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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93화 (388/1,794)

템빨 27권 - 10화

거미줄처럼 펼쳐진 은사가 달빛을 머금고 반짝일 때마다 아름다운 빛의 굴절이 발생한다.

점멸하는 은빛이 궁전의 샹들리에를 연상시켰고, 그 중심부에 홀로 선 그리드는 고고한 제왕 같다.

담대한 표정으로, 차가운 눈빛으로 좌중을 살피는 그.

수만의 적군에게 고립되어 있는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할지니, 각국의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그에게 살수를 펼쳤던 다섯 명의 하이랭커들까지 전율시킨다.

“테… 템빨단 가입 가능?”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자 내뱉는 구차한 대사가 아니다.

하이랭커들은 그리드로부터 진정어린 위엄을 느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따르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절대적인 무력과 제왕의 품격까지 갖춘 그리드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오해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해치려했던 자들이 다짜고짜 길드 가입을 신청해봤자, 진심으로 보이겠는가?

‘이 녀석들이 죽기 싫어서 허튼 수를 쓰는군.’

어리석은 자들은 분간 못하고 껌뻑 속아 넘어갈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다르다. 훗!’

무수한 경험을 토대로 쌓아온 통찰력.

통찰력 스탯과는 별개로, 그리드라는 인물 개인이 노력해서 쌓아온 심안이 다섯 명의 하이랭커들을 당혹시킨다.

“싫어. 안 받아.”

“…?!”

하이랭커들이 무척 당황했다.

자신들이 누군가?

무려 3차 전직을 달성한 최강자들이다. 각 직업 탑10 안에 든다. 7대 길드조차도 자신들을 영입하고자 애를 쓸 정도였다.

이런 본인들이 길드에 가입 신청을 하였는데도 일고의 고민 없이 바로 거부하다니?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자신을 죽이려했기 때문인가?’

생각해보니 그리드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자신을 해치려한 자들을 어찌 바로 신뢰하고 길드 가입을 받아주겠는가?

하이랭커들 본인이 그리드였다고 해도 그러지 못할 것이었다.

‘일단은 어쩔 수 없군.’

‘오늘은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자.’

대롱대롱!

은사에 칭칭 감긴 채 매달려있는 하이랭커들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리드의 반격을 예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그리드가 아니라 루실리브 공작의 황금 병사들이었다.

푸푹!

푸푸푸푹!!

본래는 그리드를 노렸던 창칼들이, 그리드가 갑작스럽게 하이랭커들을 방패로 내세우는 바람에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

“크음…!”

황금 병사들은 2차 전직한 병사들이다.

에트날 정규군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발휘하는 루실리브 공작의 사병들이었다.

움찔!

무시 못 할 피해를 입고 신음을 토하는 하이랭커들에게 치명타를 날려 마무리를 가하려던 그리드가 멈칫했다.

저 멀리, 시가지 너머의 광장 중앙.

포박당해 있는 바이란의 주민들에게 에트날군 병사 일부가 활을 겨누는 것을 발견한 까닭이다.

‘저 개자식들이!’

힘으로 나를 제압할 수 없으니 인질을 이용하려는 건가!

‘왜?’

약한 자들은 왜 언제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받아야하는 걸까?

학창시절의 지독한 기억들이 피어올라 더욱 더 불쾌하다.

괘씸함에 이를 간 그리드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다가 행동을 멈췄다.

‘침착하자.’

예전 같았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인질을 구출했을 그리드이다. 허나 주작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그는 평정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깨달은 바 있다.

애써 침착하며, 사고가 편협해지지 않도록 노력한 그가 최선의 선택을 도모했다.

우선, 눈앞에 덤벼오는 적들을 베어버리면서 하이랭커들의 몸을 옥죄고 있는 은사를 풀어냈다.

“…?”

은사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된 하이랭커들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꼼짝없이 죽는 줄로 알았다.

최대 5초의 속박.

개인의 역량에 따라서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있었지만, 어찌됐든 속박 된 순간 그리드의 공격을 최소 한 번은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리드의 공격을 허용하게 되면 즉사할 확률이 높다.

즉, 그리드는 언제든지 자신들을 죽일 수 있는 입장이었단 뜻이다.

한데 살려주다니?

의아해하는 하이랭커들에게, 그리드가 계속해서 적을 베어나가며 읊조렸다.

“앞서 말했던 대로 나는 너희들의 길드 가입 신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죽이려했던 너희들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안 그래? 하지만 기회는 줘도 되겠지.”

“…?”

“지금부터 너희들은 나를 위해 싸워라. 내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을 베어버리도록.”

