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 21화
‘주작궁은 역대 최강의 무기가 된다.’
그리드는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최선을 다했으니까,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고 싶단 심리에서?
아니, 그런 막연한 바람으로 비롯된 믿음이 아니다.
여러 가지 합당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품을 수 있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첫 번째 근거.’
도안의 퀄리티가 역대 최고로 높다. ‘신화 등급’일 가능성이 높은 <주작궁 원본>보다 기능이 뛰어나다고 명시되었을 정도다.
‘두 번째 근거.’
제작에 사용되는 재료의 질이 역대 최고로 훌륭하다. 신선의 나무라고 불리는 백린목과 주작의 숨결. 이중 특히 주작의 숨결은 아다만티움보다 상위 개념의 재료로 봄이 옳다.
아다만티움은 신들의 세상에서 채집할 수 있는 광물. 즉, 결국 광물에 불과한 반면 주작의 숨결은 무려 신이 토해낸 부산물. 어찌 보면 ‘신의 일부’였으니까.
‘세 번째 근거.’
그리드 본인의 집중력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발휘됐다. ‘극도’로 집중할 때만 발동하는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효과가 지난 3일 동안 무려 4번이나 발동했을 정도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장장이의 인내심 덕분에 지치지 않고 쉴 틈 없이 작업에 열중할 수 있었어.’
역대급에 이은 역대급과 역대급의 향연!!
최고의 상황들이 중첩되어 최선의 결과가 도출 된다.
띠링~
[<주작의 숨결>을 더 이상 제련할 수 없습니다. 이미 최고의 형태입니다.]
<강화 된 주작의 숨결>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주작의 기운을 강화시켰습니다.
인벤토리에 지니고만 있어도 화염 내성이 4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강력한 주작의 기운을 불어 넣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불 속성이 강한 아이템에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무게:2
제련이 끝난 주작의 숨결은 전보다 더욱 더 강력한 불꽃을 내포하고 있었다. 홍옥 속 불꽃이 당장이라도 승천하고 싶다는 듯이 활활 날뛰었다.
‘이제 활만 잘 만들면 된다.’
그리드는 주작의 숨결을 용광로에 넣고 달굴 때마다 남는 시간을 적절히 활용해왔다. 모든 기술을 총동원해서 백린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미노타우르스의 뿔 등의 부가적인 재료들을 첨가해서 활대와 시위를 만드는 일만 남았다.
‘괜찮아. 내가 없어도 애들은 잘 버틸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초조해하지 말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리드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번 아이템 제작에서 평소보다 높은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평소와 다른 마음가짐에 있었다.
위기에 빠진 동료들과, 이를 도울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자신.
그리드는 최악의 사태에서 발생하는 근심과 초조함을 억누르고자 계속해서 마음을 다스려야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상승했다. 각종 도구를 다루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치이이이익!!
“…”
달궈진 백린목을 물에 식히면서 발생하는 수증기 너머 엿보이는 그리드의 눈동자.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이 견고하게 빛난다. 마치 밤하늘의 별빛 같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좋아.”
또 한 번 발동하는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
눈 씻은 듯이 사라지는 피로감과 끓어오르는 체력, 그리고 예리한 칼처럼 반뜩이는 집중력이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자정이 지나고, 아이템 제작 개시 나흘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 그리드를 보면서 화이트와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은 무한한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발동하였습니다!]
반가운 알림창을 마주한 그리드가 드디어 제작 마무리 단계에 돌입했다.
완성 된 주작궁에 주작의 숨결을 귀속시켰다.
그러자 순백의 활 주변으로 불꽃 같은 적색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레전드리 아이템이 완성되었습니다.’라는 알림창이 뜨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레전드리 등급으로 뜨기를!
…이라고 바라는 것은 너무 과한 욕심일 수도 있으니까 유니크 등급으로 떠도 감지덕지다.
‘그럼 아이템 승급으로 레전드리를 만들 수 있어.’
그리드의 마음이 다소 약해지는 그때.
파아아아아앗!!
화려한 임팩트와 함께 주작궁이 주작의 숨결을 완전하게 받아들였고, 그러자 순백의 활대가 적색에 가까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한 색상이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
예기치 못한 사태라니?
기대감에 사로잡혔던 그리드의 등골이 한 순간 서늘하게 식었다.
‘대체 또 무슨 엿 같은 상황이기에…?’
게임하면서 뒤통수를 맞아본 경험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리드는 늘 기대를 배신 당해왔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제작한 아이템의 등급이 레전드리 이상으로 측정됩니다.]
