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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94화 (389/1,794)

템빨 27권 - 11화

무엄하다. 괘씸하다. 불쾌하다. 모욕적이다.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다!’

그리드와 대면한 루실리브 공작의 감상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선왕 비스바덴의 친동생이며, 당대 국왕 아스란의 작은 아버지 되시는 분이다. 에트날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란 뜻.

아니, 굳이 혈통을 논하지 않더라도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권력가다. 대제국 사하란의 명망 높은 귀족들조차도 자신을 대우해줄 정도였다.

‘한데 족보도 없는 놈이 감히 나를 모욕하고 겁박해?’

이해도, 용납도 안 되는 태도다.

“그리드…! 언동이 무척 천박하지 않은가! 천륜을 저버린 금수는 기본적인 예절조차도 모르는 겐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루실리브 공작이 포효하듯 외치자,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개새끼한테 갖출 예절은 있어도, 쓰레기한테 갖출 예절은 없는데? 그리고 천륜이 뭔 뜻이야? 괜히 있어 보이려고 어려운 말 쓰지 마라.”

“이, 이익…!”

또! 또! 또다!!

고귀한 자신에게 쓰레기라는 표현을 사용하다니?

어찌 저런 발상이 가능한 것인지, 뇌구조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못 배워먹은 천한 놈들은 왕가의 혈통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사태의 심각성을 망각하고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루실리브 공작.

그에게 그리드가 묵색의 장검을 겨누었다. 아니, 날과 손잡이의 구분이 없는 것을 보아 장검이 아닌 목검 같다.

루실리브 공작의 긴장이 풀려버렸다.

‘그렇군. 네놈이 감히 나를 해칠 수는 없겠지. 내게 굴복하거나 나를 인질로 삼지 않는 이상 자신도 결국 죽게 될 테니까.’

“루실리브 공작각하!!”

“공작각하를 지켜라!!”

“우와아아아아아!!”

루실리브 공작과 그리드가 대면하고 있는 이 순간.

바이란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에트날군이 몰려들었고, 그리드는 9만의 대군에게 포위된 형국에 이르렀다.

누가 봐도 그리드의 위기였다. 루실리브 공작은 그리드를 철창 안에 갇힌 맹수쯤으로 인식했다.

“저항조차 못하는 약자의 입장을 체험해보라고? 그 어처구니없는 체험은 내가 아니라 그대가 하게 될 것이야.”

병사들이 이동하면서 일으킨 흙먼지를 차단하고자, 손수건을 꺼낸 루실리브 공작이 입과 코를 가리며 말한다. 과연 대귀족답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고상했다.

반면, 늘 치열한 삶을 살아온 그리드에게 있어서 흙먼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한 것도 먹어온 그리드다.

“두고 보면 알겠지.”

콰치지지직!!

루실리브 공작이 목검이라고 오해 중인 그것.

<+7검은 귀신>에 그리드로부터 전이 된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루실리브 공작을 비롯한 에트날군 병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눈을 의심했다.

“아, 악마…?”

조금 전, 그리드가 이곳에 막 도달했을 때는 마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를 등진 그리드는 그늘에 가리어졌기 때문에 모습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그리드를 뒤덮었던 그늘이 사라지자 그리드의 모습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넘실거리는 칠흑의 기운.

그와 상반되게 새하얗게 질린 피부.

검게 물든 흰자위와 붉게 물든 눈동자.

고서에 묘사되어 있는 악마와 분위기가 흡사하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그리드 공작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였던 건가?”

“저자가 어찌 저리도 강한 것인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술렁이는 병사들.

뒤늦게 시가지를 돌파하고 그리드의 곁으로 도착한 아스모펠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드님을 선망하던 병사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드님이 악마라는 오해를 벗겨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아스모펠이 우왕좌왕하는 그때였다.

병사들에게 괜히 오해 받아서 좋을 것 없다는 판단을 내린 그리드가 <성스러운 빛의 왕관>을 머리 위에 걸쳤다.

최강의 뱀파이어라는 마리로즈를 봉인했던 교황 프렌즈가 사용하던 왕관.

