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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19화 (414/1,794)

템빨 28권 - 10화

‘그리드…!’

우리의 습격을 미리 예측하고 함정을 파놓다니?

심지어 논밭에다가!

‘소름 돋는 놈!’

특정 계절이 아닌 이상에야, 논밭이라는 구역은 경계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농작물이 크게 자라지 않은 상태의 논밭은 완전히 개방돼있으므로 복병이나 지형적 함정을 파놓기에 용이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백요와 흑요 자매는 방심하고 말았다. 설마 논밭이 함정의 무대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길드원과 병사들을 농부로 위장시켜놓았을 줄은…!’

병사들은 둘째 치고, 유저들이 농부로 변장한 채 대기했다는 점이 놀랍다. 오로지 그리드의 명령을 수행하고자 자신들의 시간을 희생했다는 뜻이 아닌가. 그것도 할 일 없는 논밭에서 하염없이 말이다.

그리드에 대한 템빨단원들의 충성심이 얼마나 큰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대로 당했어.’

백요는 확신했다.

그리드는 대장장이, 템빨러, 하이랭커이기에 앞서서 절대적인 지배자이며 천재적인 책사다.

반신반의 했었지만, 이제는 장담할 수 있다.

블러드 카니발이 세이렌을 침공했을 당시 템빨단과 충돌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음을!

‘그때부터 우리는 그리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던 거야!’

그리드는 처음부터 블러드 카니발과 적대하고자 계획을 짜고 이후 블러드 카니발을 견제해온 것이 분명하다. 실로 굉장한 남자다.

남성.

이성을 오로지 외모로만 평가하는 저열하고 단순한 존재.

그 혐오스러운 존재를 이 내가 대단하다고 인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자존심이 상해서 칫, 혀를 찬 백요가 동생 흑요에게 눈짓했다.

“위축되지 말고 싸우자. 적중에 네임드는 없어. 우리는 계획대로 레이단을 박살낼 수 있을 거야.”

허세가 아니다.

백요의 자신감은 여전히 완벽했다.

자신이 동생 흑요와 함께 힘을 합쳤을 때 전투에서 패배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응, 언니. 싸우자.”

그리드에게 또 당할 수는 없다.

놈에게 빼앗긴 <부조리의 반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 흑요의 그리드에 대한 원한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리드, 나도 너의 소중한 것을 빼앗고 말겠어.’

마음을 독하게 먹은 흑요.

망상을 현실에 구현하는 능력을 지닌 <망상가>의 힘을 개방한다.

스슥.

스스스스슥.

레이단의 농부들이 가로질러오는 논밭이…

화르륵!!

불의 길로 변모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레전드리 클래스라고 추측하고 있는 <망상가>의 망상구현 능력은 환술과 다른 실제인 바.

“크아아아아악!!”

농부들은 갑자기 나타난 불의 길로부터 뜨거운 열기와 지속적인 화상 데미지를 입었다.

“윽! 이, 이게 무슨?”

우리의 마음에 평온과 안식을 안겨주던 논밭이 온데 간데 사라지고 온통 불바다가 되다니?

화들짝 놀란 농부들이 혼란에 빠졌고,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흑요는 망상으로 분신을 구현했다.

비쩍 마르고 어두운 인상을 지닌 자신을 육감적인 몸매의 미인으로 만들어서 현실에 강림시켰다. 그리고 마법사용 아이템을 장착시킨 뒤 자신은 슬그머니 후방으로 물러섰다.

대량 살상에 특화 된 화염마법사 버전 흑요의 출현이다.

“파이어 스톰!”

쿠콰콰콰콰콰쾅!!

템빨단 최고의 실력자 유페미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워했던 흑요의 힘이 레이단 농부들을 일거에 휩쓸어버린다. 부조리의 반지가 있었을 때와 비교하면 마법의 사용 횟수가 무척 적어졌지만 상대가 너무 약해서 아쉬움을 느낄 수도 없다.

불꽃의 폭풍이 휘몰아치자 수십의 농부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역시 내 동생!”

흑요의 활약을 보고 활짝 웃은 백요가 몸을 날렸다.

레이단까지 달려오느라 연소되었던 지방이 이미 서서히 회복되어가던 단계.

커다란 고기를 씹어 먹고 지방 회복 속도를 높인 백요가 몸매를 뚱뚱하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농부들에게 수박만해진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컥…!”

백요가 템빨단원이라고 오해 중인 농부 유저들.

즉, 피아로에게 붙잡혔다가 기간제 농부로 활동 중인 유저들이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들은 사막을 돌파하여 레이단까지 도착했을 정도로 강력한 실력자들이 아닌가?

