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22화
무상농법의 절기 <절구질>과 피아로 고유의 궁극기 <필멸>.
벨리알은 이 강력한 스킬들을 맞고도 생명력 게이지가 멀쩡했었다.
한데 이후 <파천(破天)> 2연격을 맞았을 때는 생명력을 손실했다.
이유가 뭘까?
라우엘은 레이드 내내 곰곰이 생각해봤다.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입을 경우에만 생명력을 손실하는 유형의 보스인가?’
아니,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
광역기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절구질이라면 또 모를까, 필멸은 Satisfy 최강의 단일 공격 스킬이다. 필멸의 데미지가 파천(破天)보다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레벨이 낮은 크라우젤의 파천(破天)보다 필멸의 데미지가 낮았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필멸과 절구질을 맞았던 시점에는 생명력 대신 다른 자원을 소모했을 수도…’
예를 들면 마나 실드라거나.
‘하지만 특정 이펙트가 발생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원리지?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라우엘의 생각은 심화되어갔다.
레이드를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보스의 특성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벨리알의 생명력 공식을 이해할 수 없었고, 종국에는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유라의 독보적인 활약 덕분이었다.
벨리알의 생명력이 10퍼센트까지 떨어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전투 초반에 벨리알이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이유, 이제 굳이 알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 지독한 레이드도 곧 끝난다.
라우엘이 안도하는 그때였다.
쿠웅-!
천둥번개를 동반한 마기가 폭발하면서 벨리알의 모습이 변했다.
아름다움도, 끔찍함도 없는.
인형처럼 차갑고 무감정한 느낌의 여성형 악마가 되었다.
꼿꼿이 세운 등에 달린 날개와 곤충의 껍질처럼 반들거리는 묵색 피부가 인상적이다. 적광을 띄는 눈동자를 제외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맣다.
“생명력이…”
“회복 됐다고?”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이 두 눈을 의심했다.
벨리알의 모습이 변한 순간, 10퍼센트까지 떨어져있던 그녀의 생명력 게이지가 100퍼센트 완전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변신하면서 회복한 건가?’
대부분의 템빨단원들이 이와 같이 생각했지만 라우엘만큼은 달랐다.
‘이전까지의 변신 과정에서는 생명력이 회복되지 않았었다.’
이번 변신에서만 생명력이 회복 됐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절망하는 템빨단원들의 사기가 추락하는 그때, 라우엘이 벨리알의 진정한 이명을 떠올렸다.
‘거짓의 왕…!’
돌이켜보자.
벨리알.
그녀는 공격을 당할 때마다 신음하고 비명을 토하거나 얼굴을 찌푸렸다.
생명력 게이지는 멀쩡했을 때도 마치 고통을 느낀다는 듯이 행동했다.
‘실제로는 하나도 안 아프면서 고통을 느끼는 연기를 했다?’
라고 해석하기는 힘들다.
벨리알이 굳이 그런 무의미한 연기를 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관점을 바꿔보자.
‘연기를 하는 쪽은 벨리알이 아니라 그녀의 생명력 게이지라면?’
그래, 벨리알은 거짓의 왕.
속임수쯤 우습게 부릴 것이다.
생명력 게이지를 속임수의 도구로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돌이켜보면, 필멸과 절구질을 맞을 때의 벨리알은 비교적 침착한 상태였지.’
하지만 이후에는 계속 혼란스러워했다.
농부인 줄 알았던 피아로가 검을 쓰고, 검성 크라우젤에 이어서 데빌 슬레이어 유라가 나타나는 등.
연달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면했던 벨리알은 냉정을 잃었고 그때부터 생명력 게이지가 손실됐다.
‘흥분한 나머지 생명력 게이지에 속임수 부리는 걸 잊었던 걸 수도.’
이제 와서 굳이 검은 피부로 몸을 뒤덮은 이유도 납득이 간다.
‘상처를 가리기 위함인가.’
