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13화
아름다운 미소는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유명 배우가 했던 말이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미소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습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맞는 말이다.
웃는 모습은 누구나 예쁘다고?
틀렸다.
불행하게도, 웃는 모습이 예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그리드였다.
과거의 그가 웃을 때면 사람들은 불쾌함을 느꼈을 정도이다.
단순히 못생겼었기 때문에?
아니다.
웃을 이유가 없는 삶을 살아왔던 그리드에게 있어서 미소란 낯선 개념이었고, 미소를 지을 때면 표정이 어색해졌다. 그게 결정적인 마이너스 요소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소중한 인연을 하나둘씩 늘려가고, 책임이 필요한 자리에 오르는 과정 속에서 그리드는 차츰 미소에 익숙해져갔다. 이제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미소를 그릴 수 있었다.
바뀐 인생이 그에게 선사한. 아니, 그리드 스스로가 쟁취한 선물 중 하나다.
“나는 실망시키지 않겠다.”
태양처럼 찬란하고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이와 같이 선언하는 순간.
욱씬!
에트날의 비정규군 병사들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피가 끓어올랐다.
에트날 왕국의 최하층민과 평민들.
이들은 군주에게 늘 실망만 해왔었다. 아니, 애초에 어떤 기대조차 품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군주란, 백성을 혹사시키고 착취하여 본인의 배를 불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모든 군주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들이 보고 겪은 군주들은 그랬다.
하지만 그리드는 어떻게 봐도 다를 것 같았다. 그가 보여준 행동, 들려주는 억양, 짓고 있는 표정 모든 면에서부터 강한 신뢰가 느껴졌다.
“대대손손 따르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제 가족들도 데리고 올게요!!”
“그리드님 만세!! 그리드님 만세!!!”
“…”
빗발치는 환호 속에서, 그리드는 강한 동정심과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사막도시 레이단의 백성들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절망하는 자들.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하여 좌시할 수가 없다.
‘당신들에게도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겠어.’
물론 자원 봉사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아무 것도 안 하고 쟁취할 수 있는 행복이란 없다.
그리드는 이들 모두에게 합당한 역할을 맡길 예정이었으며 이를 토대로 당연한 이득을 취할 계획이었다.
‘6만 명의 인력…!’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노동력과 세금을 확보하게 된 셈!
“좋아. 아스모펠, 적의 잔당들은 알아서 처분하고 이후 바이란을 정비해라. 여기 있는 다섯 명이 당신을 보좌할 거다.”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힘차게 말하는 그리드에게 아스모펠이 깊이 고개 숙였다.
“분부 받들겠습니다.”
그리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최하층민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 바이란의 운영을 아스모펠에게 맡긴 일은 엄청나게 절묘한 것이었다.
일개 병사 체험을 해온 아스모펠, 이제 그는 누구보다도 최하층민들의 마음을 잘 헤아렸고 이들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야 효율적인지 알고 있었다.
“로그아웃.”
접속 제한 시간에 걸린 그리드가 게임을 떠났다.
***
‘의외로 쉬웠어.’
전투 말미에는 아찔하기도 했었다.
예상치 못한 실력을 선보인 루실리브 공작에게 잠시 발목을 붙잡혔을 당시.
적군의 집중 공격을 모조리 허용해버린 까닭에 그리드는 무적 패시브가 발동해버렸다. 루실리브 공작이 만약 조금만 더 버텼다면, 주검이 되는 쪽은 루실리브 공작이 아니라 그리드였으리라.
<흑화>의 ‘총 생명력 50퍼센트 하락’ 페널티는 과연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전력을 다했더라면 보다 더 수월하게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거라고, 그리드 신영우는 단언한다.
1대 10만의 전투는 예상보다 쉬웠다고 자평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혼자만의 힘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신영우도 알고 있었다.
‘아스모펠의 도움이 컸겠지.’
따뜻한 우유에 코코아 분말가루를 녹이며, 창가에 기대 서는 신영우.
그는 나중에서야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스모펠이 에트날군 병사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점. 에트날군에 자신을 위협할만한 강자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
아스모펠의 암약 덕분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다가 오늘 내게 충성을 맹세한 6만 이상의 병력은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었고.’
켜놓은 TV에서는 바이란 종전 소식과 함께 파트리안, 코크로 섬, 보르네오의 전쟁 영상이 번갈아가면서 중계되고 있다.
동료들과 부하들이 각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눈에 담은 영우의 마음이 충만해졌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주고 있구나.’
슬슬 때가 온 것 같다.
‘이번에 전쟁이 끝나면 왕위에 올라야겠어.’
그래, 왕이 될 타이밍이다. 시기적절하다.
단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따르고 섬기는 모든 이들에게 보람을 느끼도록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국호는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다.
‘템빨국.’
템빨러, 템빨단이 세우는 나라이니만큼 국호는 당연히 템빨이다.
그렇다면 그리드라는 왕을 상징하게 될 왕호는 무엇이 좋을까?