레벨이 무려 200초중반대로 형성되어 있다.

한데 이 백요와 흑요라는 정체불명의 여성들 앞에서는 한낱 티끌이 된 느낌이었으니 납득이 안 됐다.

‘이 여자들 정체가 뭐지?’

‘어떻게 이렇게 강한 거야?’

백요의 주먹을 막아낸 방패 내구력이 한 방에 80이나 날아가 버렸다.

일그러진 방패를 보고 사색이 된 탱커형 농부에게 씨익, 가소롭다는 미소를 흘린 백요가 살짝 도약했다.

이어서 비대한 뱃살을 활용한 공격기, 배치기가 작렬한다.

뻐어어엉-!!

“흡…!”

백요의 뱃살에 방패 째 짓눌린 농부가 멀찍이 나뒹굴었다가 그대로 불길에 삼켜졌다.

잿빛으로 산화하는 그를 보고 일대가 침묵에 빠졌다.

백요와 흑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비공식랭커들의 절대적인 강함이 레이단의 논밭을 압도하고 절망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제길…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하는 거지?”

몇 명의 유저들이 한탄하기 시작했다.

템빨단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신들이 희생해서 레이단을 지켜야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보면 없는 것이다. 상황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들에게 다른 유저들이 일침을 놓았다.

“피아로님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히든 퀘스트로 꿀 빨았던 걸 잊으면 안 되지. 최소한의 보답은 하도록 하자.”

“우리가 일군 논밭이 엉망이 되는 꼴을 잠자코 보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 않냐?”

“매일 같이 새참을 가져다주던 레이단의 주민들을 생각해봐. 저 괴물들을 그들에게 보낼 수는 없어.”

“…하긴.”

투덜거리던 유저들이 마음을 추스르고 일치단결했다.

우리가 누군가?

미친 농부에게 다짜고짜 붙잡혀서 농노로 부려 먹힌 불쌍한 중생?

그건 표면적인 모습일 뿐.

우리는 농부와 논밭의 가호를 받고 새로이 거듭난 사람들이다.

우리가 피아로에게 배운 농사는 평범한 농사가 아니었다.

육체 능력과 무기술 숙련도가 대폭 상승하여 강한 힘을 거머쥘 수 있게 됐다.

그 힘을 증명할 때다.

“힘을 합쳐서 싸우자!”

“피아로님에게 가르침을 받았을 때를 떠올려! 호미를 휘두를 때의 동작을 기억해내라!”

“우와아아아아아!!”

“……!”

살에 파묻힌 백요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선 제압을 확실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사기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니 당황한 것이다.

‘가소로운 것들이!’

절망하고 좌절해도 부족할 판국에 용기백배하다니?

꽈드득!

“내가 우습냐!!”

백요는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한다. 특히 남성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를 폭발시킨 백요가 기껏 축적하였던 지방을 연소시켰다.

치익-

치이이이익!!

뜨거운 열기가 백요의 전신으로부터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이내 백요는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훨씬 더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모를 선보이게 되었다.

동시에.

퍼엉!!!

연소된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삼은 백요의 주먹이 빛살처럼 쏘아지며 농부들을 덮쳤다.

뚱뚱했을 때와 비교하면 크기가 몇 배나 작아진 주먹이었으나, 위력과 속도는 전보다 몇 배나 위였다.

콰자자작!!

“커윽…!”

“아악!!”

백요가 휘두른 주먹 한 방에 농부가 대여섯 명씩 나가떨어졌다.

무장하고 있는 방어구를 관통하는 형태의 날카롭고 파괴적인 일격이었다.

백요의 진정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된 유저들 모두가 석상처럼 굳어버렸고 백요는 드디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 힘은 경외 받아야 마땅한 거야. 너희들 따위가 우습게 여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피아로라는 이름의 미친 농부에게는 허무하게 패배했다지만, 유저 중에서는 내가 최강이다.

크라우젤?

우습다. 내 실력이 그보다 몇 수나 위다.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닌가!

믿어 의심치 않으며 희열하는 백요의 귓가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나들은 누구야?”

“응…?”

싸움터 한복판에서 이런 앳된 목소리를 듣게 되다니?

어리둥절해진 백요 자매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귀여워!!’

‘깜찍해!!’

짙은 흑발에 깊은 청안, 그리고 눈꽃이 내린 듯이 새하얀 피부를 지닌 어린 소년.

