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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37화 (432/1,794)

템빨 29권 - 6화

비죽비죽.

그리드의 입꼬리가 연신 씰룩거린다. 웃음을 참으려고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아스모펠을 골랐군.’

현재 라인하르트에 주둔 중인 템빨국 병사는 숫자가 1천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 전원 2차 전직을 완료하고 양산형 그리드 세트를 도배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겉모습만 봐서는 기사라고 착각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반면 아스모펠은?

누가 봐도 말단 병사의 행색이었다. 라인하르트에서 가장 약해보였다.

비즈 남작이 대전 상대로 아스모펠을 지목한 것은 쉽게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라우엘의 책략인가?’

사절단을 해치워도 후환이 남지 않게끔 상황을 유도하고 비즈 남작이 아스모펠을 지목하게 만든 그리드의 계책은 상당히 훌륭했다. 그리드 혼자서 세우고 실행한 계획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고, 때문에 템빨단원들은 이번 사건의 배후에도 라우엘이 있으리라 보았다.

하지만 진실은?

현재 12개국의 사절단을 상대 중인 사람은 그리드 혼자였다. 모든 상황을 그리드 혼자서 만들고 이끌었다.

라우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질 않았다.

‘그리드 님, 당신의 성장이 또 한 번 저의 하트에 불을 지피는군요. 아이큐의 한계를 초월하시다니 정녕 훌륭하십니다. 후후훗…’

흐뭇함을 느낀 라우엘이 감격에 휩싸이는 그때.

“정말이요? 내가 이 병사와 싸워서 이기면 정녕 나를 살려주실 거요?”

단상 아래 비즈 남작이 그리드에게 재차 묻고 있었다.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지킨다. 다만, 전투 중에 네가 죽더라도 바이올렛 왕국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마라.”

“좋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비즈 남작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바이올렛 왕국의 사절단 대표가 아니라 비즈 남작 개인이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템빨국은 바이올렛 왕국의 사절단을 해친 게 아니야! 알아들었나!!”

당장 사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판국에 목숨을 건질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놓칠 리 만무하다.

비즈 남작은 열정적이었고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말단 병사 따위 단칼에 해치워주마!’

촤륵!

검을 뽑아 쥐는 비즈 남작의 미늘 갑옷이 물결쳤다. 검도, 갑옷도 상당한 수준의 물건이었다.

『비즈 남작의 무장 상태로 보아 레벨이 최소 250은 되겠네요. 거기에 ‘검술을 습득한 귀족’이라는 타이틀까지 가졌으니 고급 검술을 구사할 가능성이 높고… 사실상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하겠군요.』

『그럼 비즈 남작과 싸우게 된 말단 병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 죽겠죠. 불 보듯 뻔한 일을 여쭤보시는군요.』

『……』

어리석은 그리드!

사절단을 해치울 기회를 잡으려다가 목적도 못 이루고 죄 없는 병사만 희생하게 생겼구나!

이번만큼은 그리드의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든 언론사와 시청자들이 그리드가 엄연한 실책을 한 거라고 보았다.

그렇다.

세계가 또 한번 뒤집어지려하고 있었다. 늘 예상과 다른, 혹은 예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발생시키는 상식 파괴자 그리드에 의해서 말이다.

“나의 왕을 업신여기고 얕잡아 본 네놈에게 죽음이라는 징벌을 내리겠다.”

깊이 눌러 쓴 투구 사이로 살기 흉흉한 눈빛을 보내는 말단 병사.

녀석이 꺼내 쥐는 낡은 단창을 확인한 비즈 남작이 끌끌 웃었다.

“큭큭, 하찮은 병졸 따위가 주둥이 한번 잘 놀리는구나.”

비즈 남작은 장담했다.

자신의 검술 솜씨와 보검의 위력을 결합시킨다면, 눈앞의 병졸 따위 창과 갑옷 통째로 일격에 베어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

그만큼 두 사람의 아이템 차이와 실력 차이는 명확해보였다.

