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 19화
“이거 난처하게 됐군.”
레이단의 광활한 논밭.
피아로가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면서 밭일. 아니, 오러 수련에 매진하던 휴렌트가 초조해졌다.
템빨단이 대규모 전쟁을 진행 중이라는 뉴스를 접한 까닭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자신이 직접 일군 소중한 수련장이 전쟁에 휩쓸려서 엉망이 될까봐 걱정이었다.
“최근 몇 주 동안 분주하더라니… 전쟁 준비 중이었던 건가.”
그리드의 목숨을 노리고 레이단을 침략했던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한 것으로 모자라 큰 가르침까지 안겨준 피아로.
그가 일러준 수행법에 따라서 단련하다보니 자연히 일구게 된 이 수련장, 보통 소중한 것이 아니다.
내 오러가 개간한 땅에서 자란 곡식과 채소들을 볼 때마다 뿌듯했고, 이것을 먹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했…
“아니, 이게 아니지.”
내가 왜 이딴 생각을 하는 거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면서 속마음을 부정하는 휴렌트였지만, 어찌됐든 그의 수련장은 논밭이었고 그는 논밭을 지키고 싶었다.
피아로가 레이단으로 돌아왔을 때 무사한 논밭을 보여주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야 뻔하다.
“싸우는 수밖에 없지.”
골똘히 생각해본 휴렌트가 에트날 왕국의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동쪽에 왕성 라인하르트, 북쪽에 바이란, 남쪽에 파트리안, 서쪽에 레이단을 차례대로 주목했다.
‘라인하르트에서 레이단으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파트리안을 거쳐야하는군.’
파트리안을 경유하지 않는 이상 레이단과 라인하르트는 상호 교류가 불가능한 구조였다. 파트리안 외의 길목은 모조리 산맥이나 험지로 차단되어있었다.
‘이건 고의적으로 설계 된 지형이다.’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레이단의 서쪽과 파트리안의 남쪽에는 각각 사하란 제국과 가우스 왕국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즉, 외세로부터 왕성을 수호하는 역할로 세워진 요새가 바로 파트리안이라는 뜻이다.
제국이나 가우스가 에트날을 침공할 경우, 에트날은 이를 파트리안에서 요격할 계획으로 파트리안의 위치를 선정해 놨다.
‘파트리안이 천혜의 요새일 것은 자명한 사실. 한데 그걸 그리드에게 빼앗겼단 말이지?’
에트날은 골치 아플 것이다.
배반자 그리드를 처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트리안을 되찾아야 했지만, 천혜의 요새를 빼앗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 테니까.
‘두개국의 침공을 막을 수단으로 세운 요새를 한쪽 방향에서 공격해서야 공략이 어렵겠지. 아무래도 에트날은 바이란에 집중하겠군.’
우선 북쪽의 바이란을 점령한 후, 북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파트리안을 공격하는 것이 에트날의 최선이다.
에트날의 최우선 과제는 바이란의 점령일 것이라고 휴렌트는 확신했다.
“그럼 난 바이란을 지킨다.”
레이단의 논밭을 수호하기 위해서 결심한 휴렌트가 그 즉시 레이단을 떠났다.
한때는 검성을 꿈꿨으나, 오러의 가치를 깨달은 이후 오러 마스터의 궁극을 추구하게 된 인물.
제1차 국가대항전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그가 템빨단을 위해서 움직인다.
이는 천재 라우엘조차도 상정하지 못한 변수였다.
***
비밀 갱도를 통해서 R77부대를 잠입시킨 에트날 해군 사령부.
그들은 해군 최정예 부대인 R77이 당연히 큰 성과를 거두리라 믿었다.
적의 수뇌부를 암살하고 지휘계통을 마비시킨 뒤, 아군에게 승리의 발판을 마련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어째 분위기가 심상찮다.
본래라면 이미 4시간 전에 신호탄이 시야에 들어왔어야 하건만, 예정 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감감무소식이다.
전방의 코크로 섬은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설마 임무에 실패한 건가?”
그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의문을 누군가가 읊조렸다.
해군 제독 르벅이었다.
움찔한 참모진이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코크로 섬에 비밀 갱도가 있다는 사실, 나흘 전까지만 해도 왕가밖에 몰랐습니다. 반란군이 R77부대의 잠입에 대처한다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죠.”
“R77부대가 코크로 섬에 무사히 상륙한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들은 예정대로 임무를 수행 중일 겁니다. 다만, 실전에는 늘 변수가 따르는 법이니 다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겠지요.”
르벅이 눈살을 찌푸렸다.
“R77부대가 섬에 상륙한 이후 적에게 발각되어 역으로 당했을 가능성은?”
“제독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R77부대의 은밀성은 해군 제일입니다. 그들이 발각되었을 가능성은 결코 없습니다.”
“각하,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반드시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겁니다.”
“…흐음.”
르벅은 더 이상 초조해하지 않기로 했다.
R77부대의 실력과 비밀 갱도의 사용 등, 모든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R77부대의 작전 실패 확률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그리고 믿음에 보답하듯이.
