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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79화 (374/1,794)

템빨 26권 - 18화

귀환 주문서.

Satisfy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일상적인 소모품이다.

일정 조건을 충족시키면 플레이어가 설정한 귀환 포인트-부활 포인트이기도 하다-로 이동시켜준다.

누차 말하지만 누구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일상적인 소모품이니만큼 그리드에게도 귀환 주문서가 있었다.

현재 그리드의 귀환 포인트는 레이단.

얼마 전, 판게아로 포인트를 바꾸려다가 관뒀다. 서대륙으로 돌아가는 방편이 사라진단 사실을 깨닫고 레이단으로 유지시켜놓은 상태다.

그렇다.

말인 즉, 그리드는 귀환 주문서만 있으면 언제라도 레이단(서대륙)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단 뜻이다.

이는 그리드의 입장에서 당연한 확신이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처참이 무너졌다.

[<귀환 주문서>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 주문서의 수식으로는 대륙간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어쩌라고?”

대륙간 이동 불가!

그리드를 당혹시키는 것을 넘어서 혼란시키기에 충분한 멘트였다.

“어… 음.”

금치산자마냥 넋 나간 표정을 짓는 그리드.

그의 머릿속에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문구는 단 하나였다.

X됐다!

현실시간으로 하루 전.

그러니까 게임 시간으로 3일 전, 그리드는 바니바니에게 연락해서 말했었다.

퀘스트 하나를 클리어하는 즉시 서대륙으로 넘어갈 터이니, 너는 내가 정해놓은 시간에 맞춰서 세상에 나의 등장을 알리라고. 최대한 화려하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라고.

늘 그랬듯이, 그리드는 극적인 순간에 멋지게 등장함으로써 자신의 위용을 다시금 세상에 각인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약속 된 시간이 찾아왔다.

<철갑귀 토벌(2)>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은사를 다섯 개 더 확보한 그리드는 출전 준비가 완벽히 끝났다.

감히 내 영토를 침범하여 소중한 동료와 병사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적들을 단죄할 준비가 되었다.

한데 이게 무슨?

“귀환 주문서가 안 먹히다니!”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뻘뻘, 식은땀을 흘리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의 영혼이 콧방귀 뀌었다.

‘네가 동대륙으로 건너올 수 있었던 이유가 뭐더냐? 바로 대륙간 이동 스크롤 덕분이 아니었더냐. 허면, 돌아갈 때도 당연히 대륙간 이동 스크롤을 사용해야한다는 사실을 너는 어찌 모르는 게지?’

“…대륙간 이동 스크롤? 그건 어디서 구하면 되는 건데?”

‘네게 동대륙 이동 스크롤을 건네줬던 현자 나부랭이가 가지고 있겠지.’

“…”

그리드가 희미한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스틱세이에게 동대륙 이동 스크롤을 받았을 당시.

스크롤을 받자마자 사용하는 자신을 보고 스틱세이가 무척 당황했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다.

‘내가 서대륙으로 귀환할 수 있는 스크롤을 받지도 않고 떠나니까 당황했던 거구나…’

‘…’

“…”

뭐라고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리드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스로의 조급함이 원망스러웠다.

‘늘 침착하고 신중해지자고 몇 번이나 다짐해놓고도 또 이런 실수를…!’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책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말했다.

‘네가 한심한 건 사실이다만, 딱히 자책할 필요까진 없지 않나? 드래곤이나 신이 아닌 이상에야 누구라도 실수는 한다. 그건 역대급 대천재인 이 몸과 지옥의 대악마들조차도 마찬가지지.’

“…지금 위로해주는 거야?”

천상천하 유아독존 브라함이 남을 위로해주다니?

귀를 의심하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언성을 높였다.

‘뭐, 뭣! 위로 따위가 아니다! 자책할 시간에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나 모색하란 뜻으로 한 말이다! 보고만 있자니 영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잖느냐!!’

“아,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지.”

지금 넋이나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템빨단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 반면 적의 숫자는 무한하다.

템빨단원들은 머잖아 한계를 맞이하게 될 터였고 영토를 모조리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리드는 한시라도 빨리 서대륙으로 돌아갈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금방 떠올렸다.

사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까.

“전화 한 통이면 간단하잖아?”