라우엘이 큭큭, 얼굴의 절반을 한쪽 손으로 가리며 웃었다.
“템빨의 화신들이여, 저 다크니스한 악마 벨리알의 멀쩡한 겉모습에 선동당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검은 피부는 상처 입은 육신을 가리기 위한 표피, 무감정한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기 위한 가면에 불과할 뿐. 지금의 벨리알은 영혼까지 상처 입은 나약한 한 마리의 짐승에 불과합니다.”
템빨단의 떨어진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판단하고 설명을 시작하는 라우엘에게 템빨단원들이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중2병이 발작하다니…”
“혼자서 뭐라고 저렇게 떠들어대는 걸까?”
“…”
훗, 역시 평범한 인간은 이 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씁쓸하게 웃은 라우엘이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했다.
“벨리알의 피통은 허상입니다. 앞서 여러분이 보셨던 대로, 그녀의 현재 생명력은 채 10분의 1도 남지 않았습니다. 하니 기죽지 마세요. 총공세를 가해서 레이드를 마무리 지읍시다.”
“음!”
라우엘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중2병이고 나발이고 간에 템빨단원들은 라우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 이제 그만 끝내자!”
“우리가 직접 공격해봤자 무의미해! 혼란에 주의하며 피아로님과 유라, 그리고 크라우젤을 보조해라!”
중상을 입고 전선에서 물러난 지슈카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벨리알에게 쇄도했다. 더 이상 가짜 피통에 현혹되지 않고 레이드 성공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최종 형태의 벨리알.
라우엘의 해석대로 중상을 입은 상태이면 뭐하는가?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금의 그녀는, 앞서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서 지친 크라우젤과 템빨단원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메테오.”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쾅!!!
화염에 둘러싸인 운석 수백 개가 하늘에서부터 빗발쳐 내려온다.
마법이라는 현상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
대재앙 그 자체였다.
“크아아아악!!”
“윽…! 미안하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운다더라!”
팟-!
파파파파파파팟!!
운석에 얻어맞은 템빨단원들이 하나, 둘씩 잿빛으로 산화되었다.
크라우젤, 유라, 지슈카, 데미안, 폰, 레가스 등의 최상위 전력들조차 중상을 면치 못하고 죄다 널브러졌다.
“제, 제길…”
“희망은 없나…”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절망하는 템빨단원들.
그들의 시선 끝에 피아로가 걸렸다.
“사부…!”
“피아로님!!”
떨어지는 운석을 낫과 호미로 하나씩 격퇴하고, 그 대가로 몸이 피투성이가 된 피아로.
급기야 왼쪽 손목이 부러져 낫을 떨군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벨리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아, 안 돼…”
템빨단원들은 피아로를 말리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그를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일어날 수 없다.
운석에 강타당한 팔과 다리가 모조리 부러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이잇…!”
이를 악 문 지슈카가 화살을 쏘고자 시도했다.
표적은 피아로의 발치.
<주작궁>의 스플래쉬 힐효과로 그를 치유시킬 의도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쓰러진 자세로, 그것도 부러진 손가락으로 원하는 방향에다가 화살을 날리는 일은 제아무리 신궁이라도 불가능했다.
“악마여…! 주군의 신하들에게! 주군의 맹우이자, 주군 미래의 힘이 될 그들에게 더 이상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어느덧 벨리알의 코앞까지 다가간 피아로가 생명을 불사르듯이 남은 마나를 끌어올렸다.
“쿨럭!”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며, 주군께서 만들어주신 소중한 호미를 전력으로 휘두른다.
진원진기까지 써가며 벨리알과의 동귀어진을 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중상을 입은 피아로는 그마저도 못했다.
“….”
무표정한 얼굴로 피아로의 공격을 회피한 벨리알이, 자신의 뺨을 스쳐지나가는 호미를 불꽃으로 날려버린 뒤 이어서 피아로의 머리통을 손으로 붙잡았다.