‘…템빨왕!’
꾸욱!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쥐고 있는 영우의 손에 강한 힘이 실렸다.
스스로 떠올려낸 왕호가 너무나도 멋져서 전율하는 것이었다.
***
『홀로 10만 대군에 맞서는 선택을 내린 그리드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그랬죠. 그리드가 스스로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다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드의 허무한 죽음을 예견했었습니다.』
『한데 그리드가 바이란을 탈환했다면서요?』
『단순히 탈환한 것에 그치지 않고 10만 대군 중 최소 6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을 흡수했다고 합니다. 그리드가 루실리브 공작의 목을 벤 직후, 6만의 병사가 일제히 그리드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였다더군요.』
『그 동영상 저도 봤습니다. 소름 돋는 장면이었죠. 인터넷 조회수가 반나절 만에 2억을 돌파했다고…』
『에트날군의 잔당들이 그리드에게 복종한 계기가 뭘까요?』
『그리드가 바이란의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홀로 10만 대군에 맞서는 모습을 보고 감명 받은 것은 아닐까 추측합니다. 또한 그리드는 이리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요.』
『그리드가 에트날군 병사들을 흡수할 의도로 10만 대군에 맞섰단 말씀이신지?』
『그렇지 않을까요? 그리드의 명석함을 우리가 섣불리 추측해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궁금한 게 있습니다. 천외천 크라우젤 또한 10만의 대군을 돌파해서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을까요?』
크라우젤이 그리드보다 강하다는 것은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가대항전에서 공식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하여 화두에 오르는 것이다.
그리드도 해낸 일이라면 크라우젤도 해내지 않을까, 하고.
『크라우젤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의 대인전 능력은 그리드 이상이라고 하나 다수의 공격을 견뎌낼 방어력과 체력은 없을 것 같아요.』
『또한 단순 공격력과 돌파력만 놓고 보면 그리드가 크라우젤보다 확실히 위죠. 다수를 상대하는 전쟁에서는 크라우젤보다 그리드가 뛰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각국 언론들이 그리드 찬양에 열을 올린다.
이번 전쟁에서 그리드가 보여준 활약은 의심의 여지없이 완벽하고 대단한 것이었다.
군신 아레스 또한 인정했다.
“훌륭하네.”
바삭하고 짭짜름한 감자칩을 입에 왕창 넣고 씹다가 콜라를 병째 들이키는 중년인.
까칠까칠한 수염에 잔뜩 묻은 감자칩 가루를 손등으로 슥, 닦아낸 그가 곁에서 미간을 좁히고 있는 측근 스캇에게 요구했다.
“냉장고에서 콜라 꺼내다줘.”
“그것 참 태평하시군요. 지금 콜라가 목에 넘어갑니까?”
발끈한 스캇이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겠습니까? 유저 최초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그리드에게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우리 아레스 군단은 지금 당장 에트날을 지원해야 합니다!! 템빨단이 일구게 될 모든 것들을 짓밟아놔야 한다고요!!”
템빨단의 활약은 스캇을 비롯한 아레스 군단원들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Satisfy 오픈 직후부터 지금까지, 아레스 제국 건설을 꿈꾸며 쉬지 않고 달려왔던 그들이다.
다른 랭커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부와 명예를 거머쥐며 즐기고 있을 때,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오지를 떠돌아다니며 전쟁을 반복했고 죽어라 고생만 해왔다.
플레이어 최초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당연히 아레스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노고를 보상받는 것이다. 라고, 아레스 군단원들은 생각했다.
꽈드득, 이를 갈며 TV속 템빨단원들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스캇에게 아레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와 에트날 사이에는 제국이 있어. 그리고 우리는 제국과 전쟁 중이라고. 우리가 무슨 수로 에트날까지 군을 움직이지?”
“굳이 군대를 움직일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와 럭 등의 소수정예만 파견하셔도 저딴 놈들 따위 충분히 방해할 수 있습니다!”
“거참.”
벅벅, 사타구니를 긁다가 소파에서 일어난 아레스가 팬티 속에서 꺼낸 손으로 스캇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의욕적인 것도 좋지만, 우리의 목표는 사하란 제국이라는 걸 잊지 마라. 당장 눈앞의 손실에 집착하다가 대의를 놓치지 말란 말이야.”
냉장고에서 콜라를 꺼내 마신 아레스가 꺼윽, 트림한 뒤 캡슐에 누웠다.
“전쟁 영상 봤지? 루실리브 공작이라는 사령관은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좁은 시가지에서 10만의 대군을 운용할만한 통솔력이 전무했어. 실제로 그리드는 10만대 1의 전투를 벌인 게 아니라 수천 대 1의 전투를 벌인 셈이야. 하지만 세상은 자세한 내막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그리드를 10만 대적자라고 찬양하고 있지.”
