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4화
‘루실리브 공작이라고 했던가? 이 군대의 지휘관은 허세가 심하군.’
에트날 10만대군의 행렬은 장관이었다.
선두의 정병들이 무장하고 있는 황금색 갑주가 태양 아래 번쩍였고, 둥! 둥! 쉴 새 없이 울리는 북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이 세상 가장 위대한 군대임을 자처하는 기세다. 누구라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겉모습뿐이다.
선두의 정병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사들이 낡은 가죽갑옷을 무장하고 있었으며, 북소리에 가려진 행군소리는 일정치 못했다.
이유야 간단하다. 10만 대군 중 각지의 제후들이 이끌어온 정병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까. 나머지 절반 이상은 군의 기본훈련조차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썩을… 높으신 양반들끼리 수 틀려서 싸우는 전쟁에 왜 우리가 끼어야하는 거지?”
“그 뭐시여, 그 어떤 귀족 나으리께서 국왕전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지 않나? 백성은 무조건 국왕전하의 편을 들어야한다던데?”
“얼어 죽을~~ 우리가 쫄쫄 굶어 뒤져봤자 거들떠도 안 보는 국왕전하가 배신을 당하든 말든, 우리랑 뭔 상관이라고?”
최하층민.
찢어지게 가난하여 늘 굶주려온 그들은 배운 것이 없고 당연히 애국심도 없다. 오로지 생존이 삶의 목적인, 아무런 신념도 없는 그들과,
“하아…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들은 누가 보살피지? 만삭의 마누라 혼자서 어찌 애들을 돌볼꼬…”
“아이고, 이 나이에 갑옷 입고 창 들고 다니려니 참말로 힘들구먼…”
평범한 가장.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평생 노동만 해온 그들,
“흑흑… 엄마 보고 싶어요. 무서워요.”
“다리가 너무 아파… 더 이상 못 걷겠어…”
그리고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소년들과 몸 어딘가가 불편한 사람들이 10만 대군의 과반수 이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하나 같이 지치고, 고되어 죽을상을 짓고 있는 이들 모두의 역할은 단순하다.
화살받이.
이틀 후 바이란에 도착하게 되면, 이들은 황금갑옷의 정병들과 위치를 바꾸어 선두에 서게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래서야 화살받이로도 써먹을 수 없겠군.’
화살받이들과 같은 대열에 있는 이등병 아스.
하층민답지 않게 밝은 금발을 지닌 그가 냉소했다.
‘행군을 따라가기만으로도 벅찬 이들에게 태양 아래 번쩍이는 황금 갑옷은 눈과 머리를 괴롭히는 장애물이오, 둥둥 울리는 북소리는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소음에 불과하다. 바이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들의 정신력은 한계를 맞이할 거야.’
하지만 루실리브 공작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일개 병사들의 속사정 따위, 존귀한 입장의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장엄한 행군이 도리어 병사들에게 부담감을 안겨줄 수도 있단 사실을 그는 생각조차 못했다. 애초에 천민들은 그저 밥이나 챙겨주면 그걸로 감사하고 절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존재라고 그는 믿었다.
이를 무능하다고 비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극히 귀족적인 사고방식일 뿐.
‘과거의 나도 이랬을까?’
육포도 아니고 딱딱하게 굳은 보리빵을 간신히 씹어 삼킨 아스가 장담했다.
‘뭐, 어찌됐든 다음 야영지에서 대량의 탈주병이 발생하겠군.’
그때 첫 번째 기회가 오리라.
***
에트날 왕국의 거인이라고 하면 스테임 후작과 루실리브 공작을 뜻한다.
스테임 후작은 척박한 북부를 개척하고 부흥시킨 선구자였고, 루실리브 공작은 타고난 혈통을 철저히 이용할 줄 아는 수완가였다.
두가 남작, 라트 백작, 카리온 백작, 베라 후작을 비롯한 쟁쟁한 제후들의 군대가 한 곳에 집결한 것도 루실리브 공작의 위명 때문이었다.
이들이 누군가?
에트날 명문무가의 주인들로서 전원 검호의 경지를 이룩하고 용맹한 정병까지 거느리고 있다.
죽은 렌 왕자의 대신으로 왕위에 올랐을 뿐인 아스란 국왕의 현재 입지로는 이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과연, 공작각하께서 친히 군대를 지휘하시니 위풍당당함이 이를 데가 없습니다.”
루실리브 공작의 막사.
2천의 철갑기마대와 5천의 방패병을 원군으로 이끌고 온 라트 백작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첨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탄이었다. 그는 황금 정병을 앞세운 군대의 행렬을 무척 멋지다고 생각했다.
반면 베라 후작은 염려를 보였다.
“병사들의 갑옷을 도금하느라 상당한 자금을 지출하셨으리라 보는데요… 과한 낭비가 아니었을까요? 평범하게 진격했더라도, 이만한 병력이라면 바이란과 파트리안 따위 우습게 점령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루실리브 공작이 큭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베라 후작은 통이 작군. 도금이라니? 내 사병들이 무장하고 있는 갑옷은 순수한 황금으로 제작한 갑옷이외다. 천하의 루실리브 공작이 이끄는 군대가 평범해서는 안 되지. 안 그렇소?”
