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27화 (422/1,794)

템빨 28권 - 18화

그리드가 마법 무구 제작법을 연마하는 사이.

각지로 흩어진 템빨단원들은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격려하고 그들과 함께 라인하르트, 파트리안, 바이란을 수복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친 인물은 지슈카, 유라, 레가스, 폰 등의 하이랭커가 아니라 의외로 그리드의 여동생 루비였다.

루비의 압도적인 힐링 능력과 자애로운 마음씨가 상처 입은 백성들과 병사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의욕을 북돋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루비 성녀 님 덕분에 제 가족과 친구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할 줄 알았는데 성녀 님 덕분에 온전히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평생 성녀 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앗! 루비 성녀 님께서 그리드 님의 여동생이셨다고요? 어쩜 남매 두 분께서 이토록 멋지고 훌륭하신 건지…!”

루비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심이 나날이 커졌다. 이에 따라서 루비의 영향력도 자연스럽게 확대되었다. 그리드 다음 갈 정도였다.

라우엘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복구 작업의 진척 속도를 높여야겠습니다. 백성들과 병사들을 조금 더 혹사시키도록 하죠. 루비 님께서 전면에 나서서 노동의 필요성을 설파하신다면 백성들 또한 기꺼이 더 열심히 일하게 될 겁니다.”

“지금도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만 하고 있는 백성들을 이 이상 혹사시키겠다고요? 안 돼요. 쓰러지고 말거에요.”

“그들이 쓰러지면 루비 님께서 치유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완벽한 무한 동력!

광역 힐링 능력을 지닌 성녀의 가치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백성과 병사들을 부담 없이 혹사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루비에게 라우엘이 호감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루비는 그런 라우엘이 썩 달갑지 않았다.

“나쁜 사람.”

“매도하셔도 좋습니다만 저는 스스로에게 당당합니다. 제 결정은 오로지 그리드 님과 템빨단의 성장을 위한 것.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흥, 그렇게 말하면 제가 할 말이 없군요.”

새침하게 대꾸하며 등을 돌린 루비가 백성과 병사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더 가혹한 노동을 부탁했다. 루비 또한 템빨단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라우엘의 명령을 어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러분이 다치지 않도록 제가 잘 보살펴드릴게요.’

백성들에게 다짐하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 루비.

그녀를 바라보는 라우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 님과 달리 귀여운 면이 있군…”

두근!

오랜 세월 동안 가슴 깊이 봉인되어있던 감정이 꿈틀거린다.

‘뭣이…? 나의 하트를 관통하는 이 불꽃처럼 뜨거운 감정은 뭐지?’

라우엘은 몰랐지만 그것은 사랑.

22살 청년 라우엘의 늦은 첫사랑이 시작됐다.

***

“뭐? 라우엘이 레이단에 병력을 집중시키도록 지시했다고?”

“응, 사하란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니까 레이단을 가장 철저하게 방비해야 한다던데.”

“왜 그런 판단을 내린 거지? 지금 당장 주의해야할 상대는 제국이 아니라 에트날 왕국의 잔당들 아닌가? 놈들 입장에서는 왕을 죽이고 조국을 분열시킨 우리를 용서할 수 없을 텐데? 놈들이 병력을 모아서 바이란이나 라인하르트로 진격해오면 어쩌려고 병력을 죄다 레이단으로 빼라는 거야?”

토반이 라우엘의 병력 이동 명령에 의문을 제기했다.

체다카 길드 시절 참모 역할을 수행했을 정도로 제법 지략을 갖춘 그의 시각으로 봤을 때 라우엘이 큰 오판을 하는 것 같았다.

유페미나와 반트너도 공감했다.

“그러게요. 지금 상황에서 허점을 보이면 에트날의 잔당들이 그 틈을 놓칠 리가 없는데.”

“라우엘이 피곤해서 실수한 거 아니야?”

모두가 라우엘의 판단에 불신을 품는 그때였다.

“라우엘씨는 스테임 후작의 존재를 간과하지 않은 걸 테죠.”

잠자코 있던 유라가 입을 열었다.

