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 15화
아루베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만약 100명의 플레이어에게 <주작궁의 행방> 퀘스트를 쥐어준다면, 100명 중 100명은 아루베를 살리는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당연하다. 아루베를 살릴 경우 획득하는 퀘스트 보상은 다름 아닌 주작궁. 최강의 무구가 아닌가?
레벨 올리겠답시고 아루베를 죽이는 사람은 제대로 병신이 아니고서야 없을 터였다.
‘…졸지에 내가 병신이 됐군.’
너무 강한 것도 때로는 죄가 될 수 있음을, 20억 플레이어 중 과연 몇 명이나 체험할 수 있을까?
의도치 않게 아루베를 죽여 버린 그리드.
대가로 레벨이 2개나 오르고 아루베의 드롭템을 획득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고 그저 우울했다.
“하.”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리드가 <알 수 없는 표식>과 <아루베의 반지>에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을 사용했다.
감정 결과를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루베를 죽이지 않는 이상 세상에 공개 될 일이 없던 아이템.
즉, 본래라면 사장되었을 아이템 따위가 좋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색이 네임드 NPC였으니까 쓰레기까지는 아니겠… 엉?”
눈앞에 떠오르는 아이템 정보창을 확인한 그리드가 발걸음을 멈췄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알 수 없는 표식>
검은 태양 표식.
용도는 알 수 없다.
[아이템의 숨겨진 기능을 발견하였습니다!]
<진화의 표식>
등급:유니크
환국의 연금술시설에서 개발 된 표식입니다.
신체에 이 표식을 부착할 경우 근력, 민첩, 체력, 지력 중 한 가지 능력치가 200 오릅니다.
사용 조건:레벨 200 이상.
무게:0
“헐………”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란 그리드가 붕어처럼 입만 뻥긋거렸다.
몸에다가 파스처럼 갖다 붙이면 스탯을 올려주는 아이템이라니? 그것도 200이나!!
“대박!!”
부디 쓰레기만 아니기를 바랐던 아이템이 사실은 엄청난 가치의 아이템이었다는 반전.
그리드를 전율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가 기뻐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당장 얻은 표식의 가치 때문이 아니다.
연금술시설의 가능성을 엿본 것.
바로 그 점이 진정 그리드를 전율시켰다.
‘언젠가는 레이단의 연금술시설에서도 이런 표식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건가?’
라빗, 그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언젠간 꼭 내게 보여다오.
간절한 마음으로 라빗을 응원한 그리드가 이어서 아루베의 반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장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루베의 반지>
등급:유니크
철갑귀의 기술을 구사하고 싶었던 아루베가 온갖 실험 끝에 완성시킨 반지입니다.
착용 시, 다섯 가닥 이하의 <은사(銀絲)>를 꼬아서 원하는 형태로 만들고 활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4
“….”
<은사>의 아이템 설명에 따르면, 다섯 가닥 이하의 은사를 다루기 위해선 최소 2,500의 손재주가 필요하다.
그렇다.
쉽게 말해서, 아루베의 반지는 착용자의 손재주를 2,500으로 만들어주는 아이템이었다.
이미 3,700에 도달한 손재주를 지닌 그리드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이다.
“어휴, 줘도 뭐 이딴 걸…”
그리드는 투덜거렸지만, 생각해보라.
만약, 아루베의 반지를 평범한 플레이어가 얻었다면?
지금쯤 기뻐서 방방 뛰고 있었을 터다.
애초에, 은사를 마음껏 다룰 조건을 갖춘 사람은 그리드밖에 없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아루베를 죽이고 얻은 이 2개의 아이템은 주작궁과 비교해도 그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드만 체감하지 못할 뿐이지.
“…아니, 가만. 나도 이거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리드가 문득 템빨골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스켈레톤과 달리 장비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는 해골.
녀석에게 아루베의 반지를 장착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전투에서 나를 제대로 서포트해주겠는데?’
은사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템빨골이 은사로 적의 발을 잠깐만 묶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겐 엄청난 도움이 될 터였다.
심지어 은사의 랜덤 공격력에는 명확한 한계가 없다.
1레벨짜리 템빨골이 휘두른 은사가 아주 어쩌면 100레벨짜리 몬스터를 일격에 해치워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최소 공격력은 100에 불과하고, 1,000번 공격 중 999번은 최소 데미지가 터질 수도 있다는 점은 참 슬펐지만.