[아이템 제작에 사용 된 도안, 재료, 그리고 제작자의 집념이 기술의 한계를 깨뜨린 결과입니다.]
“…아!!”
그리드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교황 선거 에피소드 당시.
신화급 무기 <리파엘의 창>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과정에서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은 ‘신의 무기를 목격한’과 ‘신의 무기를 이해한’으로 순차적으로 승급한 바 있다.
그리고 덕분에 그리드는 ‘매우 희박한 확률’로 신화 등급(모작)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매우 희박한 확률이었고, 실제로 발동한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신화 등급 모작이 탄생하게 생겼다.
그리드는 기쁨을 넘어서 전율했다.
기대를 아득히 초월하는 결과를 맞이하였으니 감격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실제적인 결과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은 신화 모작 등급이 아니었다.
[축하합니다!]
[플레이어 최초로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하였습니다!]
[칭호 <신이 주시하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신의 무기를 이해한)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이 <(신의 기술을 넘보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로 승급합니다!]
“헐.”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작도 아니고 순수한 신화 등급이라고?
너무 놀라서 심장이 멎을 뻔했다. 머리가 새하얘진다.
넋 놓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로 갱신 된 스킬 정보가 떠올랐다.
<(신의 기술을 넘보는)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Lv.8
높은 확률로 레어~에픽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한 확률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희박한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 조건이 충족 될 경우, 매우 희박한 확률로 신화 등급 모작이나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제작 아이템의 모든 능력치가 21% 상승합니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모든 능력치가 10, 대륙 전역 명성이 1,000 오릅니다.
*신화 등급 아이템의 제작 횟수가 3회가 될 때마다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현재 1/3)
“…”
너무 기쁜 나머지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한 순간 정신을 차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갱신 된 스킬이 그리드에게 또 새로운 페널티를 안겨주었으니까!
“아니 염병… 이젠 레전드리 아이템을 만들어도 스탯 안 주는 거야?”
아니, 이건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닌가?
레전드리 아이템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렇게 대우를 안 해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신화 등급 아이템을 고작 한 번 만들었답시고 얻게 된 대가가 너무 크다.
그리드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어째 앞으로가 더 불안하다…’
신화 등급의 아이템을 3회 제작할 때마다 발생한다는 특수한 일.
왠지 또 엄청난 페널티를 줄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어휴, 진짜 염병 이거 한국산 게임이라서 그래.”
플레이어한테 너무 인색하게 군다.
매달 꼬박꼬박 정액료 지불하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고객’을 대우해주기는커녕 호구 보듯이 한다. 전형적인 한국 게임사의 태도다.
완성 된 주작궁의 상세정보를 확인할 생각도 못하고 연신 한숨만 내쉬는 그리드의 귓가로 소란이 들려왔다.
“아, 악마…!”
“뾰족 귀의 악마다아아!!”
“…?”
대장간 입구로부터 들려오는 소란이었다.
하얀 망치 대장장이들의 외침으로부터 두려움이 느껴졌다.
‘뾰족 귀의 악마?’
도대체 어떤 괴물이 나타났기에 대장장이들이 저리도 겁을 먹는단 말인가?
좌시할 수 없었던 그리드가 <검은 귀신>을 무장한 후 작업실을 나갔다. 그리고 반색했다.
“스틱세이!”
대장장이들을 겁에 질리게 만든 뾰족 귀의 악마.
다름 아닌 대현자 스틱세이였다.
그리드가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존재!
근데…
“당신 왜 악마취급 받는 거야?”
엘프. 그것도 하이엘프란 고귀한 존재이다.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며 마족과 적대해온 그들은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한데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은 그를 악마로 치부하고 있었으니 이상한 일이다.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손을 내밀었다.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쩌면 이곳 동대륙은 이미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놓인 것일 수도 있겠군요. 자, 우선 돌아가시죠.”
지금 당장은 동대륙에 대한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다.
동료들을 구원하고 영토를 수호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스틱세이의 손을 붙잡았고, 두 사람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
“일국의 거점이라는 것은 전부 다 이런 수준인가…?”
7대 길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야크 길드.
그곳의 마스터인 부바트 또한 작은 영지를 다스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요새도시 파트리안의 높디높은 성벽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성벽 레벨이 최소 8은 되겠는데.’
내구력이 최소 100만 단위일 것이다.
