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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31화 (426/1,794)

템빨 28권 - 22화

에트날 왕국을 멸망시킨 그리드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는 동향이 포착됐다.

사하란 제국의 황제 쥬앙데르크는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를 이미 진즉부터 접했지만 아무런 대응도 보이질 않았다.

하찮은 피라미에게는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드라는 놈이 전설의 힘을 계승하였고, 대륙 전역에 명성을 떨칠만한 활약을 꾸준히 펼쳐왔다지만 그래서, 뭐?

우리 제국에는 놈과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 되는 인재가 셀 수 없이 많다. 머잖아 알아서 자멸하게 될 놈에게 일일이 신경 쓸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다.

“라고 생각하시는 거겠지. 황제 폐하께서는.”

1황자 롤랑이 쓴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새 비어버린 그의 찻잔을 확인한 2황자 듀란달이 시녀에게 눈짓하며 물었다.

“형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리드라는 자를 정녕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시녀가 다시 채워준 찻잔을 들어 올린 롤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대 전설들의 무력이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하였음은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결국 개인의 힘.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 대제국 사하란이 친히 경계할 정도는 못 된다.”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강자는 제국에도 많으니까요.”

“그뿐만이 아니야. 애초에 그리드는 조국의 배반자다. 왕실에 반기를 들고 왕좌를 쟁취한 그의 존재를 다른 국가의 왕실들이 용납할 리 없다.”

“그리드를 인정할 경우 백성들의 사상에 악영향을 끼치겠지요. 다른 왕국들은 그리드의 파멸을 바라겠네요.”

“그렇지. 끊임없이 압박하고 견제할 게야. 그리드와 그가 세울 나라는 머잖아 자멸하고 말 것이다.”

1황자 롤랑과 2황자 듀란달.

이들은 6년 전 세상을 떠난 황후 아리아떼의 자식들이다.

적통성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황태자로 책봉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인물들이었지만 최근 그들의 입지는 크게 줄고 있었다.

황제의 총애를 얻은 황비 마리가 정치적으로 그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대세는 4황자 에단.

황비 마리의 아들인 그야말로 황태자로 책봉될 거라고 제국 내에서 말이 많았다.

***

에트날 왕실이 멸망한 후.

사하란 제국을 제외한 15개국 왕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다.

회견 장소는 에트날 왕국과 가까이 위치한 가우스 왕국.

가우스 국왕 칵투스가 입을 열었다.

“명망 높은 각국의 왕자들께서 이리 친히 모여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오.”

“칵투스 국왕전하를 만나 뵐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바마마께서 직접 참석하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으니만큼 회견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곧 건국 될 예정인 신생국가 템빨국 때문이었다.

“반역자가 세운 나라에 평화가 있어선 안 되오.”

“맞습니다. 반역의 끝에 영광은 없음을, 우리는 우리의 백성들에게 확실히 주지시켜줘야만 합니다.”

“템빨국은 빠르게 멸망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압박을 가하는 것이 좋겠소.”

“그야 당연하지요. 우리는 템빨국과 일체 외교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맞아요. 템빨국이 고립되어 자멸하게끔 유도해야지요.”

각국의 왕자들이 떠들어댄다.

그들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 칵투스 국왕의 만면에 미소가 깃들었다. 두꺼비 같은 생김새에 잘 어울리는 비릿한 미소였다.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야 기본이고, 우리 15개국 모두가 템빨국 건국식 현장에 사절단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소?”

“예?”

칵투스 국왕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각국 왕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인정할 수 없는 건국식에 어째서 사절단을 보내자는 말씀이신지?”

“축하라도 해주자는 겁니까?”

반발하는 왕자들.

그들에게 칵투스 국왕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축하 사절단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15개국에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단죄를 내릴 거란 내용을 전하는 사절단을 보내자는 게요. 어떻소?”

“호오… 그거 묘안이로군요.”

“템빨국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에게 공물을 보낼 수밖에 없을 테고….”

“우리는 앉아서 배를 채우면서 템빨국의 자멸을 확 앞당길 수 있겠군요! 하하하핫!!”

회견장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템빨국 건국식까지 열흘을 앞둔 날이었다.

***

르반필트.