그 성스러움은 이루 말 할 수가 없다. 그리드가 내뿜고 있는 마기조차도 성역의 흔적처럼 보이게 만들 지경이다.

“아아…”

그리드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이 또 한 번 바뀐다. 선망과 두려움을 지나, 이제는 경외의 시선을 보낸다.

이를 확인한 그리드가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파그마의 검무, 연살파(聯殺波).”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질풍처럼 휘몰아치는 칠흑의 검기가 루실리브 공작을 노리고 날아간다.

그것도 두 번 연속으로!

“한 번 더 연살파(聯殺波).”

-?

영상이 리플레이 된 건가?

시청자들이 잠시 혼란에 빠졌다.

***

굳이 <서대륙>이라는 대단위가 필요할까?

대륙에 총 17개의 국가와 다양한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는 하나, 결국 모든 곳에는 사하란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던가.

서대륙 자체를 사하란 제국이라고 봄이 옳다. 라고, 일부 학자들이 염세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그만큼 사하란 제국의 국력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이 제국에 공물을 바쳤고, 제국의 문화를 배웠으며, 일부 작은 국가들은 왕위 세습조차도 제국의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내 대에서는 대륙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에트날 왕국이 제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다른 국가들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에트날 왕국의 제14대 국왕 아스란.

그는 왕자 시절의 절반을 제국에서 유학했다. 물론 원해서가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었으며, 유학시절 내내 제국의 귀족들과 황족들에게 큰 모멸을 당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에게는 이 모멸감을 대물림하기 싫다는 생각을 품었다. 세상을 바꿔야한다는 결심을 내렸다.

그의 포부는 장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죽은 친형 렌의 희생을 허투루 만들 생각이 없었다.

친형까지 죽여가면서 왕이 된 만큼, 반드시 위대한 업적을 남길 각오였다. 애초에 자신감은 있었다. 형보다 내가 더 낫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차지한 것이다.

‘첫 번째 목표는 에트날 왕국을 완전한 중립국으로 세우는 것.’

경제, 군사,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서 압박을 행사할 수 있는 제국에게 항거할 정도의 자립성을 갖추는 것이 당면한 과제다.

아스란 국왕은 판단했고, 그렇기에 그리드에게 집착했었다.

그리드가 왕실에 충성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위험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관계를 가능한 좋게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들의 염려대로 그리드는 반란을 일으켰다. 더욱 더 최악인 사실은, 에트날의 유일한 믿을 구석인 아슈르 백작조차도 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는 점이다.

이에 아스란 국왕은 절망했다.

힘을 쌓아보기도 전에 도리어 힘을 잃게 되었으니, 에트날은 이대로 패망의 길을 걷게 되리라 보았다.

‘형님의 죽음을 그리드에게 뒤집어씌울 수밖에 없었던 정황이 원망스럽군.’

지난 몇 달 동안, 에트날은 실시간으로 쇠락해가고 있다.

그리드에게 빼앗긴 영토들을 탈환하고자 왕국의 자금 대부분을 군비로 돌렸고, 어렵사리 키워온 병사들과 나라의 미래인 젊은이들을 전쟁으로 내모는 중이다.

그리드에게 단죄를 내리고 영토들을 탈환하는데 성공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나라가 폐허가 될 진데!

“큭큭… 나 또한 무능하구나.”

아스란 국왕의 마음에 깊은 병이 생긴다.

그가 친형을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던 이유, 마음속에 대업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업이 물거품 되게 생기자 친형을 해친 명분이 사라졌고, 이는 큰 죄악이 되어서 아스란 국왕의 마음을 썩고 병들게 만들었다.

연거푸 술잔만 기울이고 있는 그의 화려한 침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왕의 침실을 두드릴 수 있도록 허락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들어오시오.”

쇠 긁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아스란 국왕.

그의 허락을 듣고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검호 척슬리였다.

에트날 최고의 검사이며 에트날 왕실을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뛰어들 충신이다.

또한, 아스란 국왕이 렌 왕자를 시해한 진범임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제국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척슬리에게 아스란 국왕이 냉소했다.

