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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67화 (362/1,794)

템빨 26권 - 6화

판게아 성던전에서는 진귀한 보물과 약초, 그리고 각종 무구를 얻을 수 있다.

특히 신선도 탐낸다는 은사(銀絲)를 생산하는 철갑귀들이 서식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판게아 성던전을 <보물고>라고까지 표현했다.

너도나도 기회의 땅으로 여겼으며 그곳으로의 출입을 원했다.

이에 판게아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성던전이 보물 창고라고? 기회의 땅이라고?

미친 헛소리다.

성던전은 지옥이다.

강력하고 흉포한 몬스터들이 대규모로 서식하는, 지상최악의 두려운 장소다.

오늘도, 내일도.

판게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던전의 몬스터들을 저지하기 위해서 원정에 나서야하는 기사와 병사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들의 입장에선 재물에 눈이 멀어 성던전 출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전투능력이 있는 지원자는 도움이 되었고 나쁠 게 없었지만, 전투능력이 없는 지원자는 불쾌한 짐짝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저 대장장이들처럼 말이다.

‘염치도 없는 대장장이 놈들.’

한속봉과 함께 나타난 그리드와 화이트.

올해 대회의 우승자라는 그들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에 적의가 실렸다.

자신과 동기들, 그리고 선임들과 부하들이 무수히 흘린 피로 지켜지고 있는 성던전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그들이 진심으로 밉고 불쾌했다.

서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한속봉의 딸 수애가 나섰다.

“아버님.”

“오오, 수애로구나.”

수애는 초국 제일 미녀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더군다나 총명하고, 어질고, 학문과 무예까지 출중하였으니 한속봉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성던전 원정대 <주작단>의 단장이기도 한 그녀.

비녀를 꽂아 정갈하게 올려 묶은 흑발과, 화사하면서도 단아한 기품을 뽐내는 옷차림을 보아하면 사극에서 튀어나온 여배우 같다.

‘예쁘다.’

수애를 본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무척 드문 일이었다.

그리드가 누군가?

에트날 왕국의 국민 첫사랑 아이린을 부인으로 두었으며 세계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유라, 지슈카의 절친(?)인 인물이다.

심지어 예쁜 여동생까지 두었다.

즉, 그리드는 미인에 무척 익숙하다는 뜻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을 빼앗길 미녀 여배우를 봐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데 수애를 본 순간 그는 격정에 휩싸였다.

인자한 미소가 깃든 도톰한 입술과 그윽한 눈빛이 그리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뭔가 신비롭네…’

같은 동양인이기 때문일까?

그리드는 수애를 지슈카, 아이린이 아닌 유라와 비교하게 되었다.

압도적인 아름다움 탓에 자신을 제외한 주변 모든 풍경을 흑백화시키는 유라.

그녀를 한 떨기 고고한 꽃이라 비유할 수 있다면 수애는 마치 달빛 같았다.

서늘하게 감싸지는 느낌이 들면서 짜릿했고, 동시에 묘한 욕정이 끓어올랐다.

희고 가는 목덜미를 따라 내려오는 곡선이 풍만해서?

부정할 순 없지만, 그것보다는 눈빛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품위가 있으면서도 잠재 된 문란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문득, 그리드가 깨달았다.

수애의 연령대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몇 살이나 연하인 유라보다 훨씬 더 성숙한 것이다.

‘유라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이런저런 경험을 쌓게 되면 저렇게 변하지 않을까?’

가슴만은 뭐 어떻게 못하겠지만.

‘의학의 도움을 받는 건 서글픈 일이고 말지.’

그리드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원정 채비는 잘 되고 있느냐?”

“네, 매일하는 일인 걸요.”

“호랑 대장에게 듣자하니 괴물들의 영역이 확대되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는데… 너와 주작단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이 아비는 심히 걱정스럽구나.”

“우리가 무너지면 판게아도 끝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어요. 일정을 관리하여 체력 안배에 신경 쓰고 있으니 심려치 마세요.”

한속봉과 수애는 다소 무거운 내용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을 토대로 유추해 보건데, 성던전의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영역을 확대하는 중이었고 이는 자칫 판게아를 위협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 같았다.

‘북쪽에 형성 된 몬스터 군락 때문에 수도에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는 상황 같고.’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양반들은 뭘 하는 거지?’

그들은 무려 전설로 추정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또한, 그들이 속한 환국은 초국 판게아의 백성들조차 우러러보고 있었다.

