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8권 - 16화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교외.
알록달록한 산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오래 된 고성이 한 채 보인다. 투명한 하늘을 담은 호수 곁에 그림처럼 서있는 고성이다. 지나가는 새들의 시선조차도 사로잡을 정도로 아름답다.
하지만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쏴아아아아-
고즈넉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결치는 들판.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
***
족히 100평은 될 듯한 방에 액자 등의 장식품은커녕 작은 가구조차 없다. 그저 캡슐 한 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다.
“루나…”
캡슐을 침대삼아 잠들어있는 사내는 지독한 악몽을 꾸는 중인 듯하다.
녹색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눈물에 젖은 채 흘러내렸고, 초췌한 얼굴은 고통과 슬픔으로 일그러져있다.
“루나…!”
오로지 한 사람의 이름만을 되뇌며 괴로워하는 이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그너스.
절규하듯 소리치며 잠에서 깬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허억…. 헉…”
적막한 성 안 어디를 둘러봐도 옛 연인은 없다.
지독한 현실이 아그너스의 피와 심장을 차갑게 식혔다.
“루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서는 아그너스의 금색 눈동자에 커다란 호수가 담겼다. 호수에 반사되는 고성의 풍경이 삭막하다.
그녀와 함께 봤을 때는 더 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던 광경이 이제는 반대의 감정을 선사하는 것이다.
“…네가 매일 아침마다 보고 싶다던 풍경이다.”
부를 쌓았다.
성 한 채를 통째로 사버릴 수준의 막대한 부.
하지만 혼자다.
이 넓은 성 안에 나 이외의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꾸욱.
이를 악 문 아그너스가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간신히 억눌렀다.
무능력한 쓰레기였던 자신 탓에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연인 루나.
아그너스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과거의 자신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더 없이 원망스러웠다.
“너를…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
비틀비틀.
비쩍 마른 다리로 힘없는 걸음을 옮긴 아그너스가 다시금 캡슐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또 다른 세상 Satisfy에 접속했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
“제길! 빌어먹을!!”
“…..”
레이단을 습격했다가 도리어 사망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 백요와 흑요 자매.
부활 포인트에서 재회한 그녀들이 독기로 가득 찼다.
백요는 연신 욕설을 지껄였고 흑요는 말없이 이만 갈았다.
템빨단에게 벌써 두 번째 고배를 마신 그녀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다.
‘대체 그리드 그 자식은 뭐지? 어떻게 그런 거물 NPC들을 여러 명씩이나 부하로 거느릴 수 있는 거야?’
‘페이커… 노말 클래스 전직자 따위가 감히 나를….’
백요 자매는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레이단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이번엔 기필코 설욕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상대가 너무 강했다. 섣불리 복수를 꿈 꿀 수가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천외천 크라우젤과도 막상막하로 싸웠던 우리가 그리드도 아닌 그리드의 부하들에게 두려움을 느껴야하다니!
부들부들, 치를 떠는 자매의 귓가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두 분의 힘만으로는 템빨단과 맞서기 어려울 겁니다. 현재 템빨단의 전력은 아레스 군단을 따라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
우리밖에 모르는 부활 포인트에 누가?
눈을 날카롭게 치뜬 백요 자매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경계했다. 그리고 이내 모습을 드러내는 목소리의 주인을 목도하더니 깜짝 놀랐다.
여성이라고 주장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름다운 백발의 청년, 다름 아닌 베라딘이었던 까닭이다.
“대장 하이에나? 네가 여긴 왜?”
하이에나.
네크로맨서를 비하하는 용어다.
네크로맨서는 타인의 시체를 조종하여 수족으로 부리는 바, 기왕이면 시체가 있는 곳에서 싸우려는 습성을 지녔고 그 꼴이 마치 시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됐다.
백요 자매가 베라딘을 대장 하이에나라고 부르는 이유도 간단하다.
베라딘이 네크로맨서 랭킹 1위였기 때문이다.
