황폐하게 변했던 지면에 벼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허, 허억…?”
눈 깜짝할 사이에 벼를 재배하다니?
세상에 뭐 이런 농부가 있단 말인가?
‘아니, 역시 그런 농부가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것도 역시 아티펙트의 힘이 아닐까?’
‘그리드가 하사한 낫과 호미가 대지를 수복하고 식물을 자라게 만드는 회복계 마법을 발휘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드…! 저자의 대장장이 실력은 파그마조차도 아득히 넘어선 것인가!!’
감탄, 경악, 감탄, 경악!
단 몇 분 사이에 표정을 수백 번도 더 변화시키고 있는 사절단 대표들을 확인한 라우엘이 그리드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드디어 폴드 왕국의 가이 남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질문했다.
“우리 템빨국과 손을 잡고 싶다 하였는가?”
“예…! 옛! 그렇사옵니다!!”
넋이 나가있던 가이 남작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그는 템빨국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거라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만큼 템빨국에 콩깍지가 씐 것이다.
그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묻겠다. 우리 템빨국과 손을 잡겠다고?”
“…..?”
어째 반응이 불안하다.
동맹을 거절하려는 건가 싶다.
당황한 가이 남작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리드 국왕전하! 부디 앞서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냉정히 잘 생각해주십시오! 현재 대륙은 사하란 제국이 지배하고 있사옵니다! 그리드 국왕전하와 템빨국이 아무리 훌륭할지언정 혼자만의 힘으로는 제국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부디 우리 폴드 왕국과 동맹을 맺어주시옵소서!”
“함께하는 편이 좋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동맹이 아니지.”
“…예?”
함께하는데 동맹은 아니라니?
어리둥절해하는 폴드 남작을 바라보면서, 그리드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개국공신들에게 하사하기 위해서 제작한 마법 무구들을 모조리 꺼내 갓 핸드와 노에, 랜디에게 쥐어주었다.
이는 단순한 과시다.
씨익!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은 그리드가 가이 남작을 비롯한 사절단 대표 모두에게 소리쳤다.
“템빨국을 섬겨라.”
“….!!”
아니, 고작 건국식 행사 하나로 세상을 몇 번이나 놀라게 만드는 거지?
덕분에 높은 시청률을 보장 받게 된 각국 방송사 임직원 일동이 그리드에게 감사와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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