100~200레벨대 유저들의 마법이나 스킬 폭격 따위로는 흠집도 내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다.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최소 3차 전직한 마법사 직업군과 레벨 높은 공성병기의 화력이 필요했다.
‘나도 이런 요새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군.’
상당한 인력과 자본력을 갖춘 야크 길드조차도 성벽 레벨을 하나 올리는데 5개월을 소비했다. 물론, 성벽의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다음 레벨 업에 필요한 자본과 경험치도 늘어난다.
말인 즉, 현재 시점에서 플레이어는 8레벨 성벽을 쌓을 수 없단 뜻이다.
‘한데 그리드는 그걸 공짜로 손아귀에 넣었단 말이지… 쯧.’
레이단 침공전 당시, 아슈르 백작이 그리드의 편에 섰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리드는 아슈르 백작을 진즉부터 회유해놓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런 엄청난 요새를 손아귀에 넣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만…’
그리드는 너무 광범위하게 뛰어난 인물이다.
단순히 무력이나 기술만으로 정점에 오른 다른 하이랭커들과는 급이 틀리다.
‘NPC의 마음조차도 사로잡는 인망. 그게 바로 그리드의 가장 큰 강점…!’
그리드를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한없이 앞서나갈 것이 분명해서 두렵다. 개인적인 원한을 떠나서, 같은 하이랭커 경쟁자로서 견제해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트날 왕국군에는 3차 전직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기 때문이다.
‘공성병기를 잘 이용해야하는데.’
에트날 왕국군 진형에 배치되어 있는 투석기는 무려 12대.
하지만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파트리안에는 제드노스, 라엘라, 그리고 유페미나 등의 쟁쟁한 마법사 랭커들이 머물고 있었고 그들의 마법이 투석기의 공격을 비교적 쉽게 무력화시켰다.
특히 유페미나라는 작은 소녀가 문제였다.
모든 속성의 최상급 방어마법을 적재적소에 사용하고 있었다.
‘뭐 저딴 괴물이… 설마 전설의 대마법사 클래스라도 얻은 건가?’
혀를 내두른 부바트가 에트날군의 선봉대로 시선을 돌렸다.
수천 명의 보병이 파트리안의 성벽을 오르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 중이었지만, 쏟아지는 화살과 마법, 그리고 돌무더기에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레가스가 이끄는 템빨단의 특공대가 문제였다. 그들은 간간히 성밖으로 출진해서 에트날군의 선봉대를 헤집고 다녔고 이때마다 에트날군은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슈카가 지쳤다는 거다. 그녀가 휴식을 위해서 자리를 비운 지금이야말로 레가스 놈을 처치할 적기야.’
레가스 특공대를 해치우면 에트날군 선봉대가 파트리안 성벽을 오르기가 무척 수월해질 것이다.
판단한 부바트가 제프와 랄프 형제에게 눈짓했다.
“우리도 슬슬 본격적으로 나서볼까?”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다.”
“기껏 바쁜 몸 이끌어 왔는데 구경만하고 있을 수는 없지.”
템빨단의 딜러들은 대부분 지치거나 공성병기를 견제하느라 바쁜 상황.
안전하게 날뛸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자 부바트와 제랄프 형제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표적은 레가스다!”
“진로를 방해하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각자 이끌어온 길드원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부바트와 제랄프 형제!
앞길을 가로막는 에트날군을 망설임 없이 죽이고, 달린 끝에 레가스에게 도달한다.
에트날군과 전투 중이던 레가스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피해요!!”
은기사 길드 출신의 템빨단원들.
레가스를 든든하게 호위해주던 그들 30여 명이 레가스의 외침을 듣고 반응하려는 순간.
콰르르르르르르릉!!
천둥 같은 소리가 폭발하면서 땅이 들썩였다.
Satisfy 최고의 이니시에이터라고 평가 받는 부바트가 일으킨 지진이었다.
“으아아아악!!”
“히익!!”
레가스 특공대에 소속된 템빨단원들의 레벨은 평균 230.
그들이 부바트가 사용한 광역 CC기에 저항하지 못하고 모조리 전부 허공에 떠올라버리는 광경.
간신히 자리를 이탈해서 CC기를 피한 레가스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덥썩!
부바트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 떠올라있는 템빨단원 중 두 명의 안면을 손으로 부여잡는다.
씨익!
부바트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번졌고,
콰자작!!
부바트의 억센 손에 얼굴을 붙잡혔던 템빨단원 둘이 머리부터 지면에 처박혔다.
전세 역전의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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