복숭앗빛의 도톰한 입술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사망한 아스란 국왕의 악행이 만천하에 공개된 지금 스테임 후작은 더 이상 고민할 여지가 없어요. 무조건 영우씨를 섬기게 될 거에요. 하지만 전쟁 중에 우리의 지원 요청을 거부했던 그가 과연 빈손으로 영우씨를 찾아올 수 있을까요?”

“그렇군…!”

“스테임 후작이 있었네요!”

반트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반면 토반과 유페미나는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스테임 후작이 선물을 들고 찾아오겠어.”

“그 선물이란 그리드 님께 반기를 든 에트날 잔당들의 수급일 테고요. 과연 라우엘은 대단하네요. 거기까지 예상하고 병력을 운영하다니.”

“그 점을 바로 간파해낸 유라도 굉장해. 유라가 참모진에 합류해주면 라우엘이 많이 편해지겠는데?”

“안 돼요. 유라는 렙업 해야죠. 우리 길드 최강의 전력 중 한 명인데.”

“…..”

최강의 전력.

과연 그럴까?

유라 자신은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약해.’

같은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인 그리드, 크라우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고 주작궁을 무장한 지슈카와 에픽 클래스 전직자인 유페미나보다도 존재감이 옅다.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답지 않은 나약함이다.

‘이대로는 문제가 있어. 한시라도 빨리 히든 피스를 모으고 정진해야해.’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유라 또한 지존을 꿈꾸는 바, 강해지고자하는 열망이 남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았다.

‘내 다음 행선지는…’

지옥이다.

데빌 슬레이어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무대.

템빨국 건국이 완료되고 템빨단이 안정을 되찾으면 당장 지옥으로 달려가 성장에 전념하리라.

유라가 각오를 다졌다.

***

라인하르트에 3개의 레베카 신전을 세울 것.

교황 데미안의 명령을 레베카교의 장로들이 받아들였다.

대악마 벨리알을 멸하고 세상을 구원한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에게 퀘스트가 떴다.

[<신전 건설>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신전 건설>

난이도:A

위대한 영웅 그리드의 영토 라인하르트에 3개의 레베카 신전을 건설할 계획입니다.

레베카교의 신도로써 신전 건설에 힘을 보태세요.

퀘스트 클리어 조건:레베카 신전 건설 현장에서 최소 나흘 동안 노동.

퀘스트 클리어 보상:새로 건설되는 신전에 부임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김. 신성력+20. 건설 공헌도에 따른 차등 보상.

“인력이 얼마나 부족하면 성기사와 사제들에게까지 건설 현장에 참가하라는 거야?”

“신전 건설에 필요한 자금과 인력은 신전이 건설되는 지역의 영주가 충당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헐… 설마 라인하르트에 짓는 신전에 드는 비용을 우리 교단에서 지불하는 거야?”

“교황 데미안의 직권남용이겠지. 그자는 워낙 그리드의 팬으로 유명하잖아.”

“장로들이 승낙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레베카교 소속 플레이어들은 신전 건설 퀘스트가 썩 내키지 않았다.

성직자인 자신들이 어째서 건설 현장에 참가해야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고 데미안의 사적인 감정에 이용당하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

하지만 실제로 퀘스트를 거부하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무척 드물었다.

A급 퀘스트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닐뿐더러 퀘스트 보상이 꽤 짭짤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을 20이나 올려준다는데 안 갈 수는 없지.’

‘라인하르트는 대륙 전체에서도 몇 개 안 되는 초대형 도시 중 하나. 그곳에 부임할 수만 있다면 매일 수많은 퀘스트가 생성 되서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거야.’

‘템빨단과 친분을 쌓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도 않고.’

‘앞날을 위해서라도 대세를 따르련다.’

템빨국의 왕성이 될 라인하르트에 인재가 대거 모여들기 시작했다.

템빨단의 위력이다.

***

“미안하다!!”

극검을 비롯한 은기사 출신 길드원들이 복귀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코크로 섬을 빼앗긴 것으로 모자라 완전히 초토화 당한 까닭이다.

