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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66화 (361/1,794)

템빨 26권 - 5화

판덕공.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 이름이 판덕인 줄 알겠군!’

판덕이라고 오해받는 건 문제가 아니다.

판덕이라는 이름, 딱 그리드의 취향이었으니까. 나쁘지 않고 도리어 좋다.

지금 그리드가 문제 삼는 것은 칭호의 이름이 아니라 효과였다.

‘몬스터를 사냥하면 일정 확률로 살려준다니?’

그럼 경험치는? 돈은? 아이템은!

‘특히 보스 잡을 땐 어떻게 되는 거야?’

기껏 몇 십 분, 혹은 몇 시간씩 투자해서 모든 걸 쏟아 붓고 보스 레이드에 성공하는 순간!

[판덕공 칭호 효과로 대상을 살려줍니다!]

이딴 알림창이 뜨면?

“윽…”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위경련이 일어난다.

그렇다.

그리드는 판덕공의 칭호 효과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몬스터를 살려준다는 것은 몬스터와의 호감을 쌓는 수단 같고, 어쩌면 테이머 계열의 스킬이 아닐까?’하는 일반적인 추측은 하지 못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리드는 이미 잡캐 중의 잡캐다.

대장장이이면서 검사였고, 마법사이자 해골 소환사였다.

여기서 또 설마 자신에게 새로운 직업 효과가 생길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원하지도 않았고.

“에이, 씨…”

한속봉에게 기껏 레전드리 등급의 주작궁을 넘기고 호감도를 80이나 올렸건만.

그토록 기대하던 차등 보상이 쓰레기라니!

좌절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한속봉이 아기 주먹 크기의 구슬을 건넸다.

마치 홍옥. 그래, 브라함의 눈동자처럼 아름다운 붉은 빛깔의 구슬이었다.

처음에는 동그란 루비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깜짝 놀랐다.

“불꽃?”

반투명한 홍옥 속.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성냥불처럼 작은 크기의 불꽃이었지만 기세만큼은 승천할 듯 거셌다. 마치 생명을 불태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본 그리드의 감상은.

“토치…?”

“…”

만약, 이 자리에 플레이어가 있었다면 그리드의 감상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NPC들은 토치를 몰랐다.

“토치가 뭡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속봉과 화이트.

그들에게 아니라고 손을 휘저은 그리드가 질문했다.

“그래서 이 토치… 아니, 이 불 들어있는 구슬은 뭡니까?”

“불 들어있는 구슬…”

저 아름다운 구슬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저런 이름이 되는구나.

‘그림 감상 같은 건 절대로 안 하실 분 같군…’

생각하면서, 한속봉이 설명했다.

“주작의 숨결입니다.”

“숨결?”

“네, 사신들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앞길을 축복해주고자 나타날 때 인계로 떨어뜨리는 숨결.”

‘신선… 우화등선.’

동대륙의 핵심적인 설정.

환국, 무릉도원, 양반, 신선.

한국 문화와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럼 분명히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설정이나 지역도 있겠네.’

분노할 극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S.A그룹은 한국 기업인 주제에 어째서 왜놈들의 문화를 세상에 전파하는 거냐며, 매국노라고 힐난할 게 뻔했다.

피식.

오래간만에 떠오르는 친구를 생각하자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기분 좋아진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나타났다.

[퀘스트 <한속봉 배 대회에서 우승하라!>의 차등 보상으로 <주작의 숨결>을 획득하였습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띠링~

<주작의 숨결>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주작의 축복을 받습니다.

화염 내성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아이템에 강력한 주작의 기운을 불어 넣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불 속성이 강한 아이템에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무게:2

“허.”

이제 보니 판덕공 칭호는 퀘스트 보상이 아니었다.

이 주작의 숨결이야말로 진정한 보상이었다.

“이걸 주작궁에 귀속시키면 진짜 주작궁이 탄생하는 겁니까?”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한속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고 타오르는 영험한 불의 기운입니다. 인계에 이보다 강한 불의 기운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대박…!’

그것도 초대박이다.

백린목과 조화를 이뤘을 때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지 쉬이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이다.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을 만들어 바친 보람이 있군!’