“하아압!!”

기합을 내지른 비즈 남작이 앞으로 돌진했다. 대상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버리는 고위급 대시기였다. 비즈 남작의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비전 같았다.

-끝났네.

시청자들이 병사를 애도했다.

단창의 긴 리치를 활용할 틈도 없이 비즈 남작에게 거리를 내준 병사가 단칼에 죽을 거라고 보았다.

무의미한 예측이었다.

푸욱!

“…!!!”

-헐?

거리를 좁힌 비즈 남작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자세로 선보인 종베기.

필시 전광석화 같은 일격이었으나 병사의 단창이 훨씬 더 빨랐다.

비즈 남작의 검이 병사의 투구에 닿기도 전에 아래서부터 위로 솟구친 병사의 단창이 비즈 남작의 가슴을 베어버렸다.

“커윽…!”

피를 토한 비즈 남작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검도 아닌 창을 쥔 병사의 공격 속도가 자신보다 월등히 빠른 것은 어째서이며, 병사의 낡은 단창 따위가 미늘 갑옷을 일격에 찢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사기…!”

사기다! 이건 뭔가 잘못 됐다! 필시 내가 무슨 속임수에 당했다!

비즈 남작은 그 생각을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주둥이를 놀릴 새도 없이 병사의 단창이 휘몰아치며 자신의 가슴을 연달아 찔러온 까닭이었다.

“컥…! 윽! 크아아아악!!”

비명만 지르기 바쁘다.

심지어 방어 동작을 취할 틈도 없이 단창의 폭격을 얻어맞는 비즈 남작.

“……”

“……”

사절단 대표들은 물론이고 자리에 모여 있는 모든 플레이어와 백성들, 그리고 방송을 시청 중인 시청자들까지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상황을 중계해야할 의무를 가진 각국 방송사 캐스터만이 간신히 입을 열 뿐이다.

『일개 병사가 검술을 습득한 귀족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아이템 차이마저도 무색하게 만드는 실력 차이입니다! 이게 대체 뭔가요! 템빨국은 일개 병사마저도 저토록 강한 겁니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하자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누구보다 충격 받은 사람은 당연히 비즈 남작이었다.

‘이, 이놈은 대체 뭐지?’

어느 모로 보나 말단 병사였다.

한데 이 실력은 뭐란 말인가? 우리 바이올렛 왕국이 자랑하는 붉은 매 기사단조차도 이 정도로 창을 잘 다루진 못할 것이다.

푹! 푸푹!!

“힉! 히익!!”

혼란에 빠진 비즈 남작이지만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검을 연마해온 인물이다. 정신은 출타했어도 육체만큼은 검술을 기억하고 병사의 창술에 저항했다.

하지만 부질없다는 것이 절망적인 사실이다.

병사가 창을 10번 찌르면 비즈 남작은 10번을 고스란히 창에 찔렸다. 아무리 발악적으로 저항해봤자 방어와 회피 모조리 실패해버렸다.

“너는…! 너는 대체 뭐냐!! 너 같은 실력자가 일개 병사일 리 없다!! 한데 왜 병사처럼 행세하고 있던 것이냐!!”

한 마디 뱉을 때마다 검붉은 피도 함께 토해내는 비즈 남작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웠다.

병사를 동정하던 시청자들이 이제는 비즈 남작을 동정할 정도였다.

-이제 보니까 비즈 남작 함정에 빠진 것 같음. 일개 병사가 귀족을 이길 리 없잖아.

-맞아. 저거 병사 아닌 듯. 기사가 병사로 변장하고 있었나보네.ㄷㄷ

-그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리드가 사태가 여기까지 올 걸 미리 예상하고 기사를 미리 병사로 변장시켜놨다는 말이 되는데 그럼 그리드가 제갈량이란 뜻?

