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 8화
파그마의 검무 중에서 파(派)의 공격력은 최하위권에 속한다.
6레벨 기준 파(派)의 공격력 계수는 고작 230%. 평타의 2배를 약간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다.
레전드리 등급의 스킬이라고는 납득이 안 될 정도로 낮은 계수였다.
그래도 한때는 ‘광역기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강력한 스킬에 속했으나, 3차 직업군의 스킬들이 공개 된 이후부터는 위용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지만 여전히 독보적인 강점을 지녔다.
적중시키는 대상 전부에게 확정적인 슬로우 효과를 유발한다는 점이다.
즉, 파(派)는 광범위 CC기로 인식하는 편이 옳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공격력이 낮은 건 당연했다.
만약, 사용자가 평범한 플레이어였다면 말이다.
“파(派).”
+9까지 강화 된 아이템만이 발현할 수 있는 백광.
그 찬란한 빛에 휩싸인 실패작이 토해내는 검기의 파도는 강력했다.
주작단의 검에 베여도 멀쩡하던 철갑귀들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정도로!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던전을 흔드는 폭발이 발생한다.
검기의 파도에 휩쓸린 철갑귀들의 몸으로부터 핏줄기가 분출되었고, 충격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한 던전 내벽 곳곳이 박살나버렸다.
[대상에게 15,31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의 모든 속도를 63퍼센트 저하시킵니다.]
[대상에게 16,00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의 모든…]
[대상에게…]
…
..
“다, 당신…?”
그리드의 품에 안긴 수애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장장이가 검술을 쓰다니?
그것도 이토록 강력한 검술을!
“정체가 뭐죠?”
혼란스러워하는 수애.
그리드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더욱 더 강한 힘을 실었다.
마치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철갑귀들의 핏줄기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드의 컨트롤 솜씨로는 난무하는 핏줄기 전부를 피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은조차도 녹이는 혈액.’
사람이 뒤집어썼다가는 무사할 리 만무하다.
결국, 그리드는 본인이 가장 의지하는 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갓 핸드!!”
파파파파팟!
그리드의 외침에 호응, 즉각 등장한 4개의 황금 손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분수처럼 분출되는 철갑귀들의 핏줄기를 최대한 차단하여 그리드와 수애를 보호했다.
치이이이익!
갓 핸드에 닿은 철갑귀들의 피가 맹렬하게 타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그라진다.
수애의 놀라움이 더욱 더 커졌다.
‘철갑귀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멀쩡할뿐더러 스스로 움직이는 보구라니?’
동대륙인들은 늘 상상한다.
무릉도원의 보물창고에는 상식 바깥의 보구들이 즐비할 것이라고.
그래, 지금 그리드가 소환한 황금 손 같은.
그렇다.
수애의 눈에는 갓 핸드가 신선의 보구처럼 보였고, 대장장이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검술을 구사하는 그리드가 신선 같았다.
그만큼 신비롭고 압도적인 위용이다.
한편, 그리드는 안도하고 있었다.
‘갑옷을 입었기에 망정이지.’
수애를 보호하고자, 그녀의 허리를 감싸는 찰나 그리드는 망설였었다.
혹 그녀가 나의 손맛을 보았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해서 말이다.
하지만 수애는 무사답게 갑옷을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손재주가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언정 갑옷 위를 만지는 것으로 대상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건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수애는 그리드의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뒤로 물러나있어요.”
슬로우에 빠진 철갑귀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그리드는 넋이 나가있는 수애를 주작단원들에게 건네주었고, 뒤늦게 정신 차린 수애와 주작단원들은 그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귀인의 진짜 정체가 뭐죠?”
“어찌 대장장이가 검술을…”
“주작궁 복원에 백린목을 사용하셨다고 들었는데, 설마 정말로 신선이십니까?”
‘파그마의 이름은 모르는 건가?’
화이트는 전설의 대장장이를 거론했던 바 있다.
또한 파그마는 동대륙 태생인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하여, 그리드는 동대륙인들이 파그마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했다.
‘뭐, 모든 사람들이 전설의 대장장이를 알고 있으리란 법은 없는 거고.’
파그마가 동대륙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아직 미흡해서 서대륙에서만큼의 명성을 쌓지 못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곳에서만큼은 내 명성이 파그마의 명성을 초월할 수도 있겠군.’
원조를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남이 오를 수 없는 영역.
유일한 지존을 꿈꾸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새로운 업적 달성의 기회는 기쁜 것이다.