아장아장한 걸음으로 논밭에 다가오고 있는 녀석은 비록 남성이었지만 무척이나 귀여웠다. 찰떡같은 뺨이 한없이 부드러워보였고 초롱초롱한 눈은 마치 보석 같았다.

“뭐니? 너 같은 꼬맹이가 왜 이런 곳에…”

보기 안 좋은 체형과 어두운 성격 탓에 남성들에게 무시와 차별을 당해왔던 백요와 흑요 자매.

남성을 지극히 혐오하는 그녀들이었으나 그래도 어린아이까지 미워할 순 없었다.

아이가 혹 다치기라도 할까, 농부들을 공격하는 손을 멈추고 묻던 그녀들이 이내 두 눈을 부릅떴다.

“로드 공자니이임~~~~”

“혼자 갑자기 뛰어가시면 어떡해요!!”

“…”

하나 같이 어여쁜 200여 명의 소녀들.

로드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에게 후다닥 달려오더니 마치 애인처럼 팔짱을 끼면서 달라붙는다.

백요와 흑요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벌써부터 바람둥이 짓을…!”

“남자는 이래서 안 된 다니까! 애나 어른이나 그냥 다 똑같이 늑대야! 늑대!!”

꼴 보기 싫다.

저놈이 커서 어떤 남자가 될지 눈에 뻔히 보인다.

하지만 그래서 뭐?

아무리 NPC라지만 어린아이를 해치기에는 조금 꺼림칙한…

‘어?’

‘가만?’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치만 떨던 백요와 흑요가 뒤늦게 깨달았다.

로드에게 붙는 호칭.

‘공자라고?’

어쩌면 저 녀석.

“설마… 설마 너, 그리드의 자식이냐?”

플레이어와 유저간의 혼인과 출산이 성립되는 가상현실게임 Satisfy.

그 말도 안 되는 현실구현능력을 떠올리며 질문하는 백요 자매에게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웅, 세상에서 제일 멋지신 그리드 공작님이 내 아빠마마야.”

“……!”

백요와 흑요가 환희에 차올랐다.

그리드가 꽁꽁 숨겨놓았던 보물을 발견하였으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을 죽이자!!’

‘썩 내키진 않지만 좋아! 그리드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지게 만들자!!’

눈빛으로 대화한 백요와 흑요 자매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고,

“그러니까 나는 누나들을 혼내줄 거야.”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서늘한 표정을 지은 로드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단도였다. 날카로운 진짜 칼.

고사리 같은 손에 쥘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꼬맹이 주제에 왜 저런 무서운 물건을 가지고 다니는 거지?’

백요와 흑요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누나들은 어째서 아빠마마의 백성들을 해친 거야? 떼찌야. 나쁜 짓했으니까 엉덩이 맞아야해.”

파팟!!

그것은 섬광.

로드가 집어던진 두 자루의 단도가 백요와 흑요의 발목을 노리고 빠르게 쇄도했다.

로드가 철이 들기도 전부터 배워온 <란스티어의 투척술>의 발현이었다.

나이에 따른 레벨 제한 탓에 아직 40레벨밖에 안 된 로드라고는 하나, 숙련도 높은 전설급 스킬의 위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피해…!”

단도에 실린 위력을 엿보고 경악한 백요와 흑요가 자리에서 서둘러 이탈했다. 아니, 이탈하려고 동작을 취하다가 멈춰버렸다.

그녀들의 그림자가 갑자기 살아있는 생물처럼 땅으로부터 솟구치더니 발목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그림자의 왕> 카심으로부터 직접 전수 받은 그림자 술법의 묘리였다.

“이 괴물 같은 놈이…!”

백요와 흑요 자매의 눈에 로드는 더 이상 귀여운 꼬맹이가 아니었다. 꼬맹이의 탈을 뒤집어 쓴 괴수였다.

파앗!!

간신히 그림자를 뿌리치고 반격을 개시하려는 그녀들의 시야로 빛이 번쩍였다.

<홀리 라이트>였다.

악한 존재에게만 공격으로 적용되는 기본 신성 마법.

인간인 백요와 흑요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지만, 로드가 그 마법을 사용한 의도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시야의 일시적인 방해.

“윽!”

눈앞에서 번쩍이는 강렬한 빛 탓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백요와 흑요에게 로드가 쇄도했다.

몇 달 전 그리드가 친히 제작해준 <어린이용 철검>으로 구현하는 검술은 백의검객 시절 크라우젤이 전수해주었던 비기의 일부.

“뽁풍 검.”

쿠콰콰콰콰콰콰쾅!!

“……!”

백요와 흑요는 물론이고 전투를 지켜보는 농부들 전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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