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18화
뚝딱뚝딱.
막말로 순식간이다.
전쟁의 여파로 폐허가 된 바이란이 빠르게 복구되고 있었다.
무너진 가옥들의 잔해가 눈 깜짝할 새에 치워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들이 또 뚝딱하고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대량의 인력 덕분이었다.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백성이 아스모펠과 다섯 명의 하이랭커들의 진두지휘를 충실히 따르며 노동에 임했다.
긴 행군을 통해서 체력이 단련 된 그들의 노동력은 실로 훌륭한 것이었다.
무거운 짐도 쉽게 운반했고, 자재를 구한답시고 산을 오르면 큰 산 하나를 몇 시간 만에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였다.
루실리브 공작의 사병들이 무장하고 있던 황금 갑옷도 대량으로 확보한 까닭에 보물창고도 황금으로 가득 찼다.
향후 바이란은 전과 비할 바 없이 크고 풍족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시급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식량이 부족하군.’
루실리브 공작은 10만 대군의 식량을 넉넉히 확보하지 않았었다. 전쟁을 빠르게 끝낼 수 있다는 오만이 빚어낸 실태였다. 바이란이 보관하고 있는 식량 또한 적었다. 앞으로 보름 내에 식량이 다 떨어질 수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서 황폐해진 논밭을 바라보는 아스모펠의 눈빛이 씁쓸하다.
‘피아로에게 직접 농사를 배운 농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에게 바이란의 농부들을 교육시키고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재배하여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레이단의 명물 레인보우 포테이토는 엄청 빨리 자라고 맛도 좋으며 영양가도 높았으니까.
하지만 이곳 바이란에 레이단의 농부가 있을 리 없다. 아쉬울 따름이다.
‘전쟁 통인 지라 레이단의 식량도 여유가 없을 터이니… 타지에서 식량을 수입해오는 수밖에 없는가.’
물욕이 강한 주군께서 슬퍼하실 테지만, 황금을 파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음?”
논밭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아스모펠이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하나의 인영을 발견했다.
점차 더 가까워지는 인영.
흙투성이 천 옷에 밀짚모자를 쓴 사내였다. 등과 허리춤에 각종 농기구를 매고 있음이 보인다.
영락없는 농부의 행색이었다.
‘누구지?’
농부가 걸어오는 방향 너머에는 다양한 몬스터가 출몰하는 숲이 있었다. 농부 혼자서 그 숲을 돌파하여 이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고?
아스모펠은 점차 가까워지는 농부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간파하였고,
“어? 아스모펠 당신, 피아로 사부의 친구 아니십니까?”
“자넨…!”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농부의 정체를 확인한 아스모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피아로가 세이렌으로 떠나기 전, 한동안 곁에 두고 많은 농업(?)을 가르쳤던 농부(?) 휴렌트.
그가 바이란을 찾아올 줄이야!
“과연 피아로가 아끼던 인물답군. 뛰어난 선경지명이야.”
“네?”
“바이란의 사정을 예견하고 달려온 걸 테지? 정말로 훌륭하네. 긴 말은 필요 없겠군. 어서 밭을 개간해주시게.”
“네?”
“바이란의 농부들을 교육시키고 그들과 함께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잔뜩 재배해주면 좋겠어.”
“네?”
“7만 명의 백성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잔뜩!”
“네?!”
“그럼 잘 부탁하지.”
[히든 퀘스트 <바이란 식량난 해결!>이 생성되었습니다.]
“…”
오러 마스터 휴렌트.
레이단의 논밭을 지켜야한다는 일념으로 먼 길을 달려온 그가 바이란의 기간제 농부가 되었다.
템빨단원들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아예 답이 없구만.”
“온전한 상태여도 부족한 판국에 이건 뭐…”
템빨단원들의 푸념이다.
대악마 벨리알이 발생시키는 디버프와 상태이상, 32지옥이라는 공간이 발생시킨 디버프, 몰려드는 서큐버스들의 매혹.
디버프에 디버프가 중첩되고 상태이상까지 걸리자 극도로 약화 된 템빨단원들은 마치 벌거벗겨진 심정이었다.
맥스옹조차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템빨단 최강자 중 한 명인 페이커는 이미 진즉에 사망했다. 그것도 벨리알의 단 2격을 맞고 말이다.
“괴물 같은…”
대악마 레이드?
현재 시점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한 콘텐츠다. 향후 몇 년은 지나야 도전 가능할 듯하다.
단적인 예로, 452레벨이나 되는 피아로가 벨리알을 상대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퍼펑!
퍼퍼퍼퍼펑!!
지옥 도처에 흐르고 있는 지옥불 강의 화력을 이용, 더욱 더 강력한 불꽃을 다루게 된 벨리알이 피아로의 몸 곳곳을 새카맣게 태우고 있었다.
피아로는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희망이 없군.”
그래, 벨리알 레이드를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다. 이제 체념만이 남았다.
“물론 쉽게 체념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지.”
템빨단에 포기란 없다.