‘제1대 10인의 루키 중에서 라우엘과 함께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던 녀석.’
‘라우엘과 달리 잠잠하게 지내는 듯싶더니 우리에게 접근을 해?’
뭔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예상하는 백요 자매에게 베라딘이 손을 내밀었다.
“템빨단에게 복수하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핫…!”
백요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했다. 가소로운 것이다.
“화이트 울프 길드라고 했던가? 네깟 피라미가 이끄는 길드에서 우리를 섭외하겠다고? 주제 파악을 못 해도 너무 못 하는 거 아니야? 애초에 너희 따위가 우릴 어떻게 도울 건데?”
무척 격한 반응이었지만 베라딘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화이트 울프가 길드 랭킹 200위권에 드는 상위 길드라고는 하지만 백요 자매 같은 거물을 영입하기에는 한창 부족하다는 사실을 베라딘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당신들을 저의 길드로 영입하려는 것이 아니라 <임모탈>에 영입하려는 것이니까요.”
“임모탈?”
그것 참 거창한 이름의 집단이다.
“풋, 네크로맨서끼리 모여서 폼 잡는 조직이라도 되나?”
비웃는 백요 자매에게 베라딘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임모탈은 아그너스님을 섬기는 비밀 단체입니다.”
“아, 아그너스라고?”
아그너스의 이름이 지닌 무게는 엄청났다.
아그너스는 크라우젤, 아레스와 함께 3대장으로 꼽힐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예전부터 지녀왔고 또한 무엇보다도 독보적인 광기를 지닌 존재인 바.
최악의 다크 게이머 집단으로 악명이 높은 블러드 카니발조차도 아그너스가 상대라면 쉬쉬하며 피할 정도였다. 그 누구도 아그너스를 우습게 여기지 못했고 늘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여태까지 아그너스는 세력 구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아그너스 또한 크라우젤과 마찬가지로 늘 혼자였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베라딘이 주장하고 있다.
아그너스에게도 세력이 있다고 말이다.
“자, 잠깐. 그 미친놈한테 세력까지 생기면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심심할 때마다 도시 하나씩 박살내고 다닐 것 같은데…”
“…..”
정상인으로 분류되지 않는 백요 자매조차도 아그너스를 한 수 위의 미친놈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베라딘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너털웃음을 흘린 베라딘이 고개를 저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아그너스님은 의외로 냉정하십니다. 자신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는 이상 대량 학살을 벌이진 않아요.”
“…..”
즉, 기분에 거슬리면 대량 학살을 벌인다는 뜻이구나.
입을 닫아버리는 백요 자매에게 베라딘이 다시 한 번 제안했다.
“임모탈에 들어오십시오. 아그너스님과 함께라면 템빨단을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맞는 말이다.
아그너스의 존재감은 그만큼 컸다. 특히 아그너스의 <데스나이트화>가 백요 자매는 탐이 났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최강의 언데드 기사가 될 수 있었으니까.
‘만약 녀석과 함께하게 된다면.’
‘우리는 등에 날개를 달게 되는 격.’
하지만 세력을 함부로 옮길 수는 없는 법이다. 여러모로 조건을 따져봐야 했다.
“임모탈의 목적이 뭔데?”
“아그너스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언데드와 플레이어가 공존하는 왕국을 세워서 훗날에는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것이 목표죠.”
“…재밌겠는데? 언데드 군단을 왕국 단위로 생성할 수 있다면 엄청나게 강할 것 같고.”
“하지만 거기에 가입하면 활동 규칙 같은 게 생겨서 귀찮아지는 거 아니야? 우리가 블러드 카니발에 있는 이유는 자유를 보장 받기 때문이라고.”
“당연히 임모탈에서도 두 분께 자유를 보장해드릴 겁니다. 단, 템빨단과 아레스 군단이 우리의 적이라는 인식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그 두 세력과 무력충돌이 발발할 경우에는 되도록 참전해주셔야겠습니다.”
