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9권 - 4화
“우와아아아아아아!!”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갓리드! 갓리드!! 갓리드!!”
플레이어 최초의 왕이 탄생하였다는 문구가 떠오른 순간, 라인하르트 전역에 함성이 울려 퍼졌다.
대지조차 격동시키는 환호.
수만 명의 플레이어와 수십 만 명의 NPC가 그리드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를 찬양한다.
“찍어!!”
“유저들과 백성들을 클로즈업해!! 저들의 환희에 찬 얼굴을 카메라에 담으라고!!”
세상에서 과연 그 누가,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이토록 열광적인 연호를 받을 수 있을까?
마치 세계 대통령이라도 탄생한 분위기다.
각국 방송사 스탭들이 현장의 분위기에 도취되었다. 시청자들에게 현장의 상황을 생생히 전달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
하늘이 떠나가라 환호하는 백성들.
국적을 불문하고 그리드를 찬양하는 플레이어들.
고성을 내지르며 분주히 뛰어다니는 방송사 스탭들.
소란 속에서, 지르칸 또한 전율에 휩싸였다. 그의 시선은 라우엘에게 꽂혀있었다.
‘라우엘 그대는 정녕 괴물이오.’
에트날 귀족 잔당들이 집결하여 라인하르트로 진격해온다는 소문, 누가 퍼뜨렸겠는가?
다름 아닌 라우엘이다.
스테임 후작과 자이언트 길드의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서 현장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극적인 연출을 완성시키기 위한 설계였다.
결과?
지금 보는 그대로다.
템빨국 건국식은 시작과 동시에 엄청난 화제성을 발생시켰다.
사람들은 앞으로 몇 날 며칠 동안 오늘 날의 이야기를 떠들어댈까? 템빨국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몇 번이나 오르내리게 될까?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만약 크리스 님의 곁에도 라우엘 같은 인재가 있었다면…’
저 멀리, 검은 안대를 쓴 채 웃고 있는 라우엘.
그를 바라보는 지르칸의 눈빛에 욕심이 차올랐다.
‘크리스 님 또한 지금쯤 왕이 될 수 있었을 터.’
지르칸.
루키 이벨린의 출현 전까지 검사 랭킹 1위를 굳건히 지켰던 노년의 플레이어.
크리스의 오랜 벗이자 스승인 그는 크리스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오만으로 똘똘 뭉쳤던 꼬맹이가 모두의 선망을 받는 청년으로 성장해서 자이언트 길드를 세우고, 통합 랭킹 1위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보여 온 업적은 실로 굉장한 것이다.
‘크리스 님 또한 왕의 재목.’
다만, 그가 왕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를 보필하는 자신의 부덕 때문이리라.
상념에 잠긴 지르칸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한탄한다. 그의 굽은 어깨 위로 크리스가 커다란 손을 얹었다.
“내가 그리드를 따르겠다고 결정한 것이 지르칸 당신에게 상실감을 주었나?”
수십 년을 함께해왔기 때문일까.
지르칸의 표정만 보고 마음을 헤아리는 크리스였다.
지르칸이 죄인의 심정으로 읊었다.
“이 늙은이가 저 젊은 청년 라우엘의 반만 따라갔어도 도련님께서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콩깍지 한 번 거하게 씌었군.”
피식 웃은 크리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기술도, 동료를 위해서 헌신하는 숭고한 마음도, 하늘을 부수는 무력도 없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신과 그리드의 격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결심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드를 섬기겠노라고.
“지르칸, 명심하도록 해.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드가 나의 기준이다.”
“…기준, 말입니까?”
“그래, 그의 선택이 곧 나의 선택이고 그가 걷는 길이 곧 나의 길이다.”
어느덧 500명이 훌쩍 넘어선 길드원을 나의 재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 진즉에 깨달았다.
통합 랭킹 1위라는 왕좌?
크라우젤과 지발이 스스로 물러났기에 거저먹은 것에 불과하다.
스스로에게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차에 그리드라는 인물을 알게 됐다.
나는 해내지 못할 일들을 우습게 해내는 거인. 심지어 동료들을 자기 자신처럼 아끼는 그를 크리스는 감히 목표로 삼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기준으로 삼는다.
“크리스.”
단상 위에 선 그리드가 크리스의 이름을 호명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템빨왕이라고 칭한 그리드가 머리에 왕관을 쓴 이후 처음으로 입에 담는 이름이었다.