길드 마스터 그리드부터가 포기와 거리가 먼 사람인데, 그 밑에 모인 사람들이라고 다르겠는가?
“집에 가서 옷부터 입고 와라!”
“변태 같은 것들!”
하나 같이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서큐버스들.
노출 심한 옷차림으로 날아드는 각양각색의 미녀들에게 으름장을 놓은 템빨단원들이 각자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벨린을 제외하면 크게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32지옥 서큐버스들의 레벨은 무려 320인 반면 은기사 출신 템빨단원들의 평균 레벨은 200중반대에 불과했으니까!
“후후훗, 화내는 모습이 섹시하네요. 자, 긴장 풀어요. 내가 기분 좋게 만들어줄게요.”
“당신의 단단한 피부를 핥고 싶어요.”
서큐버스들이 템빨단원들에게 본격적인 매혹을 걸기 시작했다. 서큐버스의 숫자는 족히 50을 넘겼고 아름다운 그녀들의 매혹을 거부하기란 어려웠다.
더욱 더 절망적인 사실은, 저 멀리서부터 수백, 수천 마리의 서큐버스가 끊임없이 날아오고 있다는 점이다.
[서큐버스의 매혹에 걸립니다!]
[몸을 제어하기 어렵습니다!]
[마법 저항력이 40퍼센트 하락합니다!]
“하으으, 맛있게 먹을게요.”
황홀경에 빠져서 얼굴을 붉힌 서큐버스들이 본성을 드러냈다. 매혹에 빠진 템빨단원들의 스태미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크윽…”
“빌어먹을…”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감각에 휩싸인 템빨단원들이 순식간에 무력해지는 그때였다.
혼미해지는 템빨단원들의 시야로 거미줄을 연상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실선이 한 번 번쩍하고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 어떤 소음도, 기척도 없었다.
정말 찰나지간의 번쩍임에 불구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당신을 매혹시키던 서큐버스가 사망하였습니다.]
[매혹에서 해방됩니다.]
“뭣…!”
템빨단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을 위협하던 서큐버스들이 웃는 낯짝 그대로 양단 나더니 잿빛으로 산화하는 게 아닌가?
‘누구지?’
320레벨 몬스터 수십 마리를 일거에 소탕하다니?
이런 엄청난 위력의 광역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어안이 벙벙해지는 템빨단원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천외천.
검성 크라우젤의 등장이었다.
지옥의 어둠을 반으로 쪼개며 나타난 그가 콸콸 끓는 지옥불의 강을 가볍게 도약했다. 그리고 피아로를 수세에 몰아넣고 있는 벨리알에게 접근,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검을 휘둘렀다.
[벨리알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습니다. 초당 500의 열기 데미지와 2,500의 화상 데미지를… 저항하였습니다.]
[벨리알의 어둠이 당신의 마음을 잠식… 저항하였습니다.]
[정신착란을… 저항하였습니다.]
[초감각이 대상의 육신을 스캔합니다.]
[베기 공격은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찌르기 형태의 공격을 추천합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9,53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윽?”
벨리알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인간 놈, 검을 눕혀서 휘두르는가 싶더니 도중에 비틀어 급소를 찔러오는 게 아닌가?
따끔할 정도의 통증이 벨리알을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네놈은 또 뭐지?”
무려 대악마가 일개 플레이어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크라우젤에게 있어서 대악마란 그저 더 좋은 아이템을 주는 몬스터에 불과했다. 벨리알의 질문을 가뿐히 무시한 그가 피아로를 부축했다.
“형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우 자네…”
피아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크라우젤의 검기가 예전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아본 것이다. 검호 시절의 자신과는 비할 바 없이 대단했다.
“자네가 드디어 검성의 경지를 이룬 겐가…!”
피아로는 처음부터 크라우젤을 높이 평가했었다. 자신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인물은 크라우젤이 유일하다고 보았을 정도. 크라우젤이라면 반드시 검성의 경지를 이룩하리라 믿었다.
한데 예상보다 시기가 더 빨랐다.
크라우젤의 재능이라는 건, 자신이 가늠한 것보다 훨씬 더 훌륭한 것이 아닐까 싶다.
주군 그리드의 재능처럼 말이다.
“형님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던 일입니다. 또한 그리드… 형님 군주의 도움도 컸고요.”
“허… 허허.”
본인의 노력과 재능조차도 타인의 덕으로 돌리는가.
정말이지 미워할 수가 없는 사내다.
자신은 이루지 못한 경지를 이룬 그를, 피아로는 시기하기보다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이거 나중에 꼭 대련을 해봐야겠군.”
“우선 대악마를 토벌한 후에 대련해보실까요? 아직 형님의 상대는 못 되지만 말이죠.”
이 순간, 크라우젤은 본인이 피아로보다 못하다고 명확히 말했다.
라우엘의 예상도 그랬다.
크라우젤의 검성 전직 시기는 국가대항전 PvP 결승전.
그의 현재 레벨은 높게 봐야 160이었다.