퍼어어어엉-!
“오오…!”
코크로 섬으로부터 약속 된 신호탄이 터졌다.
신호탄의 색상은 청색.
적의 수뇌부가 궤멸하였으니 총공세를 가하라는 신호였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르벅이 전군에 명령했다.
“어차피 곧 다시 우리 영토가 될 섬에 괜한 상처를 남길 필요 없다! 전 함대 포격을 멈추고 전진해라! 전군 상륙하여 그 손으로 직접 적의 잔당들을 베어라!!”
수뇌부를 잃은 적의 저항은 경계할 수준이 못 됐다.
해안가의 요새들로부터 쏘아지는 대포와 마법은 전과 달리 체계적이지 못했고 조금도 위협적이질 않았다.
헛된 저항이랄까!
“전군 상륙하라!!”
“돌격!! 돌격이다!!”
별 피해 없이 해안가에 도착한 에트날 해군의 함선들이 일제히 병사들을 쏟아내었다.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병사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요새 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극검이 솔져에게 방긋 웃어주었다.
“네 말대로 청색 신호탄을 터뜨리는 게 정답이었군. 사실은 조금 의심했었는데 말이야.”
“이미 템빨단에 의탁하겠다고 마음먹은 몸이오. 거짓을 고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아주 좋은 자세야. 앞으로 평생토록 그 마음가짐을 유지하면서 갓리드를 보필하도록.”
“기회를 주어서 감사할 따름이오.”
극검에게 살해당했던 솔져.
즉시 부활한 그는 코크로 섬을 찾아와 투항 의사를 밝혔다.
에트날 해군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그가 왜?
에트날 왕국에 미래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틀전날 밤.
비밀 갱도를 통해서 잠입하였던 솔져는 전율에 휩싸였다.
비밀 갱도를 사전에 파악한 극검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마주한 순간, 템빨단의 정보력이 에트날 왕국 머리 꼭대기에 올라있음을 깨달았다.
솔져는 확신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는 쪽은 에트날이 아니라 템빨단임을.
그리고 이번 전쟁이 끝난 직후 템빨단은 국가단위로 발전하리라 보았다.
하여 결단을 내렸다.
템빨단에 의탁하여 그리드를 섬기고, 그의 나라에서 크게 한 번 출세해보겠노라고.
‘개국공신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하늘이 내려주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새로운 나라에서 군인으로 출세하리라!
한편, 극검 또한 솔져와 마찬가지로 잔뜩 들떠있었다.
‘신호탄을 터뜨리기 전에 시간을 끌어서 스태미나를 완벽하게 회복했고, 지상전에 약한 해군이 제 발로 상륙하게끔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거 어쩌면…’
모두의 예상을 깨고 코크로 섬 방위에 성공하는 거 아닐까?
그럼 진짜 대박 중의 초대박이다.
***
“호오라?”
제2차 보르네오 탈환전에 등장한 수에론.
성벽 위 템빨단의 궁병들을 영혼 창으로 공격한 그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격에 죽으리라 생각했던 궁병들이 생존한 까닭이었다.
‘그것도 생명력이 20퍼센트나 남았단 말이지?’
여느 게임이 그렇듯, Satisfy 또한 레벨 차이에 따른 강함의 격차가 극명하다.
고작 100~200레벨의 존재가 300레벨을 훌쩍 넘긴 플레이어의 스킬 공격을 견딘다는 건 사실상 어려웠다.
카츠가 가우스군을 대량 학살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모든 지표가 카츠보다 우위에 있는 수에론의 스킬 공격을 맞고도 목숨을 건진 템빨단 궁병들이 비상식적이었다.
수에론이 누군가?
전투 특화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다. 그의 스킬 공격력 계수는 노말 스킬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한데 일개 병사들 따위가 그 공격을 버티다니?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일개 병사들의 몸빵이 저 정도면 기사급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가우스군 플레이어들이 술렁였다.
템빨군단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수에론은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과연 템빨단… 병사들조차도 템빨이라 이거군.’
수에론은 가우스 왕국민이 아닌 바.
그가 이번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어떤 보상이나 의무가 있어서가 아니다. 레이단 침공전과 국가대항전 등에서 자신에게 좌절을 안겨준 그리드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다.
오로지 그리드에게 피해를 입히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이번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그리드, 네놈이 병사들을 얼마나 공들여서 키웠는지 잘 알았다.’
알게 되니까 더욱 더 의욕이 샘솟는다.
그리드가 공들여서 키운 병사들을 학살하고, 놈들이 무장하고 있는 아이템을 모조리 빼앗아 내 배를 채운다면 어떨까?
“그리드놈 꽤나 열 받겠지? 끌끌, 어디 한 번 신명나게 놀아볼까.”
서걱!
수에론이 검을 휘둘렀다.
+9위풍의 총명검.
착용자의 물리 공격력과 마법 공격력을 동시에 올려주는 한손 검이다. 수에론이 제2차 국가대항전 당시까지 사용했던 흉악한 총명검의 상위호환이다.
