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7권 - 2화
“그거 평타야.”
“뭣!!!”
평타라니?
부바트에게는 탱커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만약 방어력 랭킹이 존재한다면, 본인이 랭킹 50위 안엔 들 거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그런 자신에게 무려 1만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힌 공격이 고작 평타라고?
“개소리!!”
지슈카가 날린 화살은 무려 大등급의 화상 데미지와 스플래쉬 데미지까지 동반했다.
세상에 어떤 평타가 그런 막강한 기능을 지닌단 말인가? 최강의 레전드리 클래스 <검성>으로 전직한 크라우젤의 평타조차도 이 정돈 아닐 것이다.
이건 당연히 스킬 공격이다. 평타일 리가 없다.
“나를 바보 취급해?”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던 부바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슈카가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기며 격분한 것이다.
당장 성벽 위로 달려들 기세인 그를 야크 길드원들이 말렸다.
“어서 도망치셔야죠!”
“저딴 저급한 도발에 넘어갈 필요 없습니다!”
“크으…!”
부바트가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자칫 죽을 수도 있음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지슈카! 나는 네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다! 알아둬라! 1대1로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면 너 따위, 지금쯤 레가스와 나란히 땅에 처박혀있었을 것이다!”
부바트는 템빨단이 숫적 열세에 놓여서 힘든 상황임을 알고 이번 전쟁에 참전했다. 그가 레가스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도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압박을 넣은 덕이 컸다.
하지만 전세가 완전히 기울고 이제 자신이 불리한 입장이 되자 정정당당을 논하고 있다.
양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그가 전쟁 내내 지슈카에게 과민반응하고 있는 이유.
그건 바로 과거의 사건에 있다.
과거, Satisfy가 오픈하고 4개월이 지났을 무렵.
듣보잡이었던 그리드는 아직 40레벨대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때, 100레벨을 달성한 부바트는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퀘스트의 내용은 <트윈 트롤> 300마리를 혼자서 일주일 내에 사냥하는 것.
아직 크래셔로 전직하기 전, 평범한 탱커였던 부바트는 열심히 트윈 트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어째선지 사냥터에 트윈 트롤이 보이지가 않았다. 이미 신궁으로 위명을 떨치고 있었던 지슈카가 트윈 트롤들을 살육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에 부바트는 초조해졌다.
재생력 강한 트윈 트롤을 일주일 내에 300마리 사냥한다는 것, 공격력이 약한 탓에 성공가능성도 낮았건만 지슈카 때문에 몬스터 자체가 보이질 않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지슈카를 뒤치기해서 죽인 다음 사냥터를 확보하리라고!
사정을 설명하고 사냥터를 양보해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을, 굳이 왜?
부탁이라는 것을 하기에는, 당시에도 랭커였던 부바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부바트는 PK시스템이야말로 Satisfy의 백미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래서 결과는?
뒤치기 했다가 실패하고 역으로 죽었다.
아직 전직을 하지 못했던 부바트는 이미 전직을 완료한 하이랭커 지슈카의 상대가 못 됐다. 신궁의 활솜씨에 유린당하여 처참하게 잿빛으로 산화했다.
한 번?
아니, 무려 9번이다.
지슈카는 감히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부바트를 쉽게 용서하지 않았다. 트롤 사냥터를 떠나지 않고 있다가 부바트가 오는 족족 계속해서 쏴 죽였다.
덕분에 부바트는 나흘 연속 2회 사망 페널티를 받고 게임 접속도 못 했었다. 전직 퀘스트는 당연히 실패했다. 실패할 경우 열흘이 지나야지만 다시 받을 수 있는 전직 퀘스트를 말이다!
‘빌어먹을 계집!’
지슈카에게 잘못 찍힌 까닭에 약 보름이라는 시간을 날려야했던 부바트.
아직 오픈 초창기였던 Satisfy에서 보름이란 공백은 무척 치명적으로 작용했고, 이후 그의 아이디는 한동안 랭커 목록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의 일만 떠올리면 부바트는 여전히 치가 떨렸다.
지슈카에게 9번이나 꿰뚫렸던 미간이 여전히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진짜 두고 보자.’
꽈드득! 이를 간 부바트가 파트리안 성벽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과거의 악연이고 나발이고 간에, 우선은 도망치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므로 자존심을 챙길 겨를이 없다.
후다닥 도망치는 그의 귓가로 지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보내준데?”