무려 500명의 길드원을 거느린 현 통합 랭킹 1위에 대한 예우다.
“정식으로 신청하마. 나의 동료가 되어줘.”
단상 위의 그리드가 손을 내밀자.
[신생국가 템빨국에서 당신에게 공작의 작위를 수여하고자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크리스의 시야로 알림 창이 떠올랐다.
Satisfy를 처음 시작한 그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그리드에게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가, 라는 질문을 내포한 알림 창이었다.
크리스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영광입니다.”
저벅저벅.
힘찬 걸음으로 단상 위에 오른 크리스. 그가 그리드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전 세계에 송출되며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다.
“크리스 외 503명 자이언트 길드원, 전원 템빨단에 가입… 아니, 당신의 신하가 되어서 템빨국의 영위에 일조하겠습니다.”
“….!!
통합 랭킹 1위가 이끄는 7대 길드의 일각이 그리드에게 고스란히 흡수되다니!
Satisfy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세계 모든 언론사가 속보를 쏟아내었고 사람들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
-와, 대박이다.
-통합 랭킹 1위랑 자이언트 길드를 고스란히 흡수해버리네.ㄷㄷㄷㄷ
-좀 이상하지 않나요? 크리스가 뭐가 아쉬워서 그리드의 신하가 되는 거죠?
크리스가 통합 랭킹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라우젤과 지발이 랭킹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크리스가 랭킹을 거저먹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크리스는 합당한 실력자였으므로 그의 위치에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데 그만한 인물이 그리드 수하로 들어간 것이다.
세상 사람 대부분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크리스가 왜 이런 선택을 내려야만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야?
-템빨단이 협박했다거나?
-7대 길드를 어떻게 협박하냐?
-7대 길드가 대수임? 템빨단은 국가 단위 세력인데.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7대 길드고 나발이고 템빨단 앞에서는 허접이구나;;
-와… 템빨단 이 기세로 다른 길드도 마구잡이로 흡수하고 세력 확장하는 거 아님?
-그럼 나중에 템빨단 겁나 커지고 Satisfy 독식하겠네요.ㄷㄷ
시청자들의 억측이 이어지는 가운데.
각국 방송사 전문가들이 드물게 날카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크리스가 템빨단 산하로 들어간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자이언트 길드는 이미 너무 비대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토 보유 현황이 썩 좋지 못했거든요. 아마 크리스의 역량으로는 자이언트 길드를 이 이상 키우는 게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독자적인 세력을 고수하면서 도태되느니 그리드 산하로 들어가서 새로운 영토와 템빨을 확보하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었던 거죠.』
『말인 즉, 템빨단이 크리스를 협박했다는 소문은 틀렸다는 뜻입니까?』
『당연합니다. 제아무리 템빨단이 강성한 세력을 자랑할지언정 폭거를 자행하면 사람들의 반발을 살 것이 분명하잖습니까. 심하면 반 템빨단 세력이 결성될 수도 있는데 템빨단이 굳이 위험을 자처할 리 있을까요?』
『이미 템빨단은 많은 세력의 경계를 받고 있는 입장입니다. 세력을 늘리겠답시고 무리해서 괜한 반발을 사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죠. 크리스와 자이언트 길드가 템빨단 산하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행한 일이었을 겁니다.』
『허…. 하지만 너무 믿기 힘든 사실이군요. 통합 랭킹 1위가 이끄는 최대 규모의 길드가 통째로 타세력에 흡수되다니…』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그리드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드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하면…』
『…..』
각국 방송사 전문가들의 그리드 찬양이 시작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가 어리석다며 비난하던 이들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앵커들과 시청자들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
“템빨국이 국가로서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이 향후 몇 년으로 예상된다고 했었지?”
S.A그룹 본사.
건국식 방송을 시청 중이던 임철호 회장이 질문하자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가 대답했다.
-템빨국은 본래 2년 3개월 후에 멸망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15개국의 견제를 받아 차츰 피폐해지고 종국에는 사하란 제국에게 점령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바뀌었습니다. 자이언트 길드가 템빨단에 가입하여 템빨국의 저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핫… 핫핫핫!!”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는 모르페우스.
임철호 회장이 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리드.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인 모르페우스의 분석을 대체 몇 번이나 빗나가게 만든단 말인가?
역시 기적의 5인방 중 하나답다. 보고 있노라면 정녕 즐겁다.
들떠있는 임철호 회장의 귓가로 모르페우스의 보고가 이어졌다.