동대륙과 서대륙간의 교류는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

동대륙에 있는 그리드가 서대륙에 있는 플레이어에게 귓속말을 보낼 수 없었고, 당연히 기사 소환 스킬도 막힌다.

하여 그리드는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라우엘에게 수신자부담으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주군, 세계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거듭나고 계신 당신께서 제게 친히 연락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게임 중이라서 수신이 늦고 말았네요. 정말이지 면목이 없습니다.

“…”

-훗날, 제 목숨이 다하고 백골이 진토 될지라도 저는 오늘 날의 죄악을 잊지 않겠습니다. 전생하여 반드시 죗값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기껏 노력해서 한국어를 배워놓고 헛소리만 지껄이는 라우엘이었다.

그 탓에 손발이 오그라진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피차 바쁘니까 본론만 말하마. 스틱세이한테 서대륙 이동 스크롤 받아가지고 나 좀 데리러 와줘.”

-예? 서, 설마, 서대륙으로 귀환하는 스크롤도 받지 않고 떠나셨던 겁니까?

“내가 좀 경황이 없었거든.”

-큭큭…! 이런, 이런. 역시 주군은 대단하시군요. 상식이라는 이름의 무료하고 가치 없는 감옥으로부터 진즉에 탈주하신 분답게 참으로 비정상적이십니다.

“…그냥 빨리 전화 끊고 게임에 접속해서 데리러 와줘.”

-송구하지만 불가능합니다.

“뭐? 아, 전쟁 중에 네가 자리를 비운다는 건 말이 안 되겠지. 정 바쁘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줘도 좋고.

-아니요. 저는 당신의 종.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든 저는 당신의 명령을 어기지 않습니다. 제가 동대륙으로 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라 스틱세이님께서 자리에 안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무슨 말이야? 스틱세이가 왜 없어?”

-대현자 스틱세이께서는 방대한 지식을 갖추셨을 뿐만 아니라 마법적인 능력도 탁월하시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따로 몇 가지 부탁을 드렸습니다.

“뭔 부탁?”

-화린 공주를 비롯한 울족 출신의 마법사들을 통솔해서 에트날군의 배후를 급습한 후 세이렌으로 향해달라고 하였죠.

울족.

과거, 그리드가 제국에서부터 구출해온 소수민족이다.

그들은 마법적 재능이 탁월한 인종이었고 특히 왕족 화린의 잠재력이 뛰어났다.

스틱세이가 그들을 인솔하게끔 시킨 이유, 스틱세이라면 그들의 재능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승화시켜주리라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리라.

이처럼 그리드는 라우엘의 의도를 절반은 간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에 세이렌으로 가라고한 이유는 뭐지?”

-바다 속에서 농사 짓고 계신 분을 좀 호출해달라고요.

바다 속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그리드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다.

“피아로?”

-예.

NPC와 플레이어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귓속말의 가능여부다.

NPC는 귓속말이 불가능했고, 그들과 교신하기 위해서는 서신 등의 구시대적 수단을 사용하거나 마법적 통신장치를 이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세이렌은 마법적으로 발달한 도시가 아니다.

라우엘이 굳이 스틱세이에게 피아로를 호출해달라고 부탁한 이유를 그리드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로를 최대한 빨리 불러오려면 스틱세이의 텔레포트에 의지하는 방법이 가장 효율적인 거겠군… 하지만 피아로가 자리를 비우면 세이렌이 위험해지는 거 아닌가?”

애초에, 피아로가 세이렌에 남은 이유는 단순한 농사 때문이 아니었다.

블러드 카니발로부터 세이렌을 보호하는 것이 그의 첫 번째 임무였다.

염려하는 그리드의 귓가로 라우엘 특유의 오글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 큭큭! 당신께서는 점점 더 상냥해지시는군요? 주군, 우리가 세이렌을 보호해야하는 이유를 상기해보십시오.

“그야 당연히 동맹조약을 지키기 위해서…”

-도중에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애초에 우리가 세이렌과 동맹을 맺은 이유는 뭐지요?

“결과적으로 우리의 발전을 위해서지.”

-바로 그겁니다. 당장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세이렌이 대숩니까?

