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6화
바이란 중앙 광장.
포승줄에 줄줄이 묶인 9천여 명의 주민들이 오열하고 있다.
루실리브 공작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발언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바이란이 반군의 소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이는 명백한 중죄야. 그대들이 반군에게 바친 세금과 노동력이 반군의 배를 불려놨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결과적으로 그대들 또한 왕실에 반기를 든 셈이지.”
바이란의 주민들은 더 이상 에트날의 백성이 아니다.
루실리브 공작은 그렇게 판단하고 판결했다.
“그대들은 에트날의 땅 위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죽어라. 그대들 전원의 3대가 멸족당하고 조상의 묘가 파헤쳐질 것이다.”
“……!”
바이란 주민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 용기를 낸 누군가가 항변을 시도했지만, 대귀족 앞에서 평민 따위가 감히 입을 여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고위 마법사들이 발동시킨 광범위 침묵마법이 주민들의 입을 강제로 닫아버렸다.
“읍…! 우읍!!”
말을 할 수 없다?
절망에 집어삼켜진 주민들이 눈빛으로 호소했다.
최소한 자신의 자식만큼은, 혹은 부모만큼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루실리브 공작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루실리브 공작은 개의치 않고 명령을 내렸다.
“모조리 죽여라.”
“우읍…! 웁!!”
주민들이 저항하고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포승줄에 꽁꽁 묶여있는 까닭에 자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병사들에게 제압당하여 활의 과녁 신세가 되었다.
“저럴 수가…”
10만 대군 중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군들.
머잖아 전쟁에서 화살받이가 될 운명인 그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저 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다 죽이려는 건가?”
“말도 안 돼… 저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애초에 반군에게 땅을 빼앗긴 건 주민들의 잘못이 아니라 나라가 무능해서잖아? 왜 죄를 주민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거지?”
“평생을 살아온 삶의 터전이 반군 소속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해야하다니! 심지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우리의 사령관은 백성의 목숨 따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한 순간, 대부분이 평민이나 최하층민으로 구성 된 비정규군 병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됐다. 사령관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이다.
체력을 한계까지 쥐어짠 고된 행군으로 인해서 지친 마당에 정신력까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부터 이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공포밖에 없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등병 아스가 생각했다.
‘오늘 밤에도 탈주자가 늘어나겠군.’
파르트에서 바이란까지 행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정규군 탈주자는 무려 6천 명에 육박했다.
그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병사가 곧 만 단위를 넘어가리라, 이등병 아스는 판단하면서 저 멀리 루실리브 공작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머잖아 기회가 왔으면 좋겠군.’
루실리브 공작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작은 균열. 이는 결국 커져서 군대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그때 루실리브 공작이 빈틈을 드러낸다면 이상적이겠지만, 과연 어떨까?
관찰 결과, 루실리브 공작은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하는 인물이었다. 늘 300명의 근위대와 10명의 고위마법사로부터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제아무리 아스라도 좀처럼 암살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정 안 되겠으면 정면으로 돌진해야겠지.’
만약 상황이 그 지경까지 간다면 내 목숨 또한 없는 셈이나 다름이 없지만, 주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한 목숨 바치는 것은 아깝지 않다. 애초에 주군에게 구원받은 삶. 이 삶을 주군을 위해서라면 송두리째 내놓을 수 있었다.
‘황비에게 복수하는 것은 피아로 네게 맡기마.’
아스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번지는 그때였다.
파아앗-!
하늘에서부터 빛이 번쩍이더니 그리드가 나타났다.
“주, 주군…?”
파르트 소속 이등병 아스.
실제 정체는 템빨마법기사단의 단장 아스모펠인 그가 경악했다.
‘어째서 주군이 이곳에!’
바이란을 지키고 있던 병력은 이미 전부 퇴각한 상황이 아니던가!
한데 어째서 주군 혼자서 이곳에 뛰어드셨단 말인가!
‘서, 설마?’
주군께서는 이곳에 남기고간 백성들이 눈에 밟히셨던 게 아닐까?
“…이럴 수가.”
백성을 지키고자 10만 대군에 홀로 맞서는 군주라니, 고금을 통틀어 봐도 없다.
하늘 위 그리드를 올려보는 아스모펠의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주군께서 세우시는 나라를 보고 싶습니다.”
본인의 목숨보다 백성의 안위를 생각하는 왕.
필시 어리석다 장담할 수 있다.
왕이란 대체할 수 없는 존재인데, 고작 백성을 지키겠답시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막말로 나라를 말아먹을 왕이라며, 제국 귀족시절의 아스모펠은 한심하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병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백성들의 입장과 마음을 헤아린 지금의 아스모펠은 달랐다. 그리드가 멋지게 보였다. 그가 세우는 나라의 백성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그렇기에 결심한다.
