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5화
“쿨럭쿨럭… 죄, 죄송합니다. 이런 시국에 제가 민폐를… 모두의 발목을 붙잡고 마는군요.”
쉬지 않고 각혈하는 스틱세이의 안색은 곧 죽을 사람 같아 보였다. 한데도 그는 본인보다 도리어 템빨단을 걱정하며 사죄하고 있다.
그리드의 호감을 살만한 태도였다.
‘나 때문에 몇 번이고 매스 텔레포트를 사용한 탓에 무리가 온 것일 텐데…’
초조해봤자 의미 없다. 스틱세이의 병약함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미안해하고 걱정해야할 입장이다.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짓고 말했다.
“괜한 걱정하지 말고 회복에 전념하도록 해. 내 아들에게 당신의 지식을 모조리 전수해줄 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히 잘 살아야지.”
“그, 그리드님…”
스틱세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이엘프를 상징하는 뾰족한 두 귀가 쫑긋! 서면서 아름다운 얼굴에 홍조가 깃든다.
오래오래 건강히 살라는 말에 감동한 것이리라.
그리드는 당연히 그렇게 해석했지만, 스틱세이가 다소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그리드의 해석과 달랐다.
“로드 공자에게 지식을 다 전수해줄 때까지만 살라는 말씀은… 제게 단명 하라는 뜻입니까? 예? 저보고 일찍 죽으라고요? 싫은…데요?”
“…”
삶에 집착이 강한 하이엘프 스틱세이.
그의 나이 올해 983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스틱세이가 문득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곳에 들끓는 마력…! 설마!!’
어서 회복해서 탈출해야한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스틱세이가 회복을 서둘렀다.
한편 브라함의 영혼도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이 한심한 엘프새끼가 어서 회복하지 않으면 그리드가 죽겠군.’
그리드가 이곳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판단한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속삭였다.
‘저 엘프는 금방 회복할 거다. 괜히 또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알람마법으로 매직 미사일이나 모아둬라.’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사실 그리드 또한 이 장소가 불안하던 차이다. 그의 높은 통찰력이 어둠 속 깊은 곳에 발을 들여선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자존심 상하네.’
매번 그토록 노력해왔건만, 나는 아직까지도 굉장히 미약한 존재구나.
깨달으면서, 그리드는 알람 마법과 매직 미사일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나 물약의 손실이 무척 뼈아팠으나 지금은 돈 아낄 때도 아니다.
그리고 이들은 1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바이란으로 출발하게 된다.
***
쿠웅! 쿠웅!!
쿠콰콰쾅!!
“오오…!”
“드디어!!”
공성병기의 계속되는 공격을 감당하지 못한 바이란의 남쪽 성문이 와르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이에 병사들. 특히 플레이어들이 환희하며 만세를 외쳤다.
지난 일주일.
전쟁 통에 몇 번이고 죽은 플레이어들의 피해는 막심한 상태였다. 대량의 경험치를 손실했음은 물론이고 누군가는 값비싼 아이템을 드롭하기도 했다.
템빨단의 거센 반격이 그들에게 무수한 고통과 좌절을 안겨줬다.
하지만 좌절을 맛보는 것도 오늘로서 끝이다.
지금부터는 전쟁 내내 치렀던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다!
“진격! 진격하라!!”
“바이란으로 들어가!! 우선 템빨단 놈들부터 박살내라!!”
“우와아아아아아아!!”
플레이어들의 이번 퀘스트 목적은 바이란의 점령!
바이란을 점령할 경우 획득하는 보상은 SS급 퀘스트의 보상과 비견될 정도다. 평범한 플레이어의 인생을 뒤바꿀 수도 있는 엄청난 보상인 것이다.
플레이어들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 템빨단원이나 템빨단 병사를 해치울 경우 획득 가능하다는 추가 보상이 그들의 눈이 돌아가게끔 만들었다.
바이란으로 진입한 그들이 우르르 성벽 위로 올라 템빨단의 궁병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궁병새끼들! 너네한테 하도 뒤져서 렙따까지 당했다! 뒤져!!”
“복수다!!”
“크악!”
보급형 그리드 세트를 무장하고 있는 템빨단의 병사들은 무척 강하다. 동레벨 플레이어조차도 그들을 1대1로 이기긴 어려운 수준이었다. 한데 레벨조차도 템빨단 병사들이 에트날 플레이어들보다 높았다.
하지만 템빨단 병사들은 무척 지친 상태였고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템빨단의 궁병들은 개떼처럼 밀려들어오는 플레이어들을 감당하지 못했다. 보조무기로 지급 받은 <그리드의 단검(보급형)>으로 최대한 몸을 지켜보지만 오래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하나, 둘씩 잿빛으로 산화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템빨단원들을 분노하게 만든다.
병사 하나를 육성하기 위해서 투자한 비용과 시간이 얼마던가!
“어머니 장례식에도 안 갈 놈들이!!”
이를 악 문 후로이가 묵색의 장검을 꺼냈다.
그리드가 윈스톤에 머물던 시절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연구하고 개량해온 <그리드의 장검>이었다.