탐욕으로 일그러진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수애와 주작단원들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당신들, 꾸준히 성 던전을 원정해온 집단이라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하고 허술하군요. 원래 그렇습니까? 아니면 오늘따라 유달리 컨디션이 나쁜 겁니까?”
그리드는 주작단에게 큰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던전에 입장하고 첫 번째 교전부터 위기에 봉착하다니, 황당하고 한심하다.
철갑귀가 강한 것도 있었지만, 주작단의 솜씨가 예상보다 별로다.
“그건…”
그리드의 비꼬는 말투.
여태껏 목숨 바쳐서 판게아를 지켜온 주작단원들의 자존심을 짓뭉개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작단원들은 불쾌해하지 않았다. 아니, 불쾌해하지 못했다.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그리드가 비꼬는 것도 이해가 갔다.
“…”
아무런 변론도 하지 못하는 주작단원들을 대신해서 수애가 설명했다.
“본래 철갑귀는 뭉쳐 다니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우리가 이곳에 벌써 수년 째 원정오고 있지만 5마리의 철갑귀에게 협공을 당한 경험은 처음이죠.”
주작단의 기본 전술은 8명이 한 조를 이루는 것이다.
철갑귀 한 마리를 사냥하는데 8명의 힘이 필요했고, 지난 수년 동안 철갑귀는 세 마리 이하씩만 출현해왔다.
다섯 마리의 철갑귀가 동시에 등장한 것은 이례적인 사태였다.
주작단이 이에 혼란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한 것만 해도 칭찬받아 마땅한 일일 정도.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다.
그리드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수도 있다.
“오늘 유달리 운수가 나빴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오늘 같은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우리의 무능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으며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감사드려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수애에게 그리드는 화답하지 못했다.
철갑귀가 갓 핸드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있었으므로!
‘벌써?’
그리드가 당황했다.
융합한 녀석까지 포함하면 철갑귀의 숫자가 총 여섯이라고 하나, 갓 핸드들은 각자 묠니르를 무장하고 있지 않은가.
무한 경직을 활용해서 최소 20초는 놈들의 발을 묶을 줄 알았다.
하지만 20초는커녕 그 절반의 시간도 벌지 못했다.
‘슬로우에 걸린 상태로 묠니르의 공세를 돌파하다니?’
문지기의 주먹을 맞아봤을 때부터 깨달은 거지만, 철갑귀들은 강하다.
단적인 증거로 대장 갓 핸드가 제압당해 있었다.
대장 갓 핸드.
궁극 강화의 묠니르를 무장한 갓 핸드로써 그리드의 최대 전력.
함께해온 세월 동안 전장을 주름잡아온 녀석이 은사에 꽁꽁 묶인 채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나머지 3개의 갓 핸드들 또한 은사를 피하느라 급급한 상황.
‘세게 나가야겠군.’
그리드는 철갑귀 하나하나를 준보스급 몬스터로 분류, 노에와 랜디를 소환했다.
“노에!”
“냥!”
뿅!
깜찍한 효과음을 배경 삼아서 등장한 노에가 네 다리를 활짝 펼치며 외쳤다.
“지옥 제일 마수님의 등장이시다! 냥!!”
“랜디!”
“도와줄게.”
이어서 등장한 랜디는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한 상태였다.
말 하는 고양이.
그리고 갑자기 두 명이 된 그리드.
그리드가 새롭게 꺼내든 카드를 목도한 주작단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수…!’
‘분신술!!’
‘신선이다! 신선이 확실해!!’
주작단원들은 그리드의 정체를 자연스럽게 귀결시켰다.
그만큼 그리드가 특별했다.
그들이 뭐라고 착각하든 말든, 그리드는 무시하고 노에와 랜디에게 지시를 내렸다.
“노에, 너는 융합 철갑귀의 스탯을 빼앗아 발을 묶고 랜디는 되도록 원거리 기술을 사용해서 나를 원호해줘. 갓 핸드가 철갑귀들을 타격할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아.”
“알았다! 냥!”
“응.”
갓 핸드의 무한 경직 방위선을 순식간에 돌파하고 접근해오는 철갑귀들을 보면서 그리드는 확신했다.
주작단이 약한 게 아니다. 설령 적기사급에는 이르지 못할지언정 이들은 정예 중의 정예가 맞다.
다만 철갑귀들이 강한 것일 뿐.
그러니까 전력으로 맞선다. 이런저런 이유 따져가면서 힘을 안배할 여력 따위 없다.