그리드의 제작템과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으며 크라우젤의 <진(眞) 백아도>와 동급의 무기라고 보는 게 옳았다.
더군다나 수에론은 ‘사람이나 몬스터를 무기로 벨 경우, 대상의 영혼 일부를 무기에 흡수하여 무기의 위력을 증가시킨다’는 내용의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크아아아악!!”
“이, 이게 무슨 짓…! 커억!”
가우스군 플레이어와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아군이라고 믿고 있던 수에론이 갑자기 자신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니 혼란할 법도 했다.
서걱!
푹푹! 푸욱-!
갑자기 망나니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는 수에론과, 그에 베이고 찔려 잿빛으로 산화하는 가우스 왕국군.
그 예기치 못한 광경이 세상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수에론 갑자기 뭐함?
-템빨단 박살내겠다고 참전해놓고 왜 아군을 죽이지?
아군이란 표현은 옳지 않다.
수에론은 가우스 왕국민이 아니었으니까.
엄밀히 따져서 그는 이번 전쟁과 무관한 제3자이다.
그가 전쟁에 난입한 이유는 오로지 개인의 원한 해소였지 딱히 가우스군을 도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수, 수에론, 네놈! 크아악!!”
통합랭킹 7위.
전투 특화 유니크 클래스.
거기에다가 막강한 템빨까지 갖춘 수에론.
그의 갑작스러운 기습은 가우스군이 대응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병사며 플레이어며 모조리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혼란과 분노가 깃든 눈으로 노려봐오는 가우스군 플레이어들을 수에론이 비웃었다.
“약해빠진 놈들에게 도움이 될 기회를 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지.”
파앙-!
파파파파파파파파팡!!
위풍의 총명검이 공명하기 시작함과 동시였다.
수에론이 전장에 무수히 존재하는 시체들로부터 영혼을 착취, 그것으로 수십 자루의 옥빛 창을 만들어냈다.
앞서 이미 사용한 바 있는 영혼 창이었다.
단, 조금 전과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마법공격력이 대폭 상승해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수십 자루의 영혼 창이 성벽 위 템빨단 궁병들을 또 한 번 덮쳤다.
그 기세가 종전보다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에 템빨단 궁병들은 사색이 되었다.
전쟁 방송을 시청 중인 시청자들 중 대다수가 궁병들의 궤멸을 예상했다.
하지만 카츠가 그 예상을 수포로 되돌렸다.
“블러드 실드.”
쿠와아아아아아아앙-!
수에론이 시체들로부터 영혼을 탈취하였듯, 시체로부터 피를 탈취한 카츠는 그것으로 붉은 방패를 형성하였고 영혼 창 폭격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전쟁터에서 최강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영혼 약탈자와 블러드 워리어의 정면충돌이 발생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이길까?
세상사람 모두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멋진 승부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작 수에론은 카츠를 애송이 취급하였다.
“에픽 클래스 전직자 따위가 나하고 비교대상이 될 수는 없지. 넌 나보다 몇 수나 아래다. 안 그래?”
“…뭐?”
사실, 카츠는 수에론이 등장한 이후부터 계속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은 지난 3일 동안 수만 대군의 진격을 저지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
이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가 나타나자 상황을 절망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카츠는 수에론을 적수로 인정하고 있었다.
한데 정작 수에론은 자신을 별 것 아닌 존재로 치부하자 안 그래도 성격 개 같기로 유명한 카츠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꽈드득, 이를 갈더니 곧바로 성깔을 드러냈다.
“거지새끼가.”
“뭐? 거지?”
하이랭커 중의 하이랭커답게 게임 내외적으로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내게 거지라니?
귀를 의심한 수에론이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거지라니. 기껏 한다는 비하가 그토록 현실성 없어서야… 완전히 유치원생 수준이로군.”
콧방귀 뀌는 수에론.
성벽 위에서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카츠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전쟁터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저 거지새끼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입히는 사람들한테 10억엔씩 준다. 목을 따오는 사람한텐 1,000억엔 주고.”
“…?”
10억엔? 1,000억엔?
만약, 지금 저 말을 카츠가 아니라 평범한 하이랭커가 했다면 듣는 사람 모두 개소리하고 앉았다며 비웃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카츠가 누군가?
일본 최고 재벌가의 아들이다.
그의 집안 자산규모는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었다. 중동의 여느 석유부자들도 부러워할 만큼 돈이 많았다.
그가 입에 담는 10억엔, 1,000억엔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 지금 게임 접속함.
-수에론 조지러 갈 파티원 구함.
전쟁 방송 시청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청자들 대부분이 방송 시청을 그만두고 게임에 접속하기 시작한 여파였다.
전쟁터의 상황도 썩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수에론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던 가우스 플레이어들이 그에게 창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대단한 수에론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놈들이…!”
식은땀을 흘리면서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수에론과 성벽 위에서 이죽거리고 있는 카츠의 시선이 허공에 얽힌다.
“돈빨 앞에서는 너도나도 X만한 새끼라는 걸 알아야지.”
돈빨로도 해결 못하는 문제가 바로 템빨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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