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14화
지옥을 지배하는 33 대악마.
이들의 막강한 힘에 대해서 서술한 고서와 문헌은 무수히 많다.
대악마가 지상에 한 번 출몰할 때마다 몇 개의 왕국이 멸망하고 인류는 위기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대악마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아스란 국왕 또한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잖은가.
나라를 부흥시키겠답시고 패륜까지 저질러 왕위에 올랐건만, 도리어 나라가 멸망하게 생겼다.
결코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다.
‘지하의 형에게 더욱 더 면목이 없어진다.’
이토록 허무하게 나라를 빼앗길 수는 없다. 차라리 악마에게 의지하는 편이 낫다.
점차 생각이 기울어져가는 아스란 국왕의 귓가로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의 이기심, 불안, 후회, 절망, 공포, 분노 모든 감정이 마음에 든다. 내게 순결한 피를 바쳐라. 나를 지상으로 초대하라. 그 대가로 나는 너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노라.”
‘대악마…!’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낡은 빗.
브누아 황자에게 전달 받았던 대악마 소환 도구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다.
남성의 것인지, 여성의 것인지, 아이의 것인지, 노인의 것인지 분간이 안 된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나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스란 국왕은 한없이 두려웠다. 인간의 목숨 따위 티끌처럼 하찮게 여길 대악마가 내 귓가에 속삭이고 있다고 생각하자, 본인의 목숨줄이 썩은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언제라도 댕강하고 맥없이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공포와 비례할 정도의 강렬한 유혹이 아스란 국왕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너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노라.
‘소원을 들어준다고?’
대악마의 마지막 한 마디가 여름밤의 반딧불처럼 계속, 끊임없이 귓전을 맴도는 것이다.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던 아스란 국왕이 꿀꺽, 마른 침을 삼키더니 확답을 요구했다.
“정녕… 정녕 내 소원을 들어주시겠다는 거요?”
“나는 지옥의 33패자 중 하나. 스스로의 명예를 깎아내려 다른 패자들에게 비웃음 살 생각은 없다. 내 약속은 절대적으로 실현 될 미래노라. 자, 말하라. 네가 원하는 것은 뭐지? 영원한 젊음? 무한한 재물? 절세의 미녀?”
전부 틀렸다.
아스란 국왕이 바라는 것은 영생도, 재물도, 미녀도 아니었다.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나의 왕국을 대륙의 패자로 만들어주시오! 나의 후손들만큼은 나와 같은 모멸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소! 나는 우리 왕가의 핏줄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찬양 받기를 원하오!!”
“…뿌리 깊은 열등감은 늘 달콤한 결과물을 낳는군. 큭큭, 좋다. 그 소원 접수하였노라.”
이제 대가만 치르면 된다.
9,999명의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대악마를 지상에 강림시키는 것!
마음을 확실히 정한 아스란 국왕이 어명을 내렸다.
“처녀들을 모아라!”
[<대악마 소환(종장)>퀘스트가 곧 완료 됩니다.]
“헤헷.”
퀘스트 스토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중인 흑마법사 로제는 너무 신났다.
***
“짧지만은 않은 세월이었다. 영원의 윤회 못지않게 고단했다.”
라우엘이 그리드를 따른 지 햇수로 2년이 지났다. Satisfy 시간으로는 무려 6년이다. 그동안 라우엘이 해온 일은 무수히 많다.
그리드에게 체다카 길드를 인수하여 템빨단을 세우라고 종용했고, 이후의 행보를 제시하여 그리드와 템빨단이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본인은 템빨단의 전반적인 운영을 맡아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확장시켰다.
만약 라우엘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리드와 템빨단은 존재하지 못했을 거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우엘은 감회가 깊었다.
‘나의 운명의 데스티니이신 주군을 섬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라우엘이 그리드를 섬기겠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대장장이 능력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리드의 대장장이 능력이라면, 무수히 많은 인재들을 회유하고 거대한 길드를 세워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으리라 보았었다.
하지만 그리드라는 인물은 라우엘의 기대를 아득히 초월했다.
그리드의 노력하는 재능은 독보적인 것이었고, 이를 토대로 그리드는 대장장이 능력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탁월한 성장을 일구었다.
덕분에 템빨단은 라우엘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대해졌다. 나라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
‘이제 단 한 걸음 남았다.’
눈앞의 라인하르트만 정복하면 된다.
규모는 레이단보다 1.5배 더 크고 인구는 무려 80만에 육박하는 일국의 왕성!