판게아의 보물 주작궁도 환국이 준거라고 했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면 환국과 양반들은 판게아에 은혜를 베풀어주는 존재로 해석됐다.

‘양반들이 북쪽에 형성 된 몬스터 군락이나 성던전 문제를 해결해줘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인건데.’

얼마 전 보았던 양반들은 어째서 판게아를 방치하고 떠난 걸까?

‘뭐, 덕분에 나만 좋지.’

지천에 사냥터가 널렸다.

방긋!

활짝 미소지은 그리드가 한속봉에게 다가갔다.

수애와 눈이 마주치는 일은 피했다.

눈이 마주쳤다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것 같았던 까닭이다.

첫사랑의 실체를 알고 실망한 이후, 여성에게 큰 관심을 갖지 못했던 그리드가 이성을 이토록 의식하는 일은 실로 몇 년 만에 벌어진 대사건이었다.

“흠흠, 어서 성던전에 입장하고 싶습니다만.”

요구하는 그리드를 한속봉 대신 수애가 응대했다.

“귀인께서 성던전에 출입하고 싶으신 이유가 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싱긋.

요염하게도 웃으며 묻는 수애였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순간, 우려했던 대로 얼굴을 붉히고만 그리드가 애써 침착하게 답했다.

“은사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얻는 방법은 알고 계시는지요? 아, 결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저는 한속봉 영주님의 여식이자 주작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한수애라고 합니다. 소개가 늦었지만 부디 어여삐 봐주세요.”

꾸벅, 가볍게 인사한 수애가 그리드에게 악수를 건넸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녀의 손을 맞잡지 못했다. 어느새 귀까지 붉어진 채 험험, 시선을 피했다.

순간, 수애의 검은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였다.

‘이 남자 동정…’

다 큰 사내가 여인과 눈도 못 마주치는 것을 봐서는 경험이 없는 게 분명했다.

수애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딱 그뿐.

사적인 흥미는 없었다.

“여러분께서 주작궁의 복원에 성공하셨다는 이야기는 이미 소식을 통해서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드려요. 제가 판게아의 백성들을 대표해서 평생토록 은혜를 갚아가겠습니다. 예를 들면 은사를 선물해드린다거나.”

“……!”

은사를 선물해준다는 말에 그리드와 화이트가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을 선물로 준다고 하니 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두 남자 모두 정신을 차렸다.

“아니요, 은사는 저희가 직접 얻겠습니다.”

그리드는 레벨도 올리고 득템도 할 겸 새로운 던전을 체험해보고 싶었다.

또한 화이트는 철갑귀 사냥에 일조함으로써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 싶었다.

의지를 불태우는 두 남자에게 수애가 일침을 가했다.

“은사를 얻는 방법은 철갑귀를 사냥하는 것밖에 없어요. 하지만 철갑귀는 무척 강하죠. 그 괴물들에게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만 해도 기백이에요. 그중 한 분이 바로 더화이트님이셨구요.”

“…”

“전사가 아닌 여러분께서 철갑귀를 사냥하시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원정대에 섞여서 견학을 하시는 것도 위험하고요. 그러니까 공교롭게도 여러분의 던전 출입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문지기의 공격을 견딜 수 있으면 원정대에 섞여가도 좋다고 영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그리드가 반문하자 수애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문지기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웅족입니다. 무예를 익히지는 못했지만 타고난 용력이 상상을 초월해요. 철갑귀의 검격만큼이나 강력한 문지기의 공격을 정녕 여러분께서 견딜 수 있으시리라 보나요? 귀하신 몸 상하지 말고 포기해주세요.”

‘웅족?’

우물 옆에 서있는 저 문지기.

키가 2미터를 훌쩍 넘고 배는 남산만큼 불러있다 싶더니, 단순한 비만 거인이 아니라 종족 자체가 다른가보다.

‘그래봤자.’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 마시죠. 견딜 수 있으니까.”

그리드는 최대한 태연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는 여전히 수애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수애를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수애는 그리드가 가여웠다.

‘설익은 사내의 헛된 자존심.’

그 쓸데없는 자존심이 본인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겠지요.’

한숨 쉬는 수에에게 한속봉이 속삭여왔다.

“판게아의 은인이시다. 귀인께서 저렇게까지 부탁하시는데 한 번만 편의를 봐드리는 게 어떻겠느냐?”

“은인이시기에 더욱 더 안 돼요. 저분께서 자칫 몸이라도 상하시면 어찌하나요?”