“예…?”
베라 후작을 비롯한 자리의 모든 귀족들이 화들짝 놀랐다.
행렬의 선두에 서는 황금 병사들.
즉, 루실리브 공작의 사병들은 그 숫자가 무려 1만이었다. 한데 그들 전원에게 순수한 황금 갑옷을 무장시켰다니? 대체 얼마나 큰돈을 썼단 말인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좌중 모두를 쓱 둘러본 루실리브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말이 갑옷이지 실상 방어력은 형편없는 장신구에 불과하오. 황금이 부족해서 갑옷을 얇게 만들 수밖에 없었거든.”
“…허면 공작각하의 사병들은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조심스레 말하는 베라 후작에게 루실리브 공작이 반문했다.
“내 병사들이 위험할 일이 왜 있겠소? 후작을 비롯한 이 자리 제후들이 이끌어온 일당천의 정병들이 전쟁을 순식간에 끝내줄 것이 아니오? 내 병사들이 나설 차례나 있으려나?”
옳은 말이다.
루실리브 공작의 부름에 호응해 모인 제후들.
이들의 목표는 당연히 전쟁에서 큰 전과를 세우는 것이었다. 기껏 참가한 전쟁에서 활약하지 못해서야 망신에 불과했다. 군대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하여 반란군의 거점들을 순식간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암요, 암요. 반란군의 잔당 따위, 우리의 군세만으로도 눈 깜짝할 새 도륙하고 짓밟을 수 있지요. 공작각하의 위대한 병사들이 행군의 사기를 높여주므로 우리 병사들도 용기백배할 것입니다.”
“하하! 내 의도가 바로 그거요! 아군의 사기를 높여서 전쟁을 더욱 더 유리하게 만드려는 게지! 암!”
“과연 공작각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이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루실리브 공작의 의도는 무척 훌륭한 것이었다.
10만 대군 중 절반 이상이 오합지졸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가치가 하락하는 건 아니다. 화살받이로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 가장 큰 문제거리로 거론되고 있는 아슈르 백작의 마법을 소모시키는 용도로도 충분할 정도다.
대량의 화살받이를 내세우고 정병들로 적을 친다면 전쟁에서 필승이었고, 정병들의 사기를 높이는 건 무척 주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루실리브 공작이 1만의 사병에게 황금 갑옷을 지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국왕이 하사한 군비를 일부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탓에 10만 대군의 식량 보유량은 보름치밖에 안 됐다. 애초에 확보했던 세 달치 식량 중 대부분을 루실리브 공작이 팔아버렸다.
그리고 이는 불안한 사태를 유발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병장기를 무장한 채, 온종일 힘든 행군을 하였던 병사들.
한계를 초월하는 체력 손실로 인해서 잔뜩 지쳤던 그들의 불만이 변변찮은 식사를 배급받게 되자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강제로 징집 된 마당에 식사마저 허술하니 열이 안 받겠는가?
“공작각하! 탈주병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막사로 뛰어 들어온 기사의 외침에 루실리브 공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니, 왜?”
불가촉천민 따위들에게 조국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었건만, 어째서 탈주를?
어리둥절해하는 루실리브 공작을 대신해서 베라 후작이 기사에게 명령했다.
“모조리 잡아서 처형해라! 탈주병의 최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병사들에게 철저히 각인시키도록!”
“예!”
명령을 받든 기사가 즉각 뛰쳐나갔다.
이날 탈주에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붙잡혀 처형당한 병사의 숫자가 무려 1,831명.
이들 전원 정규군이 아닌 하층민 출신의 강제징집 대상자들이었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보지만 결국 형장의 이슬이 되어 사라지는 그들의 끔찍한 최후.
사태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 이등병 아스에게 파르트의 선임병사들이 다가와 말했다.
“너는 혹시라도 탈주할 생각 따위 마라. 그나마 우리 파르트는 비정규군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 거야. 항상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무섭다고 도망쳤다가는 도리어 저렇게 죽어버리는 수가 있으니깐 살고 싶으면 끝까지 버텨라.”
“차가운 길바닥에 나뒹구는 것보다야 마른 빵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잖아?”
“이등병 아스. 잘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아스의 시선은 저 멀리, 루실리브 공작의 막사에 고정되어 있었다.
‘공작 본인이 움직이질 않으니 경비에 틈이 생기질 않는군.’
루실리브 공작의 근위대는 제국 흑기사단보다 수준이 몇 단계나 아래였지만 숫자가 워낙에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공작의 주변을 지키는 귀족들에게 있었다.
그들 전원 제법 상당한 포스를 발휘하고 있었으므로 아스는 무턱대고 함부로 덤벼들 수가 없었다.
‘다음 때를 기다려보자.’
금일 발생한 사건은 병사들의 마음에 불안감과 두려움을 심어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병사들의 사기가 대폭 저하됐다.
내일은 훨씬 더 많은 탈주병이 발생하리라는 것이 아스의 예상이었다.
***
바이란이 큰 위기에 봉착했다.