“……!”

우리에게 템빨단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드는 우리를 시험해볼 요량인 것이다.

하이랭커들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고 또한 감동할만한 사건이었다.

‘자신을 죽이려한 우리를 응징하기에 앞서서 기회를 베풀어주다니…? 그리드는 과연 엄청난 대인배구나!’

‘하나 같이 쟁쟁한 거물들이 왜 그를 따르고 있는지 잘 알 것 같아.’

그리드는 사람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는 뛰어난 통찰력을 갖췄음이 분명하다.

확신하며, 다시 한 번 그리드에게 반한 하이랭커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맡겨주십시오!”

파앗!

소리친 하이랭커들이 동시에 그리드를 둘러쌌다. 그리고 그리드를 표적 삼아서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황금 병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각 직업군 최상위 랭커답게 뛰어난 신위를 발휘했고, 루실리브 공작의 사병들은 속절없이 쓰러져나갔다.

이를 본 그리드가 안도했다.

‘X까라면서 뒤통수 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었군.’

역시 평정심은 중요하다. 감정에 치우쳐서 행동했다가는 하이랭커들과 대량의 병사들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인질을 구출하는데 차질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또 한층 성숙해진 그리드가 이상적인 단검을 착용, <신속한 몸놀림>을 사용한 후 바이란의 주민들을 향해서 내달렸다.

***

‘황금 병사들은 미끼에 불과하다!’

루실리브 공작은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무한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본인만 해도,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재력을 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더 큰 재물을 원하게 되지 않던가.

하여 그리드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일거라 확신했고, 그 확신은 통했다.

황금 병사들이 죽을 때마다 떨어뜨리는 금덩어리들을 회수하느라고 그리드는 잠시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틈에 루실리브 공작은 마수를 펼쳤다.

광장 중앙.

바이란의 주민들을 당장이라도 처벌할 것처럼 상황을 연출해놓은 뒤, 그리드가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시가지 곳곳에 자신의 직속 근위대와 정예 기사들을 배치시키고 마법 함정을 파놓았다.

‘네놈이 정녕 그토록 백성들을 아낀다면.’

나의 이 완벽한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을 터!

“큭큭!”

사악한 미소를 짓는 루실리브 공작.

그를 보면서, 침묵 마법에 빠져있는 바이란의 주민들은 속으로 절규했다.

‘그리드 공작각하, 절대 이곳에 오시면 안 됩니다.’

‘저희들 때문에 저 사악한 자의 함정에 빠지지 마세요!’

덜덜덜!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하얗게 질린 상태로도 그리드를 걱정하는 이들.

당연한 것이다.

그리드는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10만의 대군에 단신으로 맞서고 있다.

일개 백성에 불과한 자신들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아껴주는 그리드를 백성들 또한 아낄 수밖에 없었다.

루실리브 공작의 살기와 바이란 주민들의 공포심이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이때.

한편에 도열하고 있는 비정규군 병사들은 강한 의구심을 품었다.

‘우리가 에트날 왕국을 섬겨야하는 이유가 뭐지?’

‘우리가 에트날 왕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왕국을 사랑했고 군소리 없이 세금을 바쳐왔다. 하지만 정작 왕국은 우리를 가축처럼 취급하고 있어.’

‘강제로 전쟁에 내몬 것으로 모자라서 희생을 강요하고…’

‘죄 없는 백성들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취하고…’

단지 조국이기 때문에 섬기기에는 왕국이 보여주는 행태가 너무 좋지 못하다.

비정규군 병사 약 6만여 명은 왕국에 실망했다. 자신들이 이딴 국가에 충성해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는 루실리브 공작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다.

왕가의 피가 흐르는 루실리브 공작.

에트날 왕국 최고의 귀족으로써, 당연히 백성을 아껴야할 그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자 비정규군 병사들은 왕국의 모든 귀족들이 루실리브 공작과 같을 거라는 편견을 품게 됐다.

각 영지에서부터 차출 된 비정규군들이 실제로 보고, 겪은 대부분의 귀족들이 루실리브 공작과 같기도 했다.

반면 그리드는?

다르다.

저 멀리.

쿠쾅!

콰콰콰콰콰콰콰쾅!!

그리드는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적진의 포화를 꿰뚫고 달려오고 있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감에도, 자신의 안위 따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을 바라보고 있다.

비정규군 병사들은 생각한다.

저자의 백성이 되고 싶다고.

반면 루실리브 공작의 입장에서는 그리드가 어리석게 보일 뿐이었다.