주작의 숨결을 융합시킨 주작궁은 신화 등급으로 승급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드는 추측하며 기뻐했고, 그를 바라보는 한속봉의 얼굴에는 다소 그늘진 미소가 떠올랐다.

환국의 양반들이 판게아에 하사한 주작의 숨결은 총 3개.

그중 하나는 원본 주작궁에 귀속되어 있다가 정체불명의 도사에게 도둑맞았고, 이제 2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드에게 그중 하나를 준다는 것은 사실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만약, 언젠가 또 다시 주작궁을 손실하게 될 경우 두 번 다시는 주작궁을 복원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속봉은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리드가 만들어준, 원본보다 더욱 더 값진 주작궁에 보답하려면 가장 소중한 것을 줘야한다고 판단했고 그게 바로 주작의 숨결이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주작궁을 잃는 사태는 두 번 다시없을 것이다.

결의를 다지는 한속봉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근데 성던전은 어디에 있죠?”

번뜩 정신을 차린 한속봉이 어색하게 웃었다.

“성 서쪽에 있는 우물을 통해서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철갑귀!

은사!

새로운 사냥터.

그것도 특정 요건을 달성한 극소수의 인원만이 출입할 수 있는 던전에 대한 그리드의 환상은 무척 컸다.

흥분한 그가 당장 튀어나가려고 했지만 한속봉이 말렸다.

“제가 귀인께 성던전 출입권을 드린 것은 사실입니다. 단, 귀인께서는 성던전에 마음대로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엥? 출입권을 줘놓고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게 말입니까 방귑니까?”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귀인께서 완벽한 호위병을 준비해 오신다면 출입을 허하도록 하지요.”

“호위병이라고요?”

힐끗, 화이트의 눈치를 살핀 한속봉이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수년 전, 우리 판게아는 위대한 대장장이를 잃는 끔찍한 사건을 겪고 말았습니다. 바로 더화이트… 여기계신 화이트 대장의 아버님이셨죠.”

한속봉 배 대회에서 우승하고 은사를 얻고자 성던전에 출입한 더화이트.

그는 도리어 철갑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때 영주는 깨달았다.

영주군의 여력으로는 약자를 완벽히 보호할 수 없음을.

“성던전에 입장하고자하는 자는 스스로를 보호할 채비를 완전히 갖춰야만 합니다. 최소 은패급 용병 여섯 명, 혹은 금패급 용병 한 명을 호위로 거느리셔야 던전에 입장하실 수 있습니다.”

“…”

용병이라 함은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을 뜻한다.

그리드는 일반 대장장이가 아니라 파그마의 후예인 바.

본인부터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에 쓸데없이 용병 고용에 돈 쓰고 싶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저는 제 한 몸 지킬 힘이 충분히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말하죠.”

“아니, 전 진짭니다.”

“흐음…”

한속봉이 그리드의 위아래를 훑었다.

낡아빠진 천 옷차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으나 방어적인 부분은 영 취약해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현재 귀인의 상태로는 철갑귀의 손톱이나 은사에 스치기만 해도 사망하실 겁니다.”

“그럼 이건요?”

철컥!

철컥철컥!

대장일 중에는 늘 그래왔듯이 초보자 옷차림을 하고 있던 그리드.

그가 인벤토리로부터 삼겹갑 세트를 꺼내 입었다.

순식간에 중갑으로 몸을 무장하는 그를 보고 한속봉과 화이트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장장이가 저런 무거운 갑옷을 무장할 수 있다니?’

‘과연 귀인… 최고의 대장장이답게 힘과 체력도 장사신가 보구나.’

대장장이는 직업 특성상 힘과 체력도 중요하다.

극의에 오른 대장장이라면 힘과 체력이 기사처럼 높을 수도 있었다.

그리드가 중갑을 입어도 비현실적인 일은 아니란 뜻이다.

그래, 한속봉도 그 부분은 납득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드를 위태롭게 보았다.

“힘과 체력이 좋아 갑옷을 무장할 수는 있다고 해도, 이를 다룰 기술은 없으실 겁니다. 제아무리 튼튼한 중갑일지언정 초심자가 입어서야 경갑보다 못하겠죠.”