“하지만 보거라. 귀인께서 무장하고 계신 갑옷. 어느 모로 보나 튼튼할 것 같지 않으냐? 귀인께서 갑옷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실지언정 최소한의 생존력은 보장 받으실 게다. 웅이에게 힘의 3할만 써서 때리라고 전해다오.”

“…”

확실히, 갑옷이 엄청 단단해 보이기는 한다.

용의 비늘처럼 세공한 철판을 수백 개나 겹겹이 쌓아 만든 갑옷이었다.

아름다움 또한 대단한 것이 희대의 걸작품으로 보였다.

“1할이에요. 그 정도면 며칠 기절하는 걸로 끝날 수도 있겠네요.”

“그래, 잘 생각했다. 귀인께서 더 이상 욕심내지 못하시게끔 따끔히 알려 드리거라.”

끄덕.

고개를 끄덕인 수애가 그리드와 화이트를 문지기의 앞쪽으로 안내했다.

문지기 웅.

영주님이 귀한 손님들과 행차하셨건 말건.

먼 산을 바라본 채 하품만 하고 있던 그가 두 눈을 깜빡였다.

“뭐죠오?”

머리를 긁적이며 질문하는 웅에게 수애가 속삭였다.

“저분들을 한 대씩만 때려드려. 힘의 1할만 써서.”

“으응, 알았습니다아.”

쿠함.

마치 곰처럼 크게 양팔을 벌린 웅이 황소처럼 콧김을 뿜었다.

순간.

“저분들을 의무실로 옮길 준비를.”

수애가 주작단원들에게 명령했고,

쩌어어어어어엉-!!

웅의 주먹이 그리드의 복부에 꽂혔다.

마치 쇠가 쇠를 때리는 소리가 폭발하면서 일대에 음파가 발생했다.

“이런…!”

수에가 아연실색했다.

웅이 힘 조절을 잘못해서 5할 이상의 힘을 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돼!!”

한속봉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주작궁을 완벽하게 복원해준 은인 중의 은인께서 이토록 허무하게 자신의 눈앞에서, 그것도 자신의 부하가 실수한 바람에 죽게 생겼으니 그는 충격적이었다.

“난리났군.”

주작단원들이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그때.

부들부들.

그리드의 복부에 꽂힌 웅의 바위 같은 주먹은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응?”

한속봉과 수애, 그리고 주작단원들 모두가 어리둥절해졌다.

‘어째서…’

‘웅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거지?’

그렇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웅의 커다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뻘뻘 식은땀까지 흘렸다.

반면 그리드는 멀쩡했다.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서있었다.

‘저럴 수가!!’

‘말도 안 돼.’

한속봉과 수애는 안도하면서도 경악했다.

내장이 파열되고 뼈가 조각나서 그대로 죽어버릴 줄 알았던 그리드가 멀쩡하다니?

도대체 저자가 입은 갑옷은 얼마나 단단하단 말인가!

할 말을 잃은 한속봉과 수애를 대신해서 주작단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저 정도 방어력이라면 철갑귀의 은사에 습격을 당하더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겠군요.”

그리드의 성던전 출입이 허가되는 순간이었다.

한편, 그리드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강력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삼겹갑>이 물리 공격으로 받은 피해를 30퍼센트 경감시켰습니다.]

[2,30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웅이 휘두른 주먹은 베기, 찌르기 판정을 받지 않았다.

하여 삼겹갑의 <피해 50퍼센트 경감>효과가 발동하지 않았음을 감안해도 상당한 피해다.

한데 이게 고작 1할의 힘이란다.

철갑귀의 공격은 이보다 몇 배나 아플 것이 자명했다.

‘철갑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놈이겠어.’

다수 출현한다는 점을 보면 보스가 아니라 일반 몬스터 같은데 말이다.

만약 놈들이 대량으로 출몰한다면 최대한 공격을 막고, 피해가면서 싸워야할 판국이었다.

‘던전이 좁기라도 했다가는 갓 핸드를 운용하기도 힘든데.’

이번 인던은 극도의 컨트롤이 요구되는 전장 같다.

그리드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보다 화이트가 훨씬 더 긴장했다.

그리드를 때렸다가 입은 손의 상처를 감싸 쥐고 있는 웅이 일견하기에도 엄청나게 화가 난 상태였던 까닭이다.

“저… 저는 그냥 오늘은 포기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원수는 나중에, 혹은 다른 형태로 갚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 화이트.

그는 현명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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