“아까부터 말하는 주군이 누구인지, 이제는 궁금할 지경이로구나. 인간의 군주라고 해봤자 하등하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할 터인데, 생사를 넘나드는 동안에도 뭘 굳이 그리 챙기는지 우습구나. 뭐, 이제 됐다. 너희는 모두 죽으면 된다. 인간의 머리를 터뜨리면 그 모습이 마치 폭발하는 화산을 보는 것 같아 상쾌하더구나.”
꾸욱!
사늘하게 읊조린 벨리알이 피아로의 머리를 쥔 손에 마기를 끌어올리는 순간이었다.
“쥬드. 죽인다.”
아무 생각 없지만 성에 대해서는 조금 관심을 갖기 시작한 순수청년 쥬드.
야한 옷(?)차림의 벨리알과 서큐버스들을 보기가 남세스러웠던 그는 전투 내내 구석에 처박혀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하지만 벨리알이 검은 피부를 뒤집어쓰고 서큐버스들이 메테오를 맞아 궤멸한 지금은 자유를 되찾았다. 드디어 전투에 참가했다.
푸욱-!
<다인슬레프(모작)>이 벨리알의 얼굴을 가격하였고,
“호오?”
벨리알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나선 인간 놈, 어떻게 나를 공격할 수 있는 걸까?
나의 마기에 중독되어 혼란을 겪고 아군에게 칼끝을 겨눠야 정상인 건데?
‘애초에 메테오 폭격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지?’
꽈악-!
자신의 피부를 꿰뚫지 못하고 멈춰버린 다인슬레프의 칼날을 손으로 움켜쥔 벨리알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또한 전설인 게냐?”
불끈!
벨리알에게 다인슬레프를 빼앗기지 않고자, 검을 쥔 양팔에 잔뜩 핏줄을 세운 쥬드가 이를 악 물고 답했다.
“나는. 쥬드.”
“쥬드? 그러니까 너 또한 전설인 것이냐?”
“나는. 쥬드다.”
“…?”
상태가 좀 이상하다?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벨리알이 다인슬레프를 쥔 손에 마기를 폭발시켰다.
쩌어어어어엉!!
[<다인슬레프(모작)>이 대악마의 권능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습니다!]
“……!”
주군께서 친히 하사해주신 검을 부러뜨리다니?
쥬드가 격노에 휩싸였다.
하지만 화내봤자 무의미하다.
벨리알의 손에 붙들린 피아로와 함께 쥬드 또한 곧 죽을 운명이었다. 벨리알의 힘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쥬드까지…!”
템빨단을 지탱해주었던 두 거목이 눈앞에서 사라지려한다.
템빨단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모두가 두 사람의 생존을 바랐지만 벨리알이 허락하지 않았다.
“죽어라.”
퍼엉!!
선언한 벨리알이 피아로와 쥬드의 머리를 겨냥하고 마법을 발사하였고…
파앗-
벨리알에게 속박당해 있던 피아로와 쥬드가 거짓말처럼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지?”
텔레포트의 전조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다니?
당황한 벨리알이 주변을 살피다가 문득,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렸다.
상처 입은 피아로와 쥬드를 끌어안은 낯선 사내가 있었다.
흑발을 흩날리며, 맹금류를 연상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눈매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인간 따위가 나를 내려다 봐?”
가소롭다.
“네놈은 또 뭐냐?”
재차 묻는 벨리알에게 흑발 사내 그리드가 대답했다.
“이 사람들의 주군.”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흑화를 발동시키는 그리드.
반마로 변해가는 그를 보면서, 벨리알이 질색했다.
“영혼 없는 놈…? 어, 어떻게 네가 이곳을!!”
“…?”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다짜고짜 영혼 없는 놈이라니?
“살면서 심한 말을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그건 또 색다른 인신공격인데?”
황당해서 콧방귀 뀐 그리드가 피아로와 쥬드를 성녀 루비에게 건네주었다. 이어서 춤사위를 펼치며 지상으로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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