“…”
“그 허풍 섞인 명성에 사하란 제국도 속아 넘어갈 거다. 그리드를 경계하기 시작할 거야. 우리는 그 틈을 노려야하고.”
최초의 왕?
놓치고 싶지 않은 칭호였으나 굳이 집착하지는 않겠다.
이쪽은 사하란 제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리드, 더욱 더 분발해 달라고.’
그렇게 미쳐 날뛰다보면 아그너스의 관심까지 끌게 될 것 같으니, 여러모로 쓰임새가 좋은 패다.
큭큭, 웃음을 흘리며 Satisfy에 접속하는 아레스.
그가 보유하고 있는 무수한 칭호 중에는 <최초의 1만 학살자>와 <최초의 2만 학살자>가 있었다.
그리드와 지슈카가 대량의 적군을 학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한 칭호를 얻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
템빨단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기술력과 자원 부족으로 인해서 공성병기를 생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공성병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단지 대장장이 기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분야의 기술과 재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늘 고민하던 라우엘은 어느 날 논밭에서 냥멍이를 발견했다.
각종 가축들을 개량해서 레이단의 농업 능률을 극도로 상승시킨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 냥멍이.
<펫 마이스터>인 그에게 라우엘이 질문했다.
혹시, 초대형 몬스터를 조련해서 공성병기로 활용할 수 없겠느냐고.
본래 초대형 몬스터는 완벽하게 조련할 수 있는 영역의 몬스터가 아니었지만, 냥멍이는 몬스터 테이머계의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였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을 품고 질문해본 것이다.
그리고 냥멍이는 순진무구했다.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펫 마이스터는 비룡보다 배는 더 큰 초대형 몬스터를 완전히 복종시키고 교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 대가는 컸다.
냥멍이는 기존에 자신이 소중하게 키워왔던 고양이형 몬스터와 강아지형 몬스터들을 죄다 야생에 풀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마리당 펫 인벤토리 자리를 무려 3개씩이나 차지하는 초대형 몬스터들을 조련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우리 귀여운 아기들… 야생에 적응 못해서 굶고 있는 건 아니겠지?’
특히 짧은 꼬리 고양이 순자가 걱정이다. 워낙 까칠하고 도도한 아이인지라 평생 짝을 못 만나고 쓸쓸히 늙어죽을 것 같았다.
‘이 아빠가 그리워서 울고 있는 건 아니길 바란다… 크흡!’
왕성 라인하르트로 진군하는 길.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서 훌쩍이는 냥멍이를 템빨단원들이 격려해주었다.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아무렴 걔들도 몬스터 출신인데 야생에서의 생활이 훨씬 더 즐겁고 좋겠죠.”
“맞아. 몬스터는 야생에서 커야지. 지금쯤 신나게 뛰어 놀면서 삶을 만끽하고 있을 거라고.”
냥멍이의 표정이 더욱 더 어두워졌다.
“…일리가 있군요. 하긴, 늘 제 곁에 있는 것보다야 자기 친구들하고 노는 게 그 아이들은 더 즐겁겠지요. 맞네요. 그 아이들은 저를 떠남으로써 행복을 되찾은 거군요. 그동안 저는 그 아이들의 행복을 빼앗아왔던 거고요.”
“…”
템빨단원들의 얼굴이 굳었다.
헐리웃에서 나름 명성을 떨치고 있는 한국인 배우 김두현.
사회적 입지가 상당한 만큼 정상인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역시 템빨단원답게 그 또한 성격이 피곤했다.
그리드, 라우엘, 후로이, 레가스, 극검, 반트너, 툰, 카츠 등.
우리 길드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은 왜 죄다 상태가 요상한 걸까?
‘무슨 저주라도 걸렸나?’
‘한국 가서 굿이라는 거라도 해봐야…’
템빨단원들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사이, 군대는 어느새 왕성 라인하르트에 가까워졌다.
선두의 라우엘이 총사령관의 권한으로 외쳤다.
“위대하신 그리드 각하의 강병들이여, 전쟁을 앞둔 그대들의 영혼에 무신이 강림하사 혈관 속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므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휴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법. 서리 여왕의 숨결을 떠올리며 피를 차갑게 식혀주길 바랍니다. 일단 자리에 멈춥시다.”
“…아.”
아니, 그냥 멈추라고 명령하면 안 되나?
굳이 꼭 헛소리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건가?
어쩌면, 라우엘은 전선 사령관으로서는 부적격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유형의 사령관이다.
뭐가 어찌됐든 라우엘은 큭큭큭! 얼굴의 절반을 한쪽 손으로 가리며 웃고 있었다.
‘텅텅 빈 라인하르트…’
이틀 내로 정복하여 그리드님께 바치겠노라.
라우엘은 자신의 라인하르트 침공 타이밍이 완벽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브누아 황자의 등장.
“처녀들을 모아와라!”
라인하르트 성벽 위.
저 멀리 보이는 템빨단의 군대를 확인한 아스란 국왕이 결심했다.
‘대악마를 소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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