라인하르트 인근의 작은 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평화로운 마을이 오늘따라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외곽에서 보면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유령도시 같았다.

“힉… 히익… 사, 살려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르반필트 내 식량 창고.

2,000여 명의 주민들이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잔뜩 겁에 질린 그들에게 로건 백작이 소리쳤다.

“에잇, 닥쳐라!! 국왕전하께서 서거하시고 조국이 혼란에 빠진 지금까지도 네놈들은 본인의 하찮은 목숨에 얽매이는 것이냐!!”

로건 백작은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르반필트 중앙에 걸려있는 깃발에 실버 드래곤이 아니라 망치와 모루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잖은 평민 놈들…! 반역자의 손에 점령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펼쳐도 부족할 판국에 반역자를 지지하다니! 네놈들은 사지를 절단 당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변절자들이다!!”

“히, 히익….!”

광분한 로건 백작이 결국 칼을 뽑아 들었다. 르반필트의 주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기세였다.

그를 베다만 후작이 말렸다.

“내일의 성전을 앞두고 칼을 무디게 만들어서야 쓰겠소? 그저 빵만 주면 넙죽 엎드려 받아먹기 바쁜 개돼지 새끼들을 일일이 상종하지 마시오.”

“베다만 후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들 애국지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가축들을 처분하기 위함이 아니라 반역자로부터 조국을 되찾기 위함이지 않습니까?”

“크음…”

귀족들의 만류에 진정한 로건 백작이 칼을 거뒀다. 당장 오줌을 지릴 기세로 벌벌 떨던 르반필트 주민들이 그제야 안도하며 한숨 돌렸다.

그들에게 베다만 후작이 물었다.

“망치와 모루는 반역자 그리드의 상징인가?”

“예, 예! 맞습니다! 며칠 전 라인하르트에서 병사들이 찾아오더니 국기가 바뀌었다고…!”

순간.

서걱!

잠자코 있는가 싶던 로건 백작이 다시 칼을 뽑아들더니 그것을 힘껏 휘둘렀다. 그러자 베다만 후작과 대화하고 있던 주민의 머리가 댕강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로건 백작이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국기라고…! 반역자의 세력을 국가로 인정하는 망언을 하다니…!!”

“히, 히익…!”

르반필트 주민들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들은 작금의 사태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우리에게 뭐 하나 해준 것 없던 왕이 죽었고, 우리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세금을 부과하여 결국 이 식량 창고를 텅텅 비게 만들었던 조국이 멸망했다.

우리가 이를 굳이 슬퍼해야하는가? 작금의 사태를 만든 반역자를 우리가 굳이 증오해야하는가? 반역자의 지시를 따라서 새로운 국기를 단 것이 우리의 잘못인가? 위에서 시키면 그대로 따르라고 가르쳤던 건 기존의 왕실과 귀족들이다. 우리는 그저 배운 대로 했을 뿐이다.

“애초에…! 애초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 우리의 탓인가!! 당신들이 잘못하고 무력하여 나라를 빼앗겨놓고 왜 이제와 우리를 힐난하며 화풀이를 하는 것인가!!”

로건 백작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의 주검을 품에 안은 청년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애초에 우리에게 조국이 있던가! 에트날은 당신들의 조국이었고 우리는 그저 당신들의 가축이 아니었던가!!”

“놈!!”

로건 백작의 눈이 뒤집혔다.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굳게 닫혀있던 식량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한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곰처럼 장대한 풍채를 지닌 사내였다.

그가 등장함과 동시에 발산하는 존재감이 르반필트 주민들은 물론이고 귀족들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스테임 후작…!!”

타고난 용맹과 뛰어난 용병술로 북방의 이민족들과 몬스터들을 처단하고 북방의 패자로 등극한 존재.

에트날 최고의 권력가로 손꼽히는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로건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침묵 속에서 좌중을 훑어 본 스테임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들, 백성의 원성을 살 정도로 썩은 정치를 펼쳐온 것인가. 같은 에트날 귀족으로써 부끄럽기 짝이 없군.”

“익…! 이익!!”

잠시 말문을 닫고 있던 로건 백작이 격분하며 소리쳤다.

“스테임 후작!!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이곳을 찾아온 것이냐!!”