어쨌든 템빨골에 대한 기대치가 단숨에 대폭 상승해버렸다.
“큭큭…”
그리드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황홀경에 빠진 그가 기세를 살려서 <진화의 표식>을 손등 위에다가 붙였다.
스탯 상승을 위함이었다.
그가 원하는 스탯은 지력, 혹은 민첩이었다.
민첩이 올라서 근력과의 비율을 최대한 맞춰지거나, 지력이 올라서 브라함으로부터 새로운 마법을 배울 수 있기를 그리드는 소망했다.
‘체력도 나쁘지 않지. 생명력과 방어력이 올라가면 생존력이 큰 폭으로 상승하고 무엇보다 흑화의 활용도가 높아지니까.’
근력만 아니면 된다.
근력은 이미 차고 넘친다.
‘원하는 스탯을 가질 확률 75퍼센트.’
설마 재수 없게 25퍼센트 확률에 걸리겠는가?
그리드는 확률이라는 개념을 믿었고 이때 그의 손등 위로는 검은 태양의 표식이 새겨지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이익-
“음.”
따끔하다.
그리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민첩, 지력, 체력.
‘과연 셋 중 어느 스탯이 오를까?’
[진화의 표식이 귀속됩니다.]
[근력 능력치가 200 상승하였습니다.]
“…는 개뿔.”
좌절하는 그리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빌어먹을.
원하는 스탯을 획득할 확률이 75퍼센트였고 원치 않는 스탯을 획득할 확률은 고작 25퍼센트에 불과했건만, 대체 왜?
“왜 25퍼센트에 걸리는 건데?”
확률이라는 개념, 필시 악마가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그리드는 확신했다.
“아… 이거 돌이킬 수 없는 건가?”
근력은 물리 딜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스탯으로 손꼽힌다.
물리공격력을 올려주는 유일한 스탯일뿐더러 소량의 생명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리드는 근력과 민첩을 1대1 비율로 맞추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껏 좁히기 위해서 노력 중인 근력과 민첩의 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았다.
“아우… 차라리 지력이 오르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세상에 지력을 올리고 싶어하는 대장장이가 또 있을까?
막말로 잡캐의 비애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그리드가 눈 딱 감고 시도해보았다.
손등에 부착 된 표식의 정보를 불러왔다.
혹시 재부착이 가능한지 확인해볼 요량인 것이었다.
<진화의 표식>
상태:근력
근력 능력치가 200 추가 된 상태입니다.
능력치 변경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단, 능력치 변경을 시도할 경우 하나의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5 하락합니다.
“…”
스탯 다섯 개 하락.
실로 무시무시한 패널티다.
엘릭서 절반의 가치이며 이단의 요리를 ‘최소’ 다섯 번 먹어야 올릴 수 있는 수치이기도 하다.
이단의 요리를 먹는다고 해서 늘 무조건 스탯이 오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어쩌지?’
고민하는 그리드의 얼굴과 등줄기에 뻘뻘 식은땀이 흘렀다.
다소 비효율적이나 깡공격력 높여주는 근력 스탯에 이대로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보다 극적인 전투력 상승을 노리고 스탯 다섯 개를 손해 볼 것이냐.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근력만 아니면 좋은 상황이다.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해.’
확률은 75퍼센트.
더군다나 그리드는 보유한 스탯의 종류도 엄청 많다.
근력, 체력, 민첩, 지력뿐만이 아니라 끈기, 평정, 불굴, 위엄, 통찰력, 용기, 매력, 악마력, 행운 등.
남들은 꿈도 못 꿀만큼 다양한 종류의 스탯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중 가치가 낮은 스탯 5개를 잃고 원하는 스탯 200개를 확보할 수만 있다면 이득인 것이다.
‘특히 평정이나 악마력을 잃으면 대박이지.’
평정은 상태이상에 걸릴 확률을 낮춰주고 상태이상 회복 속도를 높여주는 스탯.
기본적으로 상태이상에 저항하는 그리드에게는 별로 쓸모가 없는 스탯이었다.
또한 수치가 높아지면 지옥 출입권을 준다는 악마력 스탯은 그리드를 두렵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리드는 간절히 기원했다.
이 2가지 스탯 중 하나를 희생하는 대가로 민첩이나 지력 스탯을 확보하기를!
“표식 변경.”
[표식의 위치 또한 재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파앗-!
안내와 함께 그리드의 손등에 각인되었던 검은 태양의 표식이 허공에 떠올랐다.