이는 크라우젤의 게임 이해도, 정보력, 사냥능력, 온갖 칭호 효과, 데빌슬레이어로 전직한 유라의 레벨 업 속도 선례를 모두 종합해서 내린 결론이다.
오로지 크라우젤이기 때문에 그 짧은 기간 동안 160레벨을 올리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고, 라우엘은 그를 ‘지극히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리드가 그렇듯, 크라우젤 또한 분석 불가의 인간임이 확실하다.
크라우젤은 320레벨의 서큐버스 50마리를 일거에 소탕해버린 바.
지금의 그는 160레벨이 아니라 200레벨을 훌쩍 넘겼을 수도 있다.
‘그래도 과연 희망이 있을까?’
피아로조차도 어쩌지 못하는 괴물이 바로 벨리알이다.
크라우젤의 레벨이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을지언정, 피아로보다 약한 그가 과연 벨리알을 위협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미 믿기로 결정한 바 있다.
크라우젤은 허황 된 말을 뱉는 유형의 인물이 아니다. 분명히 어떤 비책이 있을 것이다.
라우엘이 믿음을 품는 순간.
“감히 나를 무시하다니, 괘씸한 인간이로구나.”
크라우젤에게 어그로가 끌린 벨리알이 몸을 날렸다. 맹렬한 불꽃이 담긴 주먹과 발을 내지르며 크라우젤을 공격했다.
이를 초감각과 타고난 혜안으로 피해낸 크라우젤이 피아로와 데미안에게 파티를 걸었다.
파티 시스템은 NPC와 플레이어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시스템 중 하나.
망설이지 않고 파티를 수락한 피아로가 깜짝 놀랐다.
[당신의 경지가 파티장 크라우젤의 검기를 온전히 느낍니다.]
[<검성의 오러>가 완벽하게 적용됩니다. 적에게 가하는 피해량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검술 관련 스킬의 피해량이 2배 상승합니다. 파티가 유지되는 동안 지속됩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
[당신의 경지가 파티장 크라우젤의 검기를 어렴풋이 느낍니다.]
[<검성의 오러>가 소폭 적용됩니다. 적에게 가하는 피해량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파티가 유지되는 동안 지속됩니다.]
‘단지 파티를 맺는 것만으로도 버프가?’
이게 바로 전투 특화 레전드리 클래스의 위엄인가?
감탄을 금치 못하는 데미안에게 크라우젤이 소리쳤다. 벨리알의 연속되는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말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형님께 버프를!”
“아, 네! 빛의 가호!”
[파티원 피아로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명중률이 80퍼센트 상승합니다.]
“오오…!”
피아로는 힘이 넘쳐흘렀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감각이었다.
채앵-!!
더 이상 벨리알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방어를 시도, 피를 토하면서 한 걸음 물러난 크라우젤이 피아로에게 백아도를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 든 피아로가 어리둥절해졌다.
검사라면 자신의 생명과도 같이 여겨야할 검을 왜 내게?
의문은 금방 해소됐다.
“검호 시절의 극의를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이 무지한 아우를 개안시켜주십시오.”
“검호 시절의 극의…!”
무상검법.
동대륙 태생으로 전해지는 그 최강의 검술은 강력한 위력을 자랑했다.
무상농법 또한 무상검법을 기반으로 창조한 기술이었으나 아무래도 살생에 의의를 두는 검법과 비교하면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라우젤의 의도를 파악한 피아로는 망설이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이냐!”
크라우젤이 후퇴하자 기세가 올라서 덤벼오는 벨리알을 검 끝으로 겨냥하고, 시선과 검 끝이 하나가 되도록 만든 피아로가 허리를 크게 비틀었다.
“무상검법 종장.”
마치 피아로에게만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하다.
검과 하나가 된 채 멈춰 선 그는 홀로 초연했다.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벨리알의 격동적인 움직임을 마주하고도 일체 흔들리지 않았다.
“나에게 압도당하여 석상처럼 굳어버린 것이더냐!”
기세를 높인 벨리알이 외쳤고,
“파천(破天).”
하늘이 무너졌다.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벨리알과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을 정확히 노리고 검을 내지른 피아로에게 호응하여 멈춰있던 시간이 흘렀다.
콰작!
콰자자자자자자작!!
무너진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수백 가닥의 검기.
지옥의 풍경과 벨리알을 동시에 넝마로 만들어버린다.
“끄…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세 번째 비명.
절구질과 필멸에 이어서 또 한 번 강력한 피해를 입은 벨리알의 생명력 게이지가 처음으로 소모됐다.
실금처럼 미약한 수준에 불과하였지만, 이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꾸욱.
피아로로부터 백아도를 돌려받은 크라우젤이 허리를 크게 비튼다.
그 자세, 마치 조금 전의 피아로를 보는 듯하다.
“검술 창조.”
현존 최강의 검사.
“파천(破天).”
지난 날 최강 검사의 힘을 계승한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또 한 번 무너져 내리는 하늘 아래서, 벨리알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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