반역자 그리드는 스테임 후작의 사위다.

그리고 스테임 후작은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로건 백작은 스테임 후작이 그리드의 아군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반면 다른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로건 백작! 후작께 예의를 갖추시게!”

“스테임 후작이 조국을 배반할 리 없네!”

스테임 후작은 가문대대로 에트날 왕실에 충성해온 인물이었다. 또한 그가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은 즉 그리드의 편도 들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베다만 후작은 확신하고 있었다. 스테임 후작이라면 필시 에트날 독립운동에 함께해줄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남몰래 서신을 보내어 이쪽의 위치를 알린 것이다.

“스테임 후작, 당신이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소. 내 초청에 응해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오. 우리 함께 반역자 그리드를 처단하고 에트날을 바로 세웁시다.”

“……”

악수를 건네 오는 베다만 후작.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테임 후작이 질문했다.

“아스란이 어떤 경위로 왕위에 올랐던 것인지, 그대는 아직 모르는 게요?”

“…물론 알고 있소. 렌 왕자님을 시해한 진범이 아스란 국왕전하셨다지. 하지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이오. 이제 와서 아스란 국왕전하를 원망하며 우리끼리 분열할 이유는 없소.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반역자를 처단하고 정당한 왕을 옹립하여 나라를 바로 세워야하오.”

스테임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당한 왕은 이제 없소. 렌 왕자와 아스란이 죽은 순간 선왕 비스바덴의 직계는 세상에서 지워졌으니까.”

“뭣…!”

비록 방계라고는 하지만 왕가의 피를 이은 존재는 왕국 도처에 많이 있었다.

한데 단칼에 부정한다는 것.

스테임 후작이 위험한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스테임 후작!! 결국 사위의 편에 서는 것인가!!”

눈치 챈 베다만 후작과 귀족들, 그리고 그들의 기사와 병사들이 일제히 창칼을 뽑아 쥐었다.

식량 창고 바깥에 숨어있던 병사들까지 일제히 몰려오자 스테임 후작과 그의 가신들은 졸지에 수만 명에게 고립되는 신세가 됐다.

하지만 스테임 후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 사위가 비록 정당한 왕은 아닐지 몰라도 새로운 왕이 될 자격은 충분히 갖췄지. 무력, 지략, 인망, 지위 모든 면에서 내 사위보다 왕이 되기에 적합한 인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내 장담컨대 제국의 황제조차도 내 사위보단 못할 게요.”

“개소리를!!”

듣다 못한 로건 백작이 몸을 날렸다.

자랑하는 검술로 스테임 후작의 목을 단칼에 날려버릴 각오였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피를 토하며 죽어버렸다.

어째서인지 등 뒤에서 칼이 날아온 까닭이다.

로건 백작을 비롯한 <반 그리드 귀족 연합>소속 귀족들이 아군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던 인물.

크리스 자작의 갑작스러운 배신이었다.

“네놈은 또 왜!”

소리치는 베다만 후작을 무시한 크리스가 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는 스테임 후작에게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드의 동료입니다.”

스테임 후작이 허허 웃었다.

“내 사위의 동료라면 내 동료이기도 하지. 라덴, 적들을 척살하라.”

“예.”

북부의 신성 라덴.

일국을 대표할만한 천재인 그 젊은 기사가 스테임 후작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신형을 날렸다.

그의 검은 마치 벼락같았다. 한 번 떨어질 때마다 반 그리드 연합군의 병사들을 수십 명씩 해치웠다.

하지만 연합군에도 인재는 있었다. 실력 좋은 기사들이 라덴을 압박했다.

그때 나선 것이 크리스와 자이언트 길드원들이었다.

콰르르르릉!!

<그리드의 대검>

묵색의 거검이 맹수처럼 포효하며 연합군을 휩쓴다.

[<반 그리드 연합>퀘스트를 포기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이 영구히 소멸합니다.]

퀘스트 보상?

그리드와 함께하는 미래보다 가치 있을까?

크리스와 자이언트 길드원들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라인하르트에 보내선 안 된다!!”

“크아악!! 크리스 네노옴!!!”

에트날의 귀족 잔당들이 죽어나간다.

템빨국 건국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날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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