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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415화 (410/1,794)

템빨 28권 - 6화

국가 지분을 독식하라고?

그리드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하다.

“뭐야? 나한테 독재라도 하라는 거냐? 기껏 모두가 고생해서 세우게 된 나라를 내가 무슨 권리로?”

그리드의 반응이 라우엘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독재라… 독재자가 되어서 나라를 잘 통치하실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겠지요. 예를 들면 사하란 제국의 황제처럼 말이죠. 이곳은 현실과 다른 세상. 시대적 특성상 독재자라는 이유로 반감을 사지도 않을 겁니다.”

“…아쉽게도 나라를 잘 통치할 자신이 없는데.”

그리드는 본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일단 정치력이 전무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나라를 통치했다가는 금방 나라가 망할 거라고 확신했다.

무려 720억 원이나 되는 건국비를 허공에 날리는 셈.

상상만 해도 소름끼친다.

몸서리치는 그리드를 보고 실소를 터뜨린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당신께 독재를 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료들에게 합당한 권한을 베풀어주셔야죠. 다만, 그들이 폭주할 수 없게끔 당신께서 확고한 중심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겁니다.”

만약, 다수의 길드원이 국가의 지분을 나눠가지게 될 경우 그리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라우엘은 그때 발생하게 될 최악의 사태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에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

우리나라에 그런 속담도 있었구나?

미국인 라우엘에게 배움을 얻고 감탄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이해했다.”

그래, 정말로 이해했다. 건국비를 자신 혼자서 마련하는 것이 이상적임을 납득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근데 6천만 골드를 무슨 수로 마련하냐고.”

현재 그리드의 총 자산은 200억을 초과한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720억에 도달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스스로 궁리해보세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라우엘은 그리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세계에서 최고로 가치 있는 인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

어중간한 능력만 믿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날뛰는 이들보다야 백배천배 낫다지만, 이를 과연 그릇이 크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라우엘은 그리드가 본인의 가치를 보다 더 제대로 인지해주길 바랐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라우엘 곁에서 잠자코 생각해본 그리드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스폰서를 구할까?”

현실에 존재하는 기업들과 Satisfy상에서 활동 중인 세력들을 상대로 대규모 투자를 유치한다면 어떨까?

“템빨국에 생길 번화가마다 기업 광고 간판을 걸어줄 테니까 돈 좀 대달라고 하는 거야. 어때?”

“뭐… 일반적인 방법이겠지요.”

틀리지 않다.

플레이어가 최초로 세우게 될 국가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유래 없이 클 것이 분명한 사실.

특히 플레이어들을 위주로 많은 이주자와 유동 인구가 발생할 것이 뻔했다.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템빨국에 투자해서 손해 볼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라우엘이 바라던 대답과는 거리가 멀다.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뭐,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야?”

“당연하죠.”

“뭔데?”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씨익 웃어보였다. 미소에 깃든 사악함이 마치 그리드의 미소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드를 빼다 닮았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

“노가다.”

“…?”

“노가다 하시죠. 대장간에 틀어박혀서 아이템만 주구장창 만드세요. 그럼 당신이 예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시일 내로 자금을 마련하실 수 있을 겁니다.”

“…”

“고객층을 템빨단원 위주로 설정하면 아군의 전력 상승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테고, 노가다 기간 동안 스킬 숙련도와 능력치 상승도 기대할 수 있으니 막말로 일석삼조 아닙니까?”

“……”

아니, 염병.

드디어 가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더니만 또 노가다를 하라고?

그리드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지만 라우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초심을 잃지 마셔야죠, 초심을. 노가다 하세요.”

“…”

***

“노가다… 노가다를 해야 한다니…”

일국의 왕이 되기 직전인 시점에서 다시 또 중노동에 시달려야하다니? 영 고깝다.

물론 그리드도 알고 있다.

자신의 근본은 대장장이. 대장일을 하는 것이 원칙에 맞다.

하지만 최소 500억을 벌 때까지 언제까지고 대장간에 틀어박혀서 일만 해야 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고역이었다.

‘라우엘은 쉽게 말하지만.’

지금의 자산을 쌓기 위해서 걸린 기간이 무려 2년 이상이다. 그것도 아이템 판매만으로 번 돈이 아니라 대부분 방송으로 인한 수익이었다.

단지 아이템만 만들어가지고 500억을 어느 세월에 벌라는 말인가?

“잠시 시간 되나?”

분주한 라인하르트.

템빨단과 병사들이 백성들을 수습하고 도시 곳곳을 파악하는 사이, 한쪽에 틀어박힌 채 좌절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검성 크라우젤이었다.

그를 보고 번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라우젤, 감사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다. 네가 아니었으면 내 동료들… 특히 피아로가 큰 위기에 처했을 거야. 레이드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크라우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오지 않았다면 템빨단은 무사히 퇴각했겠지. 나를 기다리느라 템빨단은 퇴각 기회를 놓쳤고 그 탓에 위험에 빠질 뻔했으니 오히려 내가 미안하다.”

“…참 특이하단 말이지.”

크라우젤은 늘 지존이었다. 천외천이라고까지 불리며 세상 사람들에게 경외 받는 절대적인 인물이었다.

한데 오만하지가 않다.

그 올곧음이 그리드는 늘 신선하면서도 존경스러웠다.

‘언젠가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열망하며, 동경하는 그리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크라우젤.

그가 그리드에게 질문했다.