“…”

-세이렌의 안위 따위,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세이렌의 모든 수인족은 이번 전쟁에 참전하여 우리를 도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영토를 지켜주었듯이, 그들 또한 우리의 영토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를 아직 채 수복하지 못한 수인족 전부를 원군으로 동원한다는 것은 심히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무엇보다 꺼림칙한 부분은…

“라우엘, 너는 세이렌과 동맹을 맺기 한참 전부터 에트날과 적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잖아? 그럼 세이렌은 처음부터 희생양으로 선택했던 거였어?”

-꼭 희생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죠. 저는 수인족들을 단순한 화살받이로 써먹으려는 게 아니라 비장의 군대로 활용할 계획이니까요. 수인족들의 인명 피해는 적을 겁니다. 또한, 블러드 카니발이 반드시 세이렌을 재침략하리란 보장도 없고요.

“흠… 그래.”

그리드는 라우엘을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라우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시켰던 것이며, 템빨단을 지켜야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라우엘의 계획과 생각이 합당했던 까닭이다.

라우엘이 작별을 고했다.

-4분이나 자리를 비우고 말았군요. 이래서야 지휘체계에 혼란이 생깁니다. 저는 어서 빨리 다시 게임에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해줘. 스틱세이가 귀환하는 즉시 나한테 보내는 거 잊지 말고. 판게아에 있는 하얀 망치 대장간으로 오라고 전해.”

-네, 아마 5일 후쯤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결론?

“바니바니… 구라쟁이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그리드의 서대륙 귀환 작전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현재의 그리드는 템빨단 발족 이래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는 동료들을 도울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이에 초조해할 법도 했지만.

“늘 침착하고 신중하게.”

그리드는 최대한 마음을 다스렸고 냉정하게 행동했다.

우선 인터넷에 접속, 템빨단 각지의 전쟁 영상을 확보하고 대장장이의 관점에서 아군의 전력을 파악했다.

‘유라는 주무기를 도로 바꿨군. 잘 된 일이야. 드디어 내가 그녀의 무기를 만들어줄 수 있게 됐으니까. 폰은 내가 5개월 전에 만들어준 갑옷을 아직도 사용 중인가? 쟤도 나만큼이나 운이 없어서 득템을 못하나보군. 레가스는 창칼을 손으로 막는 직업특성상 건틀릿의 내구력 한계가 굉장히 빨리 찾아올 테고…’

템빨단원들의 장비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다.

그리드가 한동안 개인의 성장에만 집중해온 여파였다.

“그중에서도 새로운 아이템이 가장 시급한 사람은…”

그리드가 파트리안 요새전 영상을 주시했다.

영상 속에서는 건강한 구릿빛의 피부를 지닌 아름다운 여인, 지슈카가 분투 중이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활을 유심히 관찰한 그리드가 결정했다.

“지슈카, 우선 너부터다.”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리드.

다시 캡슐로 돌아간 그가 Satisfy에 접속하자마자 찾아간 곳은 하얀 망치 대장간이었다.

하얀 망치의 간판을 달고 한속봉 배 대회에서 우승한 그 영웅을 대장장이들은 열렬히 반겨주었고 적극적으로 보좌했다.

그리드의 요구사항 모두를 철저히 수행하며 아이템 제작을 도왔다.

따앙! 따앙!!

백린목의 불길을 집어삼킨 용광로 앞.

열기로 끓어오르는 그곳에 쭈그리고 앉은 그리드가 모루 위의 홍옥을 쉬지 않고 망치로 두드렸다.

불꽃을 내포하고 있는 홍옥의 정체, 다름 아닌 <주작의 숨결>이었다.

‘이 형태 그대로 아이템에 귀속시켜도 된다지만…’

그리드가 봤을 때는 홍옥 속의 불꽃이 보다 강하게 타오르게끔 제련하는 것도 가능해보였다. 그리고 불꽃이 강해질수록 주작의 숨결도 강해질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리드는 주작의 숨결 제련에 도전했다.

하지만 주작의 숨결은 신의 흔적.

전설의 기술로도 완전하게 다루기가 어려웠다. 이를 제련하는 작업은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래 가장 힘든 일이었다. 최소 나흘은 모루를 펼쳐놓고 망치질만 해야 할 것 같았다.

보통 인내심으로는 못 견딜 일이란 뜻.

하지만 그리드는 도리어 의욕을 불태웠다.

‘최고급 재료답게 합당한 예우를 해주마.’

따앙! 따앙!!

그리드의 망치질 소리가 하얀 망치 대장간의 분위기를 전성기 시절로 회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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