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17화
신영우는 생각한다.
‘헬가오에게 화석이라는 약점이 있었던 것처럼, 벨리알에게도 약점이 존재하지 않을까?’
대악마의 터전은 지옥이다. 그들이 인간계에서도 온전한 힘을 발휘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실제로 헬가오라는 선례가 있었듯, 벨리알 또한 페널티를 안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약점을 내가 찾아야 된다.’
현장의 템빨단원들이 벨리알을 상대하는 동안 자신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입장.
당장 현장으로 달려갈 수 없음을 초조해하지 말고, 현재 자신의 입장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한다고 영우는 믿었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벨리알을 철저히 관찰했다. 그녀의 전투적인 능력은 물론이고 말투와 행동, 심지어 표정과 시선까지 빠뜨림 없이 좇았다.
올바른 판단이다.
그리드가 되어서 쌓아올린 모든 성장이 신영우의 실제적인 양분이 되고 있다.
한편, 영우에게 끌려와 곁에 앉은 세희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오빠와 나란히 앉아 보는 게 대체 얼마만인지… 그녀는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하지만 즐거움은 잠시였다.
옛 추억을 회상하며 흐뭇해하던 세희가 갑자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도톰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TV속 대악마가 거의 나신이었던 까닭이다.
홀딱 벗은 채, 중요 부위들만 불꽃으로 살짝 가린 수준!
누가 봐도 최소 17금이었다!
“좋아?”
“응?”
다짜고짜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는 여동생 때문에 영우만 어리둥절해졌다.
나이 차 많은 동생이란 어렵다.
***
국왕의 첫째 도리는 백성의 보호다.
이는 국왕과 백성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원칙이다.
하지만 아스란 국왕은 원칙을 어겼다. 지켜야할 백성을 도리어 악마의 제물로 바쳐버렸다.
왕의 권위를 스스로 버린 셈이다.
서대륙 역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대사건이었다.
“왕이 내 딸을 죽였다!”
“왕이 내 누이를 죽였다!”
“왕이 내 친구를 죽였다!”
“왕은 죽었다!!”
“아스란은 왕이 아니다!!”
성벽으로 가로막힌 궁전 외곽.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들이 아스란을 증오하고, 비난하며 저주한다.
라인하르트의 하늘을 가득 물들이고 있는 새카만 연기.
9,999명의 죄 없는 처녀들이 화형당한 잔재다.
이에 분노하고, 오열하고, 절규하는 백성들을 아스란 국왕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저주도 한 귀로 가볍게 흘렸다.
나라를 말아먹는 것보다야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일개 소국의 백성인 것과 대륙 제일 국가의 백성인 것은 다르다. 오늘날 나의 결단 덕분에 너희들의 미래가 찬란해질 것임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자신의 어긋난 행동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합리화시키면서 대악마를 소환한 아스란 국왕.
그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거대한 절구를 목격하고 질색했다.
쿠구구구구구구구궁!!
“허억…!”
이게 바로 신의 징벌인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죄의식이 엄습해오면서 아스란 국왕은 혼절했다.
“…하!”
“전하!”
“전하아!!”
“…”
익숙한 목소리가 아득히 들려온다.
번쩍 눈을 뜬 아스란 국왕이 주변을 살핀 후 안도했다.
척슬리의 얼굴을 보아하니 다행히 지옥은 아닌 듯하다.
“내가 살아있었군… 하늘에서 떨어졌던 그 절구는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아스란 국왕을 부축해서 일으킨 척슬리가 설명했다.
“템빨단원이 사용한 기술이었습니다. 대악마의 팔 하나를 날려버렸습니다.”
“뭣이…!”
지옥 최강의 군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아니, 벨리알은 최강이 아니라 고작 32위의 대악마.
불안감에 휩싸인 아스란 국왕이 황급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벨리알이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기도 전에 비명횡사한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것이다.
콰콰콰쾅!!
쿠르르르르릉!!
창밖으로 보이는 궁전의 풍경은 난리도 아니었다. 곳곳이 폐허가 되어있었고 아비규환이다.
화염을 내뿜는 대악마 벨리알과 템빨단원들이 치열한 공방 중이었다.
아니, 자세히 보아하니 일방적인 전투다.
벨리알이 템빨단을 학살하고 있었다.
“하…! 하하하! 그럼 그렇지!! 대악마가 쉽게 당할 리가 없지!!”
그래, 벨리알.
소환 된 이유를 잊지 마라.
나의 왕국을 수호하고 외적을 물리쳐라!
‘그리고 에트날을 대륙 최강의 국가로 만들어라!’
불끈, 주먹을 말아 쥐면서 대악마를 응원하는 아스란 국왕의 눈빛에 강렬한 살기와 광기가 깃들고 있었다.
이를 발견한 척슬리가 흠칫 놀랐다.
‘국왕전하께서 변하셨다.’
본래부터 옳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의는 품고 있었음을 안다.
그의 죄악들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래도 국왕으로써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스란 국왕은 미쳐가고 있었다.
‘…끝.’
내 선조들이 흘린 피와 땀으로 지켜진 나라가 최후를 맞이하고 있음을, 척슬리는 깨달았다.
***
“천룡의 눈물!”
쿠르릉!!
쏴아아아아아아아아-!
크라우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틴다.
퇴각 명령을 철회한 라우엘이 피아로, 이사벨, 맥스옹을 비롯한 템빨단원들과 함께 사투 중이었다. 병사들만 후방으로 물려놓았다.
<흐름의 주인>의 궁극기 날씨 변화.
하늘에서 천둥과 폭우를 내린 그가 대악마 벨리알이 내뿜는 불꽃의 기세를 약간이나마 죽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