헤비 아머 마스터리의 부재.

즉, 패널티를 지적하는 것이다.

헤비 아머 마스터리가 없는 직업군은 중갑을 입지 못했고, 특수한 이유로 입게 되더라도 방어력을 절반조차 적용받지 못했다.

염려하는 한속봉에게 그리드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파그마의 후예를 엄밀히 분류하면 비전투직업군이다.

검술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하여 <파그마의 검무> 패시브 효과가 소드 마스터리와 비슷한 효력을 발휘한다고는 하나, 아머 마스터리 계열 스킬은 하나도 보유하지 못했다.

치명적인 단점이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템 착용 시 패널티를 받지 않는다.

즉, 그리드는 갑옷의 효과를 101퍼센트 이상 끌어내지 못할지언정 100퍼센트의 효과는 살릴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실력자들은 자만하고 위험을 자초하는 법. 이는 귀인께서도 어쩔 수 없는 겐가.’

죽기 전 더화이트의 모습과 지금 그리드의 모습이 꼭 닮아있다고 생각한 한속봉이 씁쓸해했다.

그가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그렇다면 증명해보이시죠.”

“증명?”

“네, 성던전 출입구로 가시면 문지기가 있습니다. 그자의 용력은 무척 뛰어나서 철갑귀와 비슷한 공격력을 발휘하지요. 그자의 공격을 일격이라도 버텨보십시오.”

물론, 문지기에게는 힘을 조절하라고 지시할 예정이다.

문지기가 진짜 힘을 발휘했다간 그리드가 죽을 터였으니까.

‘한 30퍼센트의 힘으로만 때리라고 명하면… 죽진 않으실 게다.’

며칠 기절만하고 끝날 거다.

생각한 한속봉이 그리드와 화이트를 성던전 출입구로 안내했다.

그를 뒤따라 걷는 화이트의 안색은 어두웠다.

화이트 또한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성던전 출입을 원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철갑귀 원정에 힘을 보태어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은사도 얻고 싶었으나…’

자격미달로 입장조차 불가하다니!

그저 부끄럽고 분할 따름이다.

좌절하고 있는 화이트의 어깨 위로 그리드가 손을 얹었다.

“양산형 그리드 셋트라고… 당신 정도의 근력과 레벨이면 충분히 입을 수 있는 훌륭한 방어구가 있는데. 어때요? 빌려줄까요?”

“헛.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리드를 완벽하게 신뢰하는 화이트였다.

의심하지 않고 바로 혹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싱글벙글 웃어주었다.

“시간당 대여비 500골드. 콜?”

사실, 그리드는 수리비도 별도로 청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화이트와 워낙 친해진 탓에 그렇게까지 냉혹하게 굴기가 어려웠다.

“문지기의 시련을 넘을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거래가 성립됐다.

만족한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인벤토리 구석에 나열되어 있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 중 하나를 꺼냈다.

각 부위가 무려 +7까지 강화되어있는, 유니크 등급의 그리드 세트였다.

레이단의 젊은 기사 <로이먼>이 병사 시절 입었던 무구다.

‘그 남장여자… 무럭무럭 잘 크고 있겠지?’

가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기사로서의 실력을 말하는 거다.

로이먼은 피아로가 직접 선별하고 수련시킨 인재.

그녀에 대한 그리드의 기대감은 각별한 것이었다.

***

“자, 도착했습니다.”

그리드와 화이트가 모종의 거래를 성사시키고도 수십 분이 지난 후.

일행은 드디어 성 서쪽 우물 앞까지 당도했다.

성던전으로 통하는 입구.

그 곁을 키 2미터의 거한이 지키고 서있었다.

“맨 손으로 바위마저 가루로 만드는 이 친구에게 얻어맞는 경험… 꼭 하셔야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묻는 한속봉에게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때려요. 나는 괜찮으니까.”

아, 근데.

“화이트, 당신은 좀 아플 수도 있겠어. 저 문지기 보통이 아니네.”

“…예?”

그리드가 빌려준 갑옷만 믿고 있다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화이트였다.

한편, 그들을 불쾌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한속봉의 딸 수애와 성던전 원정대 소속 기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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