플레이어들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웅변가 따위가 검을 들어봤자!”
“휘두르는 법이나 아냐!”
웅변가는 백병전 최약체로 손꼽히는 직업군이다.
제아무리 후로이의 레벨이 높은들 에트날군 플레이어들을 위축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후로이가 쥔 검을 그저 장식품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후로이는 무려 <최초의 세컨드 클래스> 전직자다.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인 그는 수준급의 검술을 구사할 줄 알았다.
챙!
서걱!
채챙!
푸푹!!
“컥…!”
“허윽!!”
후로이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에트날군 플레이어가 한 명씩 죽어나갔다.
플레이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슨 웅변가가 검술을…!”
“설마 세컨드 클래스!”
뒤늦게 눈치 채보지만 이미 늦었다.
“흥! 강림하라! 초원 위 하늘의 제왕이여!!”
콧방귀 뀐 후로이가 소리쳤고,
키야야야아아아-!
“……!”
폭발하는 기성과 함께 하늘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거대한 비룡이 출현한 것이다.
그것도 붉은 비룡!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한다는 화염 속성 비룡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
하늘 위 붉은 비룡이 브레스를 내뿜자, 성벽의 계단을 타고 일렬로 쭉 올라오고 있던 에트날군 플레이어 50여명이 불길에 휩싸여버린다.
“으아아악!!”
“히, 히익!!”
몸을 불태우는 열기에 플레이어들은 커다란 고통과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레벨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화염 데미지조차 감당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이, 이럴 수가…”
저 패트리퍼가 이렇게 강했단 말인가!
“주둥이만 산 놈인 줄 알았는데…!”
남쪽 성벽.
템빨단원 중에서 ‘유일하게 만만한’ 후로이가 지키고 있는 그곳.
플레이어들은 우습게 점령할 수 있으리라 믿고 병력을 집중시켰지만 현실은 처참했다.
사실 유라, 폰 등과 달리 직접 전선에 나서지 않고 주둥이만 나불거리고 있던 후로이가 그나마 가장 스태미나 보존 상태가 좋았다.
특히 그는 전 세계에 채 100명도 없다는 비룡의 주인 중 하나인 바.
강하다.
후로이가 지키는 남쪽 성벽은 에트날군에게 지옥이 되었다.
“위대한 푸른 늑대의 후손인 이 내가!”
서걱! 푹!!
콰르르르르르!!
비룡과 함께 에트날군 플레이어들을 불태우고 베어나가는 후로이.
수십 대의 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그가 전 세계에 선포한다.
“바로 이 내가 그리드님의 첫 번째 몸종이다!!!”
“몸…!”
“종!”
츠카카카카카칵!!
한 직업을 대표하는 최상위 랭커조차도 그리드의 몸종에 불과한 것인가!
경악하는 에트날군 병사들의 몸이 갑옷과 함께 통째로 베였다가 화마에 휩쓸렸다.
***
동쪽 성벽.
“진짜 잘 싸우네.”
남쪽 성벽의 후로이가 비룡과 함께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는 폰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방위 성벽 중 남쪽에 가장 적은 템빨단원을 배치한 이유, 후로이의 저력을 믿어서였는데 믿음에 대한 보답을 받는 기분이었다.
“역시 후로이는 탑클래스란 말이지.”
초창기부터 그리드와 함께(?)했던 인물들.
유페미나와 후로이.
그들은 다른 템빨단원들과 달리 세간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지만 최고 수준의 전투력과 만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드와 괜히 처음부터 함께해온 인물들이 아닌 것이다.
‘그리드가 거르고 걸러서 고른 인재들다워.’
멋대로 생각하는 폰에게 템빨단원들이 재촉했다.
“이쪽 성문도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야. 곧 적들이 밀어닥칠 거라고.”
“후로이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어서 도망치자.”
유라의 군대가 길을 열고 있는 북쪽 성문으로 피신해야할 때가 왔다. 후로이는 언제든지 비룡을 타고 도망칠 수 있었다.
“그래, 가자. 전군에 퇴각을 명령해.”
바이란의 주민들이 걱정이기는 하지만 라우엘의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바이란 주민들은 근본적으로 에트날 왕국의 백성이다. 에트날군이 굳이 그들을 살육하진 않을 터였다.
“전군 퇴각하라!!”
“북쪽 성문으로 튀어!!”
템빨단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성벽 위 궁병들과 내성 내의 보병들을 빠르게 통솔해서 북쪽 성벽으로 이동했다.
북쪽 성벽에는 이미 유라를 비롯한 템빨단의 정예들이 활약하여 길을 터놓고 있었다.
물론 잠자코 보고만 있을 에트날군이 아니었다.
에트날군의 기사단들이 북쪽으로 몰려와 템빨단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사방팔방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세례가 템빨단의 발을 묶었고, 기사단이 그 틈을 노리고 돌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제길!”
그리드라면 또 모를까, 평타만으로 기사단을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태미나 하락으로 스킬 사용 불가 페널티를 안고 있는 폰과 템빨단이 적의 공세에 발이 묶여있는 그때였다.