“연살파(聯殺派).”
철갑귀들은 언데드.
지능이 현격히 떨어진다.
생각 없이 움직이는 까닭에 던전의 비교적 좁은 통로를 서로 뒤엉킨 채 이동해오고 있었다.
통로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그리드의 연살파(聯殺派)를 피한다는 것, 놈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파(派)보다 수십 배나 더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연살파(聯殺派)이다.
개당 1,500퍼센트의 공격력을 발휘하는 살(殺)을 총 8발 쏜다.
이에 휩쓸린 철갑귀들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어버렸고 생명력 게이지가 절반 이상으로 떨어졌다.
이에 기세를 높인 그리드.
그대로 놈들에게 달려들어서 마무리를 지으려다가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되도록이면 부적을 소모하지 않는 쪽으로 싸워보자.’
한 대도 얻어맞지 않겠다는 뜻!
무려 준보스급 몬스터 6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품는 계획이라기에는 황당무계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진지했다.
“초(超).”
고오오오오오오오오-
상상 속 초월자의 모습을 기리는 춤사위가 순식간에 완성되었고, 그리드의 흑발이 들끓는 기류에 휩쓸려 너울거렸다.
날카로운 눈매와 콧대를 고스란히 드러낸 그리드가 점차 다가오는 철갑귀들로부터 뒤로 한 걸음 물러섬과 동시에 검을 2차례 휘둘렀다.
그러자 청백색 검기가 2회 쏘아졌다.
퍼펑!
퍼퍼펑!!
“캬악…!”
초(超)의 사기성은 이미 몇 번이나 증명된 바 있다.
그리드의 기본 공격을 원거리 공격으로 바꿔줬고 공격력을 2배나 증폭시켰다.
이 상태로 버프 스킬까지 사용한다면?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인간 폭격기가 되어버린다.
“대장장이의 분노.”
[<대장장이의 분노>를 사용합니다. 35초 동안 공격력이 25퍼센트, 공격 속도가 40퍼센트 상승합니다.]
“캬아아아아아!!”
철갑귀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사냥감에게 전투 내내 얻어맞고만 있었으니 열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 더 빠르게 그리드를 향해서 돌진하기 시작하는 놈들이었으나.
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퍼펑!!
대장장이의 분노를 사용한 그리드는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때마다 검을 3~4회씩 휘두르고 있었다.
주춤주춤.
철갑귀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특히 가장 선두에 서있던 철갑귀는 생명력이 고갈되기 직전이었다.
그리드는 신났다.
“하핫! 크하하하하핫!! 느려터진 놈들 같으니라고!!”
“…”
수애와 주작단은 그저 멍하니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악귀들.
그 무시무시한 철갑귀들이 그리드 앞에서는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하였으니 허무할 지경이었다.
“어찌 저리 강할 수가… 으음!!”
감탄만을 거듭하던 주작단원들이 일제히 질겁했다.
푸우우우욱!!
그리드의 후방 지면으로부터 몇 가닥의 은사가 솟구쳐 나왔기 때문이다.
철갑귀들이 그리드 몰래 지면으로 쏘아 컨트롤한 은사들이었다.
“위험해요!”
수애가 다급히 외쳐보았지만 늦은 것 같았다.
그리드는 눈앞의 철갑귀들에게 검기를 쏘느라 바빴고, 후방은 텅텅 빈 상태였다.
“아아…!”
수애와 주작단원들이 절망하는 그 순간.
“나와라! 템빨골!”
파앗!
은사가 튀어나온 지점보다 조금 앞.
그러니까 그리드의 바로 등 뒤 지점으로부터 누리끼리한 해골 2마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리드를 대신해서 은사에 얻어맞았다.
“헐?”
해골이나 강시를 소환하여 다루는 술자는 동대륙에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저토록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화살받이로 써먹는 사람은 드물 것이었다.
그리드는 재차 해골을 소환하고 있었다.
‘동대륙은 마나 회복 속도가 높아서 좋단 말이지.’
<부조리의 반지>와 최고의 조화를 이루는 환경이다.
딱! 딱딱딱딱!
퍽! 파삭!
철갑귀 섬멸에 집중하고자, 노에와 랜디, 갓 핸드는 모조리 공격용도로 활용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몇 가닥의 은사는 템빨골로 막아내기를 반복하는 그리드.
그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템빨골(1)과 템빨골(2)가 은사에 차츰 익숙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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