“미천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다니, 아무리 봐도 이해할 수가 없군. 뭐, 덕분에 난 네놈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만.”

루실리브 공작은 비정규군 병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찮게 변모하고 있음을 읽지 못했다.

그에게 있어서 천민들은 생각 없는 개돼지였다. 그들이 감히 자신에게 반감을 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세가 오른 그가 시가지에 펼쳐놓은 함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그리드에게 보란 듯이 활을 쥐었다.

그리고 바이란의 주민 중 한 아녀자의 미간을 노리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토록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어찌나 가슴 아플꼬?”

끼릭-!

그리드가 절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음침한 미소를 피어올린 루실리브 공작이 힘껏 당긴 활의 시위를 놓으려하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귀를 찢는 파공성이 루실리브 공작의 귓전에 울려왔고,

“뭣…!!”

위험을 감지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루실리브 공작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어서.

터엉-!!

루실리브 공작을 호위하는 고위 마법사들이 펼친 실드에 단창이 날아와 박힌다.

마법사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저런 평범한 단창으로 실드에 균열을 일으키다니?’

이 단창을 투척한 자,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란 말인가?

질색하는 마법사들과, 감히 자신의 목숨이 노려졌음에 격분하는 루실리브 공작의 시선이 모두 단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비정규군 병사 한 명이 서있었다.

먼지와 피를 잔뜩 머금고 있는 추레한 가죽갑옷 차림의 병사.

행색과 어울리지 않게도 고귀하게 빛나는 금발을 치렁치렁 기른 미남자다.

이등병 아스였다.

루실리브 공작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군.”

정말로 길었다.

아스는 몇날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루실리브 공작의 빈틈을 노려왔다. 하지만 늘 근위대를 곁에 두는 루실리브 공작의 틈을 노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공교롭게도 주군 그리드덕분에 기회가 찾아왔다.

“주군께서 버티시는 동안 빠르게 끝내주지.”

비정규군 병사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루실리브 공작을 해치운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비정규군 병사들 대부분이 손에서 창칼을 내려놓을 것이며 이 전쟁은 끝난다.

확신한 아스가 루실리브 공작에게 달려들었다.

“놈을 막아라!”

마법사들이 루실리브 공작을 보호하고자 마법의 주문을 외웠지만 늦다.

루실리브 공작과 아스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노옴!!”

루실리브 공작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 그 순간!

파앗!

루실리브 공작의 심장에 창을 꽂아 넣으려던 아스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

덩그러니 놓은 루실리브 공작과 고위 마법사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같은 시각.

“주… 주군?”

바이란 시가지.

그리드가 사용한 <기사 소환> 때문에 그리드 곁으로 날아오게 된 아스모펠이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루실리브 공작의 근위대 두 명을 베어 넘긴 그리드가 소리쳤다.

“아스모펠! 그만 농땡이 피우고 너도 일 좀 해라! 애들이 그러더라! 너만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

농땡이를 피우다니?

아스모펠을 억울하게 만드는 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설명하기엔 구차한 부분이 너무 많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아스모펠이 그리드를 덮치는 루실리브 공작의 근위대들을 막아섰다.

그리드는 노에와 랜디, 이야루그트까지 소환하고 있었다.

‘더!’

더! 더! 더!!

하이랭커들과 아스모펠, 그리고 소환수들의 힘을 빌려서 적진을 빠르게 돌파해나가는 그리드.

중앙 광장과의 거리가 일정 수준으로 좁혀지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가 즉시 <흑화>를 전개했다.

악마력이 1만을 돌파하면서 한층 더 강화 된 흑화에 의해서 그리드의 몸 주변으로 마기가 넘실거렸고,

“종횡무진!”

그리드는 수백의 근위대와 기사들, 그리고 마법 함정들이 쏘아내는 모든 공격을 단 한 번도 허용하지 않고 회피하여 시가지를 돌파했다.

칭호 <은밀한 영웅>의 힘이었다.

“……!”

루실리브 공작을 비롯한 에트날군 전원이 귀신에 홀린 듯 한 표정을 짓는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드디어 루실리브 공작을 대면하게 된 그리드가 이죽거렸다.

“하, 그것 참. 별 쓰레기 같은 새끼가 사람 피곤하게 만드네.”

호흡을 고르면서 흑발을 쓸어 넘기는 그리드의 등 뒤로 태양이 떠올랐다.

바이란 주민들을 공포로 잠식시켰던 끔찍한 밤이 지나고, 찬란한 아침이 밝아온 것이다.

“저항조차 못하는 약자의 입장, 오늘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체험해봐.”

레이단의 태양, 에트날 전역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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