“나를 왕으로 만들어준 것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했을 텐데, 아직도 부족하다던가? 아~ 그렇군. 용케도 일개 병사에게 사망하신 솔로 넘버 나이트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촉구하러 온 건가?”

국왕이 되고자 제국의 힘을 빌리면서, 아스란은 생각했었다.

내가 제국에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제국을 이용하는 거라고.

하지만 이제 상황은 역전이 되어버렸다. 평생 영원토록 제국의 꼭두각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운명이다.

“큭큭… 지하의 선왕께서 원통해하시겠군. 제 형을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놓고도 결국 나라를 말아먹게 생긴 못난 아들을 보노라면 어찌나 슬프시겠나.”

“전하, 언동에 주의를.”

척슬리는 렌 왕자를 시해한 아스란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아스란을 섬길 수밖에 없다. 결국 아스란은 왕이 되었고, 자신은 왕실에 충성을 바쳐야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아스란의 혼잣말을 혹여 누가 들을까봐 염려하는 척슬리. 주변을 살피는 그를 지켜보는 아스란 국왕의 가슴이 지끈거렸다.

‘무능한 주인들만 만나서 재능을 썩히고 있는 그대가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척슬리는 오직 스스로의 능력으로 검호의 경지를 달성한 인물이었고, 이런 경우는 제국에도 흔치 않다는 소문이다.

역대 최고의 검호였다는 피아로와 영원한 2인자 아스모펠, 그리고 현재 적기사단의 솔로 넘버 나이트 상위 3명을 제외하면 척슬리 같은 경우가 없다고 한다.

아스란 국왕이 추측컨대, 아마 척슬리에게 좋은 환경이 마련된다면 척슬리는 대륙 전체를 호령할만한 인재였다.

***

“오래간만에 뵙는 군요. 늦었지만 왕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

알현실에 입장한 아스란 국왕이 무척 놀랐다.

제국에서 찾아온 손님이, 왕 앞에 무릎을 꿇기는커녕 간단한 목례만 하였기 때문에?

아니,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제국에서 찾아온 손님은 에트날의 왕 따위에게 예의를 갖춰야할 신분이 아니었으니까!

“브누아 황자…?”

제국의 3황자!

다른 황족들과 달리 그는 제국에서 존재감이 옅은 편이다.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었고, 딱히 화제에 오를 만큼 요란한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제국의 황자다. 황위계승서열이 무려 3위나 되는 어마어마한 거물이다.

그가 직접 이런 변방의 왕국을 찾아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놀라 술이 확 깨버린 아스란 국왕이 질문했다.

“그렇군요. 유학시절 이후 처음 뵙는 군요. 한데 황자께서 어찌 이곳을…?”

절로 공손해지는 말투.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아스란 국왕에게, 브누아 황자가 미소 지었다.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였다.

“동문수학했던 인연이 아닙니까? 왕께서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우러 왔습니다.”

“위기…라고요?”

그래, 국력이 쇠약해지는 위기에 놓이긴 했다.

하지만 이를 제국 황자가 달려오게 만들 정도의 위기라기에는 어폐가…

의문에 휩싸이는 아스란 국왕에게 척슬리가 달려와 소리쳤다.

“전하! 적습입니다! 반란군이 왕성으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첩보입니다!!”

“뭣이…!”

아스란 국왕이 석상처럼 굳었다.

그리드에게 반격할 군세가 남아있었다고?

그 숫자가 적다고 할지언정, 이곳 왕성에는 병력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병력을 전쟁터로 투입한 상황이다.

혼란에 빠진 아스란 국왕이 힐끗, 여전히 웃고 있는 브누아 황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위기라는 것이 작금의 사태를 말한 겁니까?”

브누아 황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아스란 국왕에게 낡은 빗 하나를 건넸다.

그래, 빗.

머리털을 빗을 때 쓰는 도구 말이다.

“이게 무슨…?”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아스란 국왕에게 브누아 황자가 속삭인다.

“대악마를 소환하는 도구입니다. 어디 한 번 잘 사용해보십시오.”

그 틈에 나는 피아로와 자수정 방패를 찾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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