-새로이 분석 된 템빨국의 멸망 시기는 앞으로 2년 8개월 후.
“…..”
-광룡 레바스탄 에피소드가 시작되는 시점이 될 것입니다.
“흐음, 이종족이 난립하게 되는 시기인가. 그 시기쯤 되면 비단 템빨국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온전치 못할 테지.”
새로운 이야기는 얼마든지 준비되어있다.
매번 다가올 시련에 맞서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될 자는 과연 누가 될까?
임철호 회장은 흥미롭고 기대가 되었다.
***
“그리드! 그리드!! 그리드!!!”
“거참 방정맞은 놈들이로군.”
“도리를 모르는 반역자의 이름을 연호하는 세상이라니, 정녕 말세다.”
“저급하고 불쾌한 곳이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어가고 있는 건국식 현장.
12개국 사절단 대표들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하찮고 짐승의 오물처럼 불결한 그리드와 템빨국을 연호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눈에는 미친 거로밖에 안 보였다.
“명망 높은 스테임 후작이 그리드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 예상외이긴 하나.”
“템빨국에 미래는 없어. 근본도, 대의도 없는 나라에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못 배운 평민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지. 당장의 화려한 행사에 현혹되어 선동당하고 들뜨는 모습을 보면 불쌍할 지경이다.”
“우리가 슬슬 현실을 일깨워주도록 합시다.”
템빨왕을 자처한 그리드.
단상 위에 선 그는 크리스와 스테임을 차례대로 호명하여 그들에게 공작위를 수여하고 있었다.
아직도 건국식은 한창인 것이다. 사절단 대표들이 나설 타이밍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절단 대표들은 템빨국에 예의를 갖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락도 없이 단상 앞으로 다가가 섰다.
“저 사람들은 뭐지?”
“누구야? 무슨 일이야?”
건국식에 집중하고 있던 방송사 스탭들과 플레이어들이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들 탓에 혼선을 겪었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서 검은 갑주의 템빨국 기사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사라고 오해 받고 있는 병사들이 일제히 창칼을 뽑아들었다.
“바로 폭력을 일삼으려는 건가? 하긴, 섬기는 주인조차도 왕좌를 폭력으로 빼앗은 인물이니만큼 그 아랫것들 또한 야만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사절단 대표들이 자신들의 목에 겨눠지는 창칼을 보고 조소했다.
템빨단원들이 분개하는 반면 단상 위 그리드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선 사람은 라우엘이었다.
“허락도 없이 행사에 난입하는 겁니까? 기본예절조차 모르는 자들이로군요. 그대들이 섬기는 12개국 왕의 수준 또한 뻔합니다.”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우리의 왕을 모욕하는 라우엘.
사절단 대표들은 울컥하였으나 최대한 침착하고자 노력했다.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것은 자신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우리들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말이오.”
“건국식이라는 미명 하에 치러지는 저급한 의식에 동참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고귀한 존재들이라서 말이지.”
“저 개부랄 같은 놈들이!”
행사를 망친 것으로 모자라서 마음껏 떠들어대는 사절단 대표들이 결국 반트너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얼굴과 대머리를 시뻘겋게 붉힌 그가 도끼를 꺼내려고 들자 폰이 말렸다.
“기다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라우엘이 바라던 그림 같으니까.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진 대기해라.”
“크음…!”
소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사절단 대표들이 칙서를 꺼냈다.
각국 방송사 카메라가 칙서를 클로즈업했다.
사절단 대표들이 마치 짠 것처럼 일제히 입을 열었다.
“그리드는 들어라.”
“우리 15개 왕국은 천륜을 어기고 왕좌를 무력으로 빼앗은 그대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그대가 왕이 된다면 그것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며 대륙 역사에 길이 남게 될 수치이다.”
“그리드는 경청하라.”
“우리 15개 왕국은 그대와 템빨국을 부정한다.”
“하지만 그대의 백성들에게는 무슨 죄가 있겠는가? 잘못을 무력으로 바로잡아 죄 없는 이들의 피를 뿌리고 싶지는 않다.”
“하니 기회를 주겠노라.”
“그리드는 받들라.”
“그대는 앞으로 우리 15개국에게 매달 공물을 바쳐라.”
“스스로의 배를 불리겠다는 과욕은 버려라.”
“굶고, 바치고, 반성하라.”
“그리드와 템빨국은 우리 15개국이 지배하겠노라.”
“……..”
건국식 현장이 순식간에 적막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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