“벨리알에게 같은 스킬을 두 번 연속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본 순간 확신했다. 너는 신장을 얻은 거겠지?”

“……!”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비장, 패왕과 더불어서 3대 공격형 패시브 스킬로 분류되는 신장.

그리드는 이 스킬의 존재를 직접 획득하고 나서야 알게 되지 않았던가?

“네가 어떻게 신장을 아는 거지?”

“나 또한 7악성 에피소드를 진행했었으니까. 3대 공격형 패시브와 3대 방어형 패시브, 그리고 타락 패시브에 대한 지식쯤은 진즉부터 갖췄다.”

“엥…? 7악성 에피소드? 그게 뭐야?”

“…….”

크라우젤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잠시 말문을 닫는가 싶던 그가 이내 반문했다.

“설마, 7악성 에피소드도 진행하지 않고 신장을 얻은 건가?”

“그런데? 대체 7악성이 뭐기에 그래?”

“…”

크라우젤은 황당했다.

그리드가 신장을 얻게 된 경위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발생한 결과임을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웅은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든다고 했던가.’

시대가 그리드를 영웅으로 선택했다고 해석하면 옳을 터.

과연 내 라이벌답다.

속으로 감탄하고 전율하면서도 애써 표정 관리에 성공한 크라우젤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7악성 에피소드는 신에게 선택 받았다가 타락한 일곱 악인들에 관한 옛이야기다. 에피소드를 진행하다보면 7악성들이 보유했던 최강의 패시브 스킬들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진행 방식이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내가 목표로 하는 비장을 얻지 못한 상태다만… 너를 보니 아그너스와 아레스 또한 지금쯤 원하는 스킬을 확보했을 지 모르겠군.”

“아그너스… 아레스…”

그리드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놈의 아그너스라는 놈과 아레스라는 놈들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매번 이런 식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걸까?

“모두가 아그너스와 아레스를 높이 평가하더군. 크라우젤 네가 의식할 정도로 그들의 수준이 높은 거냐?”

크라우젤의 경쟁자는 내가 유일하다.

무의식중에 그렇게 여겨왔던 그리드이기 때문에 아그너스와 아레스에게 묘한 경쟁심을 품었다.

마음을 알 리 없는 크라우젤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잠재력은 그리드 너에게도 밀리지 않다고 본다. 말이 나온 김에 조언해주자면, 그들과 엮이지 않기를 추천하마.”

“왜?”

내가 놈들에게 얻어터지고 질질 짤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건가?

칫, 울컥하는 그리드에게 크라우젤이 설명했다.

“아그너스는 완전히 뒤틀린 인물이다. 섣불리 말해서는 안 되는 거겠지만, 아마 놈이 너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다면 네게 커다란 집착을 보일 가능성이 커.”

아그너스는 불우한 인물이다.

마치 그리드처럼, Satisfy를 접하기 전까지 최악의 삶을 살아왔다.

그리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드는 불우한 운명을 극복한 이후부터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척하고 있는 반면, 아그너스는 여전히 과거에 집착한 채 힘을 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의로 똘똘 뭉친 존재라고 보면 된다. 그는 결코 너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걷는 너를 철저히 부정하려들겠지.”

“…”

“반면 아레스는 한 점의 그늘도 없는 인물이다. 마치 지금의 너처럼 태양과 같아. 그렇기 때문에 강하다. 그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의 곁에 모이는 인재들 모두가. 만약 네가 그와 적대하게 된다면…”

천하의 템빨단이라도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크라우젤은 확신했다. 하지만 차마 그 생각을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다. 그리드의 자존심을 건들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뭐,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다. 결국 선택은 네 몫이 되겠지.”

시간을 너무 오래 끌었다.

어머니와 함께 식사할 시간이다.

이만 자리를 떠나려하는 크라우젤을 그리드가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호수처럼 깊은 크라우젤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아그너스와 아레스가 너보다 강한 거냐?”

“지금은 그렇겠지.”

“결국, 나중에는 다시 네가 최고가 된다는 뜻이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거다만.”

“그렇다면 됐어. 나는 크라우젤 너만 본다. 아그너스? 아레스? 개뿔이야. 내 안중에도 없다고.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 접어두고 너는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형한테 연락하고.”

“형?”

“나.”

“미쳤군. 내가 두 살 더 많다.”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 크라우젤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마치 바람처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는 크라우젤.

마치 바다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그리드.

두 사람 모두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서로를 응원하며 다짐한다.

나중에는 자신이 최고가 될 거라고.

***

도발적인 눈빛과 당당한 걸음걸이가 인상적인 미녀, 지슈카.

건국비 6천만 골드를 그리드 혼자서 지불하게끔 만들겠다는 라우엘의 계획을 접한 그녀가 납득했다.

“좋은 생각이야. 괜히 길드원들하고 국가 지분을 나눴다가는 언젠가 불화의 싹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리드에게 6천만 골드를 융통할만한 재력이 없다는 점이지만, 그 문제는 지슈카가 해결해줄 수 있었다.

“내가 주작궁 값으로 일단 6천만 골드를 지불하면 건국비로 충분한 거잖아? 그치?”

“쿨럭! 쿨럭쿨럭! 케엑!!”

아직 주작궁의 상세정보를 확인하지 못한 라우엘이다.

대체 얼마나 굉장한 아이템이기에 가격을 ‘일단 6천만 골드’로 책정한단 말인가?

사레가 걸려서 괴로워하는 라우엘 곁에서 지슈카는 싱글싱글 웃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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