아마, 그리드가 멋 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아기주먹보다 조금 더 큰 이 멋진 표식을 가슴이나 목덜미에 귀속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외모 꾸미기에 관심도 없었고 재능도 없었다.
‘머리에다가 붙이면 지력이 오르는 확률이 상승하지 않을까?’
별 되도 않는 논리를 세운 그리드가 표식을 이마 정중앙에다가 찰싹! 붙였고 그와 동시였다.
[진화의 표식을 재구성합니다.]
[행운 능력치가 5개 소멸하였습니다.]
[근력 능력치가 200 상승하였습니다.]
“XX.”
하필이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던 행운 스탯을 잃은 것으로 모자라서 또 근력이 오르다니?
이성의 끈을 놓은 그리드가 곧바로 표식을 재구성했다.
이마에 붙였던 표식을 떼어내더니 울화통이 터져서 그걸로 가슴을 때렸다.
쇄골 바로 아래였다.
옷깃 사이로 엿보이는 넓은 가슴팍에 검은 태양의 표식이 멋지게 새겨졌다.
[진화의 표식을 재구성합니다.]
[행운 능력치가 5개 소멸하였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200 상승하였습니다.]
“…”
300레벨대의 체력 스탯은 1당 생명력을 25, 방어력을 0.9씩 올려주는 바.
체력 스탯 200의 상승은 그리드에게 5천의 추가 생명력과 적당한 천갑옷 하나를 무장한 수준의 방어력을 부여했고 이는 필시 나쁘지 않았다.
전투능력을 상승시켜주는 민첩 스탯이나 새로운 마법을 습득하게끔 도와주는 지력 스탯보다는 극적인 효과가 적었지만 말이다.
그리드는 다소 아쉬웠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이걸로 만족하자…”
더 이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
두 눈 뜨고 행운 스탯 10을 잃은 그리드가 터덜터덜, 망신창이가 된 사람처럼 맥 빠진 걸음걸이를 옮겼다.
어느덧 이단의 식당 앞이었다.
***
“오셨는가!!”
늘 그렇듯이 파리만 날리는 식당.
멀뚱멀뚱 앉아있던 이단이 그리드를 격하게 반겼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호감도가 확연히 올라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자네 대장장이였다면서? 자네가 한속봉 배 대회에서 우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름세!”
“이단…”
내가 우승한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다니?
마른 사막처럼 황폐해졌던 그리드의 마음이 뭉클해졌다.
이단이 비록 매드 셰프라고는 하나 일말의 정은 있는 사람이었구나, 싶으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딱 1초만.
“하하핫!! 한속봉 배 대회 우승자가 내 식당 단골이라고 홍보하면 손님들이 밀물처럼 밀려오겠지?”
“…어서 밥이나 주쇼.”
칫, 혀를 찬 그리드가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슬그머니,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얀페이가 그에게 둥굴레 차를 건네주었다.
“오늘의 차는 서비스에요. 저는 가난한 소녀가장에 불과하지만 당신의 우승을 축하해드리고 싶으니까요. 대신 전 오늘 저녁을 굶어야겠죠.”
조곤조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할 말은 다 한다.
철없는 언니들과 사고뭉치 동생들을 홀로 책임지는 얀페이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그리드의 입장에선 심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서비스를 마다하진 않았다.
‘어차피 서대륙으로 데려가면 월급 많이 줄 거야.’
그렇게 합리화시키며 구수한 공짜 차의 맛을 음미하는 그리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던 얀페이가 조심스럽게 치마를 들어올렸다.
“그… 오늘은 허벅지가 뻐근해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떠오르는 홍조가 유독 눈에 띈다.
얀페이는 필시 이 행위를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드의 마사지가 단순한 마사지가 아님을.
‘얘도 참…’
세상만사 관심 없는 표정을 짓고 다니는 주제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신기하다.
어쩌면 수애과일 수도 있겠다 싶다.
‘동대륙 여자들은 다 이런가?’
생각하면서, 그리드는 얀페이의 가늘고 새하얀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
푸딩처럼 부드러운 탄력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왔고,
“아흑.”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얀페이는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귀까지 새빨갛게 붉힌 채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를 귀엽다고 느낀 그리드가 보다 적극적으로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얀페이와의 호감도가 상승하였습니다.]
[얀페이와의 호감도가…]
[손재주가 1 올랐습니다.]
평생 손가락만 놀리고 다녀도 굶어죽진 않겠다고, 그리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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