‘제가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주군의 신념과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무력이 되겠습니다.’
꾸욱!
감격에 떨리는 손으로 단창을 거머쥔 아스모펠.
10만 대군 속의 그가, 검기의 폭격을 개시하는 그리드에게 호응하여 움직이기 시작했다.
***
“엥?”
스틱세이와 함께 바이란에 도착한 그리드가 두 눈을 의심했다.
익숙한 얼굴들은 온데간데없고, 도시를 가득 매울 정도로 많은 숫자의 군대가 집결해있었으니 무슨 영문인지 순간 이해가 안 됐다.
“왜 아무도 없…”
의문을 느끼던 도중, 번쩍이는 황금색 갑주를 무장하고 있는 병사들이 잔뜩 도열해있는 성벽 곳곳에 에트날의 깃발이 꽂혀있음을 발견한 그리드.
“…냐? 씨벌.”
얼빠진 사람처럼 보이던 그리드의 얼굴이 일순간 무섭게 일그러졌다.
“다 죽은 거야?”
내 땅을 빼앗은 이 개자식들에게! 내 소중한 동료들과 병사들이!
격노를 금치 못하는 그리드에게, 매스 텔레포트의 연속적인 사용 여파로 지쳐있는 스틱세이가 다급히 말했다.
“허억. 헉… 그리드님, 진정하십시오. 당신의 병사와 기사들은 결코 쉽게 당할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잖아도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적진 한가운데 떨어진 상황이다.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행동했다가는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스틱세이가 일깨워주자 간신히 냉정을 되찾은 그리드가 길드 채팅으로 물었다.
@그리드:바이란 지키던 인원들은 다 어떻게 된 거지?
@폰:여의치 않아서 일단 퇴각했어. 지켜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리드. 반드시 되찾아보일게.
@이블린:그리드 형! 어째서 이렇게 빨리 돌아오신 거예요? 동대륙에 한참 더 계실 예정 아니었나요?
@반트너:지슈카한테 준 활 엄청나더라! 하여튼 너는 대단해!!
“휴…”
폰의 대답을 확인한 그리드가 안도했다.
바이란의 모든 전력이 몰살당하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면한 것 같았으니.
“일단 튀자. 작전상 후퇴다.”
적군의 숫자는 정말이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드는 살면서 이토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장면을 TV에서조차 본 경험이 없다. 이들과 혼자서 싸운다는 것은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압도당하여 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리드의 시야에 바이란 백성들의 모습이 담긴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포박당한 채 소리죽여 오열하고 있는 그들. 에트날군 병사들이 겨누는 활의 표적이 된 채 자신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움찔.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췄다.
야파 화살의 제작법을 알려주었던 대장장이 스미스.
야탄교의 침공을 막아낸 후 함께 성벽을 수리하였던 청년들.
나무 열매를 건네 왔던 소녀들과 미담을 전해주던 노인들.
그리드가 초보자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연을 쌓아왔던 백성들의 면면이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그들을 해치려들어?’
그리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인연을 아끼는 마음에 앞서서 나의 백성들. 즉, ‘내 것’을 멋대로 빼앗으려드는 에트날군의 작태를 그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리드님?”
적의 궁병들과 마법사들이 이미 공격을 시작했다.
상공을 가득 매우고 덮쳐오는 공격에 대항하야 실드를 펼친 스틱세이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리드의 사태가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스틱세이, 당신 먼저 파트리안으로 가있어.”
역시나.
“홀로 저 대군과 맞서실 요량입니까? 혹 저들의 숫자가 가늠이 안 되시는 거라면 말씀드리죠. 적의 숫자 족히 10만입니다. 당신의 강함은 익히 알고 있으나, 혼자서 10만을 상대하는 것은 무의미한 자살행위…”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는 것도 창피하지 않겠어? 템빨단의 수장인 내가, 적과 마주치고 그대로 꽁무니를 친다? 여태까지, 그리고 지금도 나를 대신해서 싸워주고 있는 내 동료들의 명예를 더럽히게 될 거야.”
그리드는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전 세계 방송국의 카메라들도 의식하고 있었다.
‘봐라.’
제2회 국가대항전 이후 쉬지 않고 성장시켜온 힘.
지금의 나는 지존의 자리에 보다 더 가까워졌을까?
사람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또한, 스스로 궁금하기도 하다.
10만대 1이라는 말도 안 되는 전투에서 과연 어디까지 활약할 수 있을지.
‘미리 준비해놓은 매직 미사일들의 알람이 울릴 때까지 20분.’
이는 비장의 패로 남겨두고 그때까지 전력을 다해서 싸운다.
‘최우선 과제는 백성들의 퇴로 확보.’
생각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속삭여왔다.