과거의 번성했던 코크로 섬은 이제 두 번 다시 존재할 수 없다.

많은 추억이 깃든 코크로 섬이 폐허가 된 모습을 떠올리자 극검은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라리 에트날 놈들에게 섬을 넘겨줬더라면…”

섬이 폐허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빼앗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데 괜히 코크로 섬을 지켜냈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분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극검을 라우엘이 위로했다.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블러드 카니발의 기습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핑계를 대자면 예측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극검이 에트날 해군으로부터 코크로 섬을 완전히 지켜낼 거라고는 꿈에도 꾸지 못했으니까.

애초에 블러드 카니발이 개입할 여지는 없을 거라 보았다.

한데 극검은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인물이었고, 공교롭게도 결과가 안 좋게 됐다.

‘지금 와서 코크로 섬을 되찾는다고 해봤자 파괴당한 시설들을 복구하는데 투자해야하는 비용이 너무 크다. 깔끔하게 미련을 접는 것이 낫겠지.’

크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본래 코크로 섬은 템빨단의 주요 수입원이었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예정이었다. 앞으로 템빨단이 점령하고 다스리게 될 구 에트날 소속 영토들은 코크로 섬보다 훨씬 더 가치가 높았다.

위안 삼고 있는 라우엘에게 새로운 보고가 들어왔다.

“카츠 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블러드 워리어 카츠.

전쟁터에서만큼은 그리드와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리드 이상 가는 강함을 뽐낼 수 있는 존재.

그는 역시 라우엘의 기대대로 큰 활약을 펼쳤다.

장장 열흘 동안 보르네오를 지켜낸 것이다.

라우엘이 버선발로 달려 나가 카츠를 환영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신의 활약 덕분에 우리의 후방이 안전할 수 있었어요.”

만약 보르네오를 완전한 우리 땅으로 만들 수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테지만, 카츠에게 배정해주었던 병력의 숫자는 불과 천 명밖에 안 됐다.

수만, 수십만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던 가우스 왕국으로부터 보르네오를 완전히 지켜내는 것은 제아무리 카츠라도 불가능한 일.

열흘을 지켜낸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 라우엘에게 카츠가 보고했다.

“가우스 왕국군은 보르네오 점령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지금이라도 보르네오에 지원병을 보내서 가우스 왕국이 두 번 다시는 보르네오를 넘볼 수 없도록 만드는 게 좋을 것 같군.”

“…예?”

가우스 왕국이 보르네오 점령을 포기하고 퇴각했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결과 보고다.

“어떻게 보르네오를 지켜냈단 말입니까?”

당황하며 질문하는 라우엘에게 카츠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돈빨.”

“……”

아무래도 그리드 님께 말씀드려야할 것 같다.

변방에서 큰 활약을 펼쳐주신 카츠 님과 극검 님 일행에게 좋은 무기 하나씩 장만해드리라고.

***

쩌엉. 쩌엉. 쩌엉.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저 이곳에서 매직 미사일을 사용했을 뿐이다.

쩌엉. 쩌엉. 쩌엉.

“….”

매직 미사일을 쉬지 않고 사용하여 금속을 때리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마치 썩은 동태 눈깔 같다. 눈 밑으로 길게 내려온 다크써클이 저승사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드…”

대장간 한쪽에 앉은 채 그리드를 지켜보는 이사벨의 아름다운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애쓰는 그리드에게 감사함보다도 미안함이 더 컸다. 자신 따위가 그리드를 저토록 혹사시켜도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괜히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을… 안 돼. 더 이상은 못 보겠어.’

이사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이제 자신은 어찌 되도 상관없었다. 그리드만 무사하길 바랐다.

“그리드…!”

그리드에게 이제 그만 제발 쉬라고 소리치려던 이사벨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의 매직 미사일에 1만 회 가량을 연타 당한 아다만티움이 전과 비할 바 없이 찬란하게 빛나며 대장간 전체를 밝혔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는 이사벨에게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씨익,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물었다.

“행복을 만끽할 준비 됐어?”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