“(#%$/@!P$#~*$!%##((:*!!!!”
비룡에 탑승해서 하늘 위 높이 날아오른 후로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내뱉는 육두문자의 향연이 전쟁터 전역에 울려 퍼졌다.
웅변가의 궁극기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저… 저 악독한 놈!!”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을 모욕하다니!!”
“네놈은 부모님도 없냐!!”
에트날군의 어그로가 찰나지간 후로이에게 집중되었고 전쟁 영상을 송출 중이던 전 세계 방송사들은 후로이의 대사를 삐~~~~~~~~~~ 처리하느라 바빠졌다.
“이때야!”
기회를 놓치지 않은 템빨단원들이 일점돌파를 강행했다.
적군의 포위망을 꿰뚫고 퇴로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그대로 바이란으로부터 멀어졌다.
***
『템빨단이 바이란을 버렸군요.』
『진즉부터 한계가 온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버텼다면 아마 전멸을 면하지 못했겠죠.』
『바이란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바이란을 점령함으로써 파트리안 공격 루트를 확보한 에트날군은 이제 파트리안에 총 공세를 가할 것이며, 템빨단은 그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파트리안과 레이단을 순차적으로 잃고 말겠지요.』
『모든 길드 중 유일하게 다수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템빨단이 몰락하는 순간이 찾아온 거군요.』
『세력 확대를 너무 급하게 한 여파입니다. 내정적으로, 특히 외교적으로 탄탄하지 못해서 파국을 면할 수 없었던 거죠. 앞으로 최소 1년 동안 템빨단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치열한 전쟁의 무대가 되었던 바이란.
허물어진 성벽 위 곳곳에 에트날군의 깃발이 꽂혔다.
이제 바이란은 다시 에트날 왕국의 영토가 되었고, 바이란 탈환전에 참가했던 만 단위 플레이어들은 일제히 레벨 업을 상징하는 황금 기둥에 휩싸였다.
덩달아 상승하는 스킬 경험치와 별도의 보상으로 받은 에픽,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확인하는 그들의 만면이 환희로 물들었다.
상황을 중계하고 있던 각국의 해설진이 앞으로의 상황을 예견했다.
『에트날 왕국 플레이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순간이군요. 이번 템빨단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에트날 왕국 플레이어들을 성장시키는 촉진제가 되어버렸네요.』
『에트날 왕국의 왕은 아직 젊죠. 호기가 넘칠 겁니다. 성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이대로 가우스 왕국까지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할 것 같군요.』
『서대륙의 판도가 뒤바뀔 계기가… 어? 저게 무슨?』
한참을 떠들어대던 해설진들이 무척 당황했다.
두웅-! 두웅!!
쿵! 쿵! 쿵!!
발소리로 대지를 울리고 북소리로 하늘을 울리는 10만 대군!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대군의 행렬이 출현하여 바이란에 당도하고 있었다.
Satisfy의 많은 사건사고를 다뤘던 각 프로그램의 해설진조차 처음 보는 압도적인 장관이었다.
『에트날의 본대…!』
『어마 무시한 위용입니다! 저 대군이 이제 곧 파트리안으로 진격하는 것이겠군요!!』
해설진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위용이 넘치는 10만 단위의 대군을 목격하는 것은 그들로서도 처음이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청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게 바로 전쟁이구나, 라는 실감을 하면서 그들은 한 개 국가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깨달았다.
덕분에 바이란 상황 중계방송들의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 세계 각국의 방송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이 방송을 중단해야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왜?
10만 대군을 이끌어온 총사령관 루실리브 공작이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이란의 수천 백성들을 도시 중앙으로 집결시키더니 전원 포박시킨 후, 그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활을 겨누는 것이 아닌가?
『서, 설마 저 많은 백성을 처형할 생각인 걸까요?』
『그들은 단지 평범한 백성일 뿐이고, 단지 그들이 살아가던 영지의 영주가 반란을 일으켰을 뿐이건만 어째서 저들이 책임을 물어 처형당해야하는 걸까요.』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해설진이 통탄하였고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느꼈다.
그리드의 백성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게 생긴 바이란 주민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활의 과녁이 된 그들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 광경, 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병약자나 어린 시청자들이 감당하지 못할 장면이라고 판단한 각국의 방송사들이 눈물을 머금고 화면 송출을 중단하려는 그때였다.
파앗.
에트날 상공으로부터 빛이 번쩍이더니 한 사내가 나타났다.
족히 백 단위 숫자의 백색 구체를 주변에 거느리고 있는 그.
불어오는 미풍에 나부끼는 흑발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인다.
“그리드!!”
그래, 등장한 사내는 그리드였다.
이번 반란의 주모자인 그가 에트날 10만 본대 앞에 스스로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있던 루실리브 공작이 다급히 소리쳤다.
“놈을 잡아라!”
[<반란군 수괴 퇴치>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보상을 받고 기뻐하고 있던 에트날 플레이어들에게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고,
“엥? 왜 아무도 없…”
그리드는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재수 오지게 없는 타이밍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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