“…..”
백요 자매에게 있어서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자유를 보장받을 뿐더러 템빨단을 명확히 적대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아레스 군단까지 적대해야한다는 점은 다소 마음에 걸린다만…’
‘아그너스의 언데드 군단과 우리의 힘이 결합된다면 천하무적 아닐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그너스가 아군이라고 생각하자 한없이 든든해졌다.
“좋아. 당장 블러드 카니발에서 탈퇴하겠어.”
의욕을 보이는 백요 자매에게 베라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표면적으로는 블러드 카니발에 계셔주셔야 합니다. 제가 화이트 울프에 있는 것처럼 말이죠.”
“아직은 임모탈이라는 조직을 세상에 알릴 단계가 아니란 뜻이야?”
“네, 무엇보다도 저는 궁금합니다. 장막 뒤에 숨어있는 블러드 카니발의 마스터. 그자의 정체가 뭔지.”
“핫, 우리한테 원하는 건 따로 있었던 거네.”
콧방귀 뀌는 백요 자매였지만 딱히 불만을 표출하진 않았다.
정작 본인들도 마스터의 정체가 궁금했으니까.
***
드라비앙 산맥 안쪽에 위치한 블러드 카니발의 본거지.
한때는 광룡 네바르탄의 둥지였다는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 있다.
블러드 카니발의 마스터, 일명 <다크>다.
늘 장막 뒤에 모습을 가리고 있는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블러드 카니발에서도 창립 멤버 세 명밖에 없었다.
‘백요 자매가 잠잠한 것이 거슬리는군.’
레이단을 습격했다가 실패한 백요 자매.
그녀들의 본래 성격이라면, 지금쯤 달려와서 잡아먹을 듯이 따지고 들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리가 개인의 이권을 위해서 뭉친 집단이라고는 하지만, 한 번쯤은 병력을 지원해줘도 되는 게 아니었느냐고 우겨댔을 것이다.
한데 어째 잠잠한 것이 다크는 영 찜찜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그가 블러드 카니발의 창립멤버 중 한 사람인 <비올라>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피아로급의 네임드 NPC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건가?
-응, 애들하고 벌써 몇 개의 왕국을 돌아다녀보고 있는데 재능 있는 NPC를 못 봤어. 무소속 네임드 NPC가 이렇게까지 귀한 존재인지는 처음 알았네.
-재능 있는 자들은 어디에서나 욕심내게 마련이니까. 흐음… 어쩌면 우리가 직접 육성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도 있겠군.
-네임드 NPC를 육성한다고? 어떻게?
-비올라 너도 파트리안 전쟁 영상을 봤겠지? 일개 병사 한 명이 암암리에 전쟁터를 누비면서 그리드를 돕고 있었다. 어쩌면, 그리드는 처음부터 네임드급 NPC를 섭외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NPC를 체계적으로 육성해서 네임드급 NPC로 진화시키는 걸 수도 있어.
-그게 가능해?
-가능한지 아닌지는 직접 해봐야 알겠지. 대충 재능 있는 NPC가 보인다면 확보해서 데려와. 던전에 가둬놓고 레벨을 올려보도록 하자.
-으, 응, 알았어.
비올라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다크의 명령을 따랐다. 그녀의 다크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깊단 뜻이다.
비올라에게 명령을 전달한 후.
“주인을 충실히 지키려면 그만큼 노력을 해야지.”
흡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다크가 장막 뒤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로 이동했다. 어찌나 은밀한 공간인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복잡한 미로가 펼쳐졌다.
이 미로의 제작자?
“오늘도 열심히 작업해볼까.”
다름 아닌 다크였다.
까앙! 까앙!!
곡괭이를 거머쥔 다크의 손끝에서 극악 난이도의 던전이 만들어져간다.
새로운 히든 클래스 <던전 제작자>의 등장이다.
훗날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커다란 선물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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