-어…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시청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비즈 남작을 처절하게 박살내고 있는 병사. 그가 일개 병사가 아니라고 해석하면 그리드가 너무 대단한 지략가가 되어버렸고, 그를 일개 병사라고 해석하면 템빨국은 병사조차도 기사만큼 강한 정점 무력의 국가가 되어버렸다.

뭘 어떻게 해석해도 그리드와 템빨국은 대단하다고 귀결되는 것이다.

-이게 뭐야 무서워.

-ㄷㄷㄷ 진심 미쳤다.

-그리드랑 템빨국은 그냥 지존임…

무슨 사건이 한 번만 터졌다하면 평가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버리는 그리드!

‘이쯤하면 그리드 전하의 명예가 회복되고 명성이 더욱 높아졌을 터.’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낀 아스모펠이 일방적인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태껏 비즈 남작을 죽기 직전까지만 몰아넣던 그가 치명타를 날린 것이다.

푸욱-!!

[바이올렛 왕국의 사절단 대표 비즈 남작이 사망하였습니다.]

[비즈 남작 개인이 맺은 약정 탓에 바이올렛 왕국은 템빨국에게 아무런 책임도 전가할 수 없습니다.]

“이 무슨…!!”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잿빛으로 산화해버리는 비즈 남작을 목도한 사절단 대표들이 잔뜩 겁에 질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결국 자신들에게 나쁘게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아크 왕국의 브리튼 남작이 소리쳤다.

“그리드…! 어찌 이리 악랄한 인물이란 말인가!! 기사를 병사로 변장시켜서 비즈 남작을 함정에 빠뜨리다니!!”

“너.”

단상 위의 그리드가 이번에는 브리튼 남작을 지목했다.

“너도 골라.”

“…?”

“일국의 왕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고 면전에서 욕한 책임을 물어야지. 비즈 남작처럼 말이다.”

“……!”

아무 말도 안 했으면 중간이라도 갔을 텐데!

비즈 남작과 똑같은 신세로 전락해버린 브리튼 남작이 아차 싶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이미 자신에게 거부권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최대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자 노력하며 주변을 살폈다. 앞서 비즈 남작이 그랬듯이 가장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찾았다.

“나는 저자와 싸우겠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약해보이는 사람.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건 바로 웅변가.

그리드의 뜻을 커다란 목소리로 대신 전파하였던 인물 말이다.

“호오… 일개 병사에 이어서 이번엔 웅변가인가.”

그리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백성들은 브리튼 남작을 비난했다.

“치사한 자식! 평생 칼 한 번 쥐어본 적 없을 웅변가를 상대로 지목하다니!”

“아크 왕국의 귀족들은 죄다 너처럼 그렇게 치졸하냐!!”

“주둥이로 먹고 사는 사람한테 싸우자고 드는 인성 봐라!!”

우우!

우우우우우!!

비난과 야유가 계속됐지만 브리튼 남작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목숨이 걸린 마당에 명예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변방의 야만적인 국가에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지!’

내게는 숭고한 신념이 있다. 나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다.

마음을 다잡은 브리튼 남작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메이스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웅변가 후로이는 비룡을 소환했다.

“….??”

“??????”

크롸라라라라라라!!

기성과 함께 등장한 붉은 비룡이 화염이 깃든 숨을 토해내자 브리튼 남작과 백성들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웅변가가 비룡을 소환하다니? 그것도 최강의 비룡이라는 화염 비룡을!

“자, 잠깐… 이건 사기다!”

“사기는 너희 부모님이 당한 거겠지!”

“뭐?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끄아아아아아악!!”

초면인 사람의 부모님을 함부로 언급하다니? 그것도 사기나 당한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다니?

사색이 되어 있다가 당황하고, 이내 분노하는 브리튼 남작이었지만 그는 무력했다. 후로이의 비룡이 토해낸 화염에 통구이가 되어서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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