동서남북의 모든 성문 바로 앞까지 적군의 진격을 허용한 것이다.
성벽 위 템빨단의 궁병들이 쏘는 화살은 이제 처음과 달라 강하지도, 빠르지도 않았다.
“너희들 부모님 단체로 수족냉증에 걸리셨다고 한다!! 어서 집으로 가서 부모님 손발에 입김 호호 불어드려라!!”
적군의 심장을 후벼 파고 불안하게 만들던 후로이의 외침도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어느덧 숫자가 1만까지 줄어든 에트날의 선봉대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고 어떻게든지 바이란의 성문과 성벽을 부수고자 사력을 다했다.
“큰일이네요.”
쿠웅-! 쿵!!
적의 공성병기가 성문을 연달아 후려치자 성문의 내구력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접속제한 시간이 끝나자마자 게임에 접속한 유라의 고운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적의 진입을 허용하는 순간 끝이에요.”
유라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이 수십 명의 적군을 한 번에 상대할지언정 그 외 수천 명은?
템빨단 병사들을 도륙하고 바이란의 모든 것을 짓밟을 것이다.
“제길… 성 밖으로 나가서 적의 기세를 죽여 놓고 싶지만, 지금 성문을 열었다가는 적의 진입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테고.”
폰이 바득, 바득 이를 갈았다.
이미 그는 스태미나가 고갈 직전인지라 한계였다. 성 밖으로 나가봤자 스킬도 못 쓰고 평타만 휘두르다가 역으로 당할 공산이 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라와 폰에게 라우엘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남은 병력을 이끌고 파트리안으로 퇴각하세요.
폰이 반발을 일으켰다.
-백성들은 어쩌고?
-바이란의 백성들 또한 결국은 에트날의 백성. 에트날군이 굳이 백성들을 상대로 살상을 일으키진 않을 겁니다. 안심하고 어서 퇴각하세요.
-저들의 입장에선 반란분자인 그리드를 섬겼던 백성들이다. 저들이 정말로 이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승전의 흥분에 도취되어 약탈과 폭행을 자행할 우려는 있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백성들까지 챙기려다가 애써 키운 병사들을 잃게 될 겁니다.
-너…! 그리드와 우리를 믿고 섬겼던 사람들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는 거냐!!
바이란은 본래 체다카 길드의 영토였다. 체다카 길드 출신인 폰은 바이란의 백성들과 아주 오래 전부터 함께해왔다. 이들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라우엘도 그 마음을 헤아렸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다. 개인의 입장을 일일이 봐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수천의 백성을 지키려다가 종국에는 레이단의 수만 백성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만. 냉정해지시죠?
-크윽…!
폰이 이를 갈았다. 그는 라우엘의 냉정한 말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영 불쾌했다.
하여, 결국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뱉고 말았다.
-애초에 네가 무능한 탓이잖아! 뭐? 우리의 전력이면 적의 공세를 끝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적이 10만 단위의 군대를 운용하는 건 한참 후나 될 거라고? 개소리! 네 예상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틀렸어!! 이 무능한…!
흥분해서 소리치던 폰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것이다.
라우엘이 누군가!
누구보다도 템빨단을 위해서 노력해온 인물이다. 혼자서 늘 막중한 책임을 떠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담을 안겨준 것이 바로 우리다. 우리가 부족해서 그를 충분히 돕지 못했다. 한데 상황이 안 좋게 됐다고 이제 와서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니?
-…미안하다.
폰이 진심으로 사죄했고, 라우엘은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진짜로 미안해해야하는 사람은 바로 라우엘이었으니까.
-아니요,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당신들을 속였어요.
-…?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죠. 저는 당신들이 치열하고 처절함을 연기해주기를 바라서 당신들에게 한 가지 계획을 비밀로 했었습니다.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지?
이해하지 못하는 폰에게 라우엘이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전했다.
-지금 저는 라인하르트로 향하고 있습니다.
-뭐…!
라인하르트는 에트날 왕국의 수도다.
라우엘은 대부분의 병력을 파견하고 빈집이 된 그곳을 탈탈 털 작정이었다.
-이 전쟁은 곧 끝납니다.
같은 시각, 의문의 장소.
스틱세이는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각혈을 토했고, 그리드는 그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심장병이 발작하다니.’
수십 분 전.
파트리안에서 매스 텔레포트를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스틱세이에게 각인 된 미식룡 레이더스의 저주가 피어오르면서 스틱세이는 마나의 운용에 실패했다.
그 탓에 매스 텔레포트의 전개가 도중에 어긋나 그리드와 스틱세이는 알 수 없는 장소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하필이면 귓속말도 안 되는 장소야.’
떨어져도 요상한 곳에 떨어졌다. 새카매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인스턴트던전이다.
내가 없는 동안 바이란은? 유라와 동료들은?
그리드는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생사를 넘나들고 있는 스틱세이에게 굳이 심경을 내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약을 복용한 스틱세이가 회복되기를 그리드는 잠자코 기다렸다.
‘신화급 활을 제작한 대가로 찾아온 불운인가…’
미식룡인지 나발인지, 그리드는 놈의 명치를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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