‘알고 있나? 전대 전설들에게는 숫자의 개념이 무의미했다. 10만은커녕 100만 대군을 움직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전설이야. 즉, 너와 내가 함께한다면 10만 병사 따위… 뭐, 굳이 꼭 함께할 필요는 없다만.’
초월적인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존재는 마찬가지의 강자뿐이다. 피라미들이 아무리 덤벼봤자 한 줌 재밖에 되지 않는다.
말을 듣고 피식 웃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봐서 부를 테니까 출동 준비해줘.’
‘흥… 굳이 부탁한다면 들어주지.’
브라함의 대답을 확인한 그리드의 눈빛이 다시 진지해졌다.
‘전대 전설과의 격차가 어디까지 좁혀졌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계기도 되겠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번헨 열도의 란스티어.
“놈에게 언제쯤 다시 도전해도 좋을지, 어디 한 번 확인해볼까!”
지이이이잉-
백여 개의 백색 구체를 몸 외부에 두르고 있는 그리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이란의 백성들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궁병들의 처리였다.
“파그마의 검무, 초(超).”
[공격력이 2배 증가합니다. 기본 공격이 원거리 공격으로 변환됩니다. 이 효과는 30초 동안 유지됩니다.]
“평타만으로도 충분해.”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쾅!!
검은 귀신을 이도류로 분리한 그리드가 양손을 쉬지 않고 휘둘렀다.
그러자 초당 7~8발의 검기가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렸고 이에 에트날 궁병대가 휩쓸렸다.
“크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아비규환이다.
에트날군 병사들이 수백 명 동시다발적으로 잿빛으로 산화했다.
한 마디로 미친 화력!
“이익! 우선 플라이 마법을 차단하라!”
제공권을 빼앗겨서야 답이 없다고 판단한 베라 후작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그가 영지로부터 이끌어온 마법사단이 즉각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발동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사의 마나회로를 변경, 플라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게끔 만드는 주문이었다.
한데 공교롭게도 그 마법은 그리드에게만 통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사용하고 있는 플라이 마법은 그리드라는 술자를 통해서 전개된 것이 아니라, 그리드가 무장한 부츠를 통해서 전개된 것이었으니까.
“아니…! 마법이 통하지 않다니?”
“아티팩트로 인한 마법 발동인가!”
기껏 어렵게 주문을 완성하였건만 수포로 돌아가자 마법사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이쪽의 숫자는 무려 10만이다.
그들이 헛물을 켜는 동안 다른 쪽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쏴라! 계속 쏴라!!”
각지에서부터 모인 정예병들.
활과 마법을 쉬지 않고 쏜 끝에 스틱세이의 실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그들이 그리드에게 포화를 집중시켰다.
상공에서 몸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그리드였기에 그는 노리기 쉬운 표적이었다.
‘다구리 맞을 땐 하늘에 있는 게 도리어 독이구나.’
몇 번의 마법 폭격을 허용한 그리드가 부츠를 스왑, 플라이 마법을 해제시키고 지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고의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협소한 공간을 선택해서 착지했건만, 부질없게도 사방팔방이 이미 죄다 적군이었던 까닭이다.
“죽어라!!”
그리드를 둘러싼 에트날군 병사들이 기세 좋게 그리드를 덮쳤다.
워낙 숫자가 많다보니 그리드의 강함을 망각하고 용기백배 된 상태다.
“이야압!!”
바로 정면.
열 명의 병사가 동시에 창을 찔러온다.
전 세계 시청자들은 그리드가 어떤 스킬로 대응할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열 명의 공격을 반격기 한 방으로 되돌려주는 건 역시 무리겠죠?
-그냥 공격스킬 써서 통째로 쓸어버릴 듯. 아직 스태미나가 여유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스킬을 사용하려고 하겠죠.
-근데 그리드 몇 명까지 살육 가능할까요?
-에트날군 평균 레벨이 160내외 같으니까… 그리드 정도면 그래도 5천 명쯤은 잡고 죽지 않으려나요.
정말로 짧은 시간이었다.
시청자들이 각자 채팅 한 줄을 입력하는 정도의 시간.
“꺼져.”
검은 귀신을 회수하고 실패작을 꺼내 무장한 그리드가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그래, 그냥 휘둘렀다.
평타였다.
쩌저저저저정!!
“크아아악!!”
그리드의 평타 한 방에 그를 덮쳤던 에트날 창병 10명이 모조리 죽어버렸다.
-…
-…
각국 인터넷 방송 사이트들의 채팅창이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멈춰버렸고,
“이거 재밌네.”
세계를 침묵시킨 장본인 그리드는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단 사실을 상기하며 흥분감에 도취된 것이다.
하지만 물론 방심하지는 않았다.
10만 대군 속에는 최소 3차 전직한 정예 기사나 마법사들이 다수 존재할 터였으니, 그들의 습격을 경계했다.
정작 그 3차 전직자들은 이등병의 기습을 당하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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