파앙-!
지슈카가 또 한 번 화살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불화살이었다.
지슈카가 평타라고 주장하는 그것.
“두 번 당할 쏘냐!”
부바트가 이번에는 철벽 스킬을 전개했다.
지속 시간동안 받는 피해량을 무려 절반이나 줄여주는 최강의 방어 스킬이었다.
한데…
쩌어어어엉-!!
손목의 소형방패로 화살을 막아내는 부바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5,695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화살에 맞은 부위가 타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초당 2,500의 생명력을 손실하는 화상 데미지를 12초 동안 입습니다!]
“크윽!!”
아니, 어째서 데미지 감소율이 이렇게 적지?
‘설마, 고정 데미지가 섞여있나?’
더군다나 이 엄청난 화상은 왜 맞을 때마다 걸린단 말인가?
‘화상 발동 확률이 대체 얼마나 높길래?’
거기에다가 스플래쉬 데미지까지…
실로 뛰어난 공격 스킬이다.
당연히 재사용 대기 시간도 길 터.
아니, 애초에 지슈카의 스태미나는 한계였었다. 약간 회복했을지언정 이미 스킬을 2번이나 연속으로 쏜 이상 다시 고갈 되었을 것이다.
황급히 화상약을 꺼내 먹은 부바트가 길드원들에게 소리쳤다.
“꾸물대지 말고 어서 퇴각해라!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
처음 등장할 때 큰 힘을 소진한 탓인지 감감무소식인 그리드와 아슈르 백작.
그들의 표적이 되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된다.
지슈카를 무시한 부바트가 길드원들과 함께 퇴각 속도를 높이는 그때였다.
파앙-!
파파파파파파팡!!
파트리안 성벽 위로부터 연속적인 파공성이 들려왔고 부바트는 흠칫 놀랐다.
‘또?’
이건 화살 날아오는 소리다.
그것도 한두 발이 아니라 족히 열 발은 되는.
어느덧 거리가 400미터는 벌어진 성벽에서부터 여기까지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궁사?
그가 알기로 지슈카밖에 없다.
“설마!!”
등 뒤로 시선을 돌려보는 부바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자신에게 큰 피해를 입혔던 불화살이 이번에는 무려 10발이나 날아오고 있음이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미친!!”
계속 스킬을 쓰다니? 스태미나가 고갈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은 위장이었나?
‘아니, 애초에 저렇게 강력한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왜 이렇게 짧은 거지?’
어쩌면 평범한 스킬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홍염 궁사의 궁극기 중 하난가?’
그것 참 더러운 궁극기다.
질색한 부바트가 다급히 외쳤다.
“산개해라!!”
뭉쳐있다가는 스플래쉬 데미지에 죄다 큰 피해를 입고 말 것이다.
불안감에 휩싸이며 새로운 방어스킬을 전개하는 부바트에게 내내 잠자코 있던 제프가 피식 웃어주었다.
“나를 잊었어?”
기공사 3차 전직 클래스 역천.
날아오는 투사체를 구속시킨 뒤 상대방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가능한 존재.
막말로 궁사의 하드 카운터인 그에게는 또 다른 비장의 기술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적의 원거리 스킬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기의 장벽>.
역천의 궁극기 중 하나다.
“뒤는 걱정 말고 퇴각하면 된다고.”
느긋하게 읊조린 제프가 대량의 마나를 소모, 십여 발의 불화살이 날아오는 궤도에다가 기의 장벽을 펼쳤다.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의 등 뒤에 펼쳐진 이 화려한 기의 장벽이, 지슈카의 불화살을 모조리 소멸시키고 그녀에게 절망감을 안겨줄 거라고.
하지만 현실은 정 반대였다.
절망감을 느끼는 쪽은 지슈카가 아니라 도리어 제프였다.
슈슈슈슈슈슈슈슉!!
“헉?”
기의 장벽과 맞닿은 불화살들…
소멸하기는커녕 아무런 저항 없이 장벽을 통과한다?
이는 즉!
“스킬이 아니라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제프.
그리고 제프만 믿고 있던 부바트와 길드원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날아드는 불화살에 적중당하며, 동시에 발생하는 폭발에 휩쓸려버린다.
“크아아아아악!!”
수천 개의 불덩어리 폭격 이후.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비교적 적막해졌던 전장에 비명이 메아리쳤다.