끝없이 펼쳐진 성벽과 해자로 둘러싸인 그곳은 위용이 남달랐다. 100만 대군이라도 막아낼 것 같은 구조였다. 하지만 라우엘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의 라인하르트, 속 빈 강정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라인하르트의 모든 병력은 템빨단 영토 침략을 목표로 출병한 상태였다.
‘현재 라인하르트에 주둔 중인 병력은 1만 이하.’
이는 치안대와 경비대, 그리고 왕실 기사단의 숫자를 어림잡아 추론한 것이고, 정확한 숫자는 8천 내외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 <양산형 그리드 세트>로 도배한 3천의 정예병을 이끌어온 이쪽의 전력은?
라우엘, 페이커, 이벨린 등의 템빨단 상위 실력자들과 전쟁터에서 최강의 무기로 변모하는 <다인슬레프>를 무장한 쥬드.
그리고 ‘전쟁을 억제하는 힘’, Satisfy계의 핵무기로 통하는 대마법사 아슈르 백작과 그의 아들 블란드가 있다.
그뿐이랴?
“세이렌에서부터 원군이 도착하였습니다!”
“수, 수인족 왕 맥스옹 전하께서 친히 출정하셨습니다!”
“맹우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달려왔소.”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를 애먹였던 절대강자 맥스옹.
이제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회복한 그가 수인족 전사 500명을 직접 통솔하여 라우엘 군대에 합류했고,
“피아로님께서도 복귀하셨습니다!”
“바다에서도 자라는 콩을 개발하였는데 맛이 없더군… 수인족들이 줘도 안 먹어.”
전설의 농부.
그리드를 초월하는 템빨단 최강자 또한 돌아왔다.
끝이 아니다.
“레베카 교황청에서부터 원군이 도착하였습니다!”
“워, 원군은…!”
“교황성하께서 친히!!”
“다들 하이요.”
“그리드님은 어디 계시죠?”
최강 플레이어의 반열에 오른 데미안.
유용한 광역 버프기를 다수 보유하여 템빨단의 정예병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될 그가 <레베카의 딸> 이사벨과 함께 합류하였고,
“페드로에서부터 원군이 도착하였습니다!”
“크리스 백작님과 그의 가신들입니다!”
“그리드의 나라를 세우는데 일조하면 아이템 제작의뢰를 자주 맡아주겠다고? 그렇다면 돕지 않을 이유가 없지.”
데미안과 동급의 강자인 크리스와 템빨단 상위전력과 맞먹는 자이언트 길드의 7대장들 또한 합류했다.
쟁쟁한 인물들을 쭉 훑어 본 라우엘은 확신했다.
“지금의 라인하르트 따위, 나의 봉인 된 힘을 해방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을 터.”
이게 다 각지의 템빨단원들이 활약해준 덕분이다.
코크로 섬의 극검, 바이란의 유라와 폰, 보르네오의 카츠, 파트리안의 지슈카를 비롯한 템빨단원 한 명, 한 명이 라우엘의 기대보다 훨씬 더 큰 활약을 펼쳐주었다.
덕분에 에트날군은 병력 손실이 커졌고 라인하르트가 텅텅 빌 수 있었다.
‘다들 너무 훌륭합니다.’
라우엘은 모두가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리드의 서대륙 귀환이 빨라졌다는 점.
이번만큼은 그리드 없이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지만, 결국 또 그리드에게 의지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지금 위험하신 상황 같은데.’
바이란의 상황을 물었던 그리드.
그는 이후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바이란을 탈환해야겠다는 책임감을 갖고 바이란을 홀로 침공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쯤 10만 대군에게 둘러싸인 채 옴짝달싹 못하고 계실 가능성이 높다.’
제아무리 그리드님이라도 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 위험하실 수도 있다.
서둘러야한다. 한시라도 빨리 라인하르트를 점령하여 바이란에 주둔 중인 에트날 본대를 회군시켜야한다.
강한 책임감에 휩싸인 라우엘이 소리쳤다.
“전군 돌격하십시오!”
“쥬드. 간다. 성벽. 부순다.”
“농사짓기 좋은 땅이군.”
“이 뜨거운 감자가 식기 전에 돌아오도록 하지.”
“그리드님은 왜 안 보여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사벨 쨩도 아름답다는.”
“….어째 요상한 놈들만 모였군.”
크리스의 감상대로 정상인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최강자들이었다.
진격의 기세가 하늘을 찌른다.
쿵! 쿵! 쿵!!
압도적인 체력을 자랑하는 냥멍이의 초대형 펫들이 라인하르트 성문을 가차 없이 때렸고,
“저항하는 자는 죽일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는 아슈르 백작이 성벽 위 궁병대에게 광역 마법을 전개, 그들이 활을 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