“이 개새끼! 어째서 막지 않은 거냐!!”
길드원들 중 일부가 큰 피해를 입었음을 확인한 부바트가 제프의 멱살을 쥐었다.
부바트는 제프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 그라면 지슈카의 스킬을 당연히 쉽게 차단해줄 줄 알았다.
한데 차단하기는커녕 고스란히 통과시켜주다니?
혹시 템빨단과 한통속인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지경이다.
극도로 분노하는 부바트에게 제프가 넋 나간 표정으로 설명했다.
“저거 스킬 아니야… 기의 장벽으로는 못 막아..”
“스킬이 아니라고? 그럼 뭔데!”
“평타.”
“이익!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헛소리만! 허? 허억?”
제프의 멱살을 쥔 손에 더 큰 힘을 싣던 부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트리안의 높디높은 성벽 위로부터 다시 한 번 불화살이 쏟아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족히 열 발은 되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스킬이냐고!!”
이토록 강한 스킬이 대체 어떻게 재사용 대기 시간까지 짧단 말인가!
납득하지 못하는 부바트 일당에게 불화살이 도달하였다.
쿠콰콰콰콰콰콰콰쾅!!
강력한 폭발이 또 다시 전장을 흔든다.
부바트 일당이 밀집해있는 지역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
주작궁과 완벽한 궁합을 이루고 종전과 비할 바 없이 강력해진 지슈카.
깔깔깔깔깔!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활을 쏴대는 그녀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길에 따스함이 깃든다. 워낙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지라 자칫 위협적으로 보이는 눈빛이 오늘따라 한없이 상냥했다.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은 또 처음보네.’
사실, 그리드는 늘 지슈카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체다카 길드를 넘겨달라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준 것으로 모자라서, 이후에도 쭉 자신을 보필해주고 있는 그녀다. 그리드는 그녀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보답할 기회가 적었다. 그녀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면 아이템 등급이 낮게 뜨는 경우가 유난히 많았으니까.
‘레전드리 활 하나 못 만들어줬었지.’
하지만 이번에 신화 등급의 활을 선물해주게 됐다.
지슈카가 자신에게 베풀어주었던 호의와 희생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게 된 것 같아서 그리드는 너무 뿌듯했다.
‘사실 처음에는 내가 쓸까도 싶었지만.’
그리드의 궁술에는 한계가 있다.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어있다는 것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반면 지슈카는 궁술의 위력을 높여주는 전용 스킬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고, 심지어 불속성 궁사였기 때문에 주작궁과 궁합이 엄청 잘 맞았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주작궁은 지슈카에게 넘겨주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템빨단이 강해지고 결과적으로 그리드에게 득이 되어 돌아오게 되어있다.
콰쾅!
콰콰콰콰콰쾅!!
활 한 자루로 전장을 초토화시켜버리는 지슈카.
앞으로 무수한 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 그녀가 그리드는 너무 든든했다. 신화급 아이템을 만든 보람이 철철 넘쳤다.
‘이런.’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드를 뒤늦게 자각한 지슈카가 얼굴을 붉혔다.
주작궁의 위력에 매료된 나머지, 곁에 그리드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적군을 너무 기쁘게 학살했다.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여자를 좋아할 남자는 없겠지?’
부바트 일당마저 잿빛으로 산화시킨 후.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이는 지슈카의 머리카락을 그리드가 쓰다듬어주었다.
“멋졌다. 말 그대로 살상병기가 됐네.”
“살상병기…”
하필이면 좋아하는 남자에게 살상병기라는 말을 듣다니!
지슈카는 심경이 복잡해져서 더욱 더 풀이 죽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
무슨 뜻일까?
그리드의 크고 두터운 손을 멀뚱멀뚱 바라보던 지슈카가 이내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손 잡아달라는 걸 보면 그리드도 나를 좋아하게 된 걸까?’
상상의 나래를 펼친 지슈카가 그리드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으려는 순간.
깜짝 놀라면서 뒤로 손을 숨긴 그리드가 요구했다.
“아니, 돈 달라고. 활 값.”
“…아.”
맞다, 계산해야지.
지슈카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굉장한 주작궁의 가치를 자신이 감히 책정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재산을 다 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결국, 고민 끝에 그녀가 말했다.
“결혼…할래? 내 전 재산을 혼수로 바칠게.”
“…그것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리드가 스틱세이에게 눈짓했다.
“우선 바이란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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