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65화 (360/1,794)

템빨 26권 - 4화

‘와나 이런 염… 얼탱이가 없네?’

기껏 힘들게 궁리하고, 최선을 다해서 제작한 주작궁이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가 사용되는 등 그리드의 노력과 기술의 정수가 들어간 그것을…

‘내놓으라고?’

귀를 의심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한속봉이 재차 요구했다.

“귀인께서 복원한 주작궁은 우리 판게아가 평생토록 잘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어서 주십시오.”

“아니, 이 아저씨가 뭐 이리 당당… 아!!”

얼굴을 대추처럼 붉힌 채 도끼눈 뜨던 그리드가 문득 깨달았다.

복원!

본디 그대로 회복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다.

그리고 주작궁이란 판게아가 소중히 보관해왔던 보물이고, 판게아는 그것을 잃었기 때문에 복원을 원했다.

‘한속봉이 주작궁의 복원을 원한 이유…’

그건 당연히.

주작궁을 본래의 자리에 돌려놓고 싶었던 것!

아, 이걸 왜 몰랐지?

‘개빡…’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은 그리드가 자신의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그는 너무 억울했다.

이번 퀘스트를 수행한 것 자체가?

아니, 퀘스트 내용에는 하등 불만 없다.

무려 영주와 친분을 쌓고 성던전 출입권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였다.

주작궁을 대가로 줘야한단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도 필시 수락해야만 했던 퀘스트다.

애초에 그리드는 주작궁의 주재료로 사용되는 백린목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입장.

주작궁을 남에게 주더라도 크게 아깝지 않았다.

‘그 주작궁이 에픽이나 유니크 등급이었다면 말이지!’

하필이면 왜!

‘반납형 퀘스트에서 레전드리 등급이 뜨는 거냐!’

돌이켜보면 국가대항전에서도 이랬다.

반납형 퀘스트에서 성장형 아이템을 만들었다가 빼앗겼다.

그리드는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꼭 남한테 넘겨줘야하는 경우에만 좋은 아이템이 만들어지다니…’

레전드리 아이템이 만들어진 순간,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자부했던 자기 자신이 바보처럼만 느껴진다.

“행운아는 개뿔…”

나는 불운아다.

그것도 희대의 불운아!

“자, 어서 가시죠.”

맥없이 주저앉은 채 연신 한숨만 내쉬는 그리드.

한속봉이 그를 친히 일으켜주었다. 그리고 화이트까지 챙겨서 나란히 영주 성으로 향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우리의 위대한 영주께서 대장장이의 손을 붙잡아 주시다니?

이례적인 광경에 흥분한 관중들이 열렬히 환호하였고,

“작년도 우승자인 내게도 저렇게 까지는 안 해주셨는데…”

푸른 불꽃의 대장 에녹은 좌절했다.

자신이 그토록 무시했던 화이트의 신세가 하루아침에 자신을 초월하였으니 그는 분통이 치밀었다.

***

판게아 영주 성.

“허.”

대회장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

1시간 내내 투덜거리던 그리드가 드디어 입을 다물고 감탄했다.

판게아 성의 고풍스러운 자태에 마음을 사로잡힌 것이다.

판게아 성은 사극에서나 봤던 고려시대의 성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훨씬 더 크고 화려하지만.’

끊임없이 펼쳐진 대리석 바닥을 따라서 걷다보니 일곱 개의 문을 넘었다.

그리고 드디어 성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궁궐에 도착했다.

영주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성의 가장 은밀하고도 중요한 장소였다.

화이트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드면 또 모를까.

일개 대장장이인 자신이 설마 궁궐까지 초대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던 까닭이다.

“저… 영주님. 이곳은 저처럼 미천한 자가 함부로 발을 들일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말하는 화이트에게 대꾸하는 것은 한속봉 영주가 아니라 그리드였다.

“대장장이가 왜 미천해?”

“하하! 귀인의 말씀이 옳소! 대장장이란 국력의 근간! 더군다나 화이트 대장은 판게아 최고의 대장장이가 아니시오! 스스로를 천하게 여겨서야 나라가 흔들릴 일이오!!”

“…”

화이트는 그저 꿈만 같았다.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람들에게 무시와 멸시를 당했던 자신이, 지금은 나라 전체에서 존경받는 영주님께 인정받고 나란히 서있는 신세다.

대회장을 떠날 때 들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고 소름이 돋았다.

‘내 삶이 한 순간에 바뀌려하고 있다…’

이 모든 건.

‘그리드님의 덕분!’

초롱초롱!

그리드를 바라보는 화이트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배고프다고 보챌 때 노에의 눈빛과 닮아있었다.

그리드는 부담스러웠다.

‘아재들의 사랑은 이제 그만…’

예전부터 이랬다.

그리드는 아저씨나 할아버지 NPC들에게만 유달리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칸이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싫을 리 있겠느냐마는, 그리드는 한창 때의 젊은 남성이다.

기왕이면 남성보다 여성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대장장이 NPC 중에 여자도 많다던데.’

왜 내가 가는 동네는 죄다 중노년 남성 대장장이들만 있는 걸까?

심지어 유일하게 만난 엘프도 남자고.

“설마…”

이것도 태생적으로 타고난 악운의 여파가 아닐까?

소스라치게 소름 돋는 일이다.

우울해져서는 어깨를 늘어뜨리는 그리드였다.

그를 한속봉이 궁궐의 한쪽 방으로 이끌었다.

한 눈에 봐도 못 쓴 붓글씨가 벽면에 가득 붙어있는 작은 방이었다.

“와, 글씨를 나만큼이나 못 쓰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었네.”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는 그리드였다.

흠흠, 헛기침하면서 얼굴을 붉힌 한속봉이 ‘룰’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한지를 벽에서 떼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까 룰이 아니고 ‘불’이라는 글자였다.

한지를 뗀 자리에는 작은 버튼이 숨어있었고, 한속봉이 그것을 누르자 평평하던 벽면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 가시죠.”

음침한 입구를 보고 경계하는 그리드와 두려워하는 화이트.

그들에게 인자한 미소를 선보인 한속봉이 앞장서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성 지하에 이런 곳이…”

은은한 광채를 발하는 백옥을 깎아 만든 비석이 우뚝 선 지하 공간.

음침하기보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작은 공간이었다.

벽면 가득한 푸른 이끼들이 백옥의 광채를 받아 아름답게 빛났다.

“성던전이라기에는 작고… 여긴 어디죠?”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빼앗았던 주작궁을 품에서 꺼낸 한속봉.

비석 앞에 마련 된 제단 위에 주작궁을 올려놓은 그가 긴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이하 생략.

‘수맥? 오행이 뭐? 뭐라는 거지.’

그리드로써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긴 설명이었다.

혼란스러워하면서 모든 설명을 한 귀로 흘려버린 그리드에게 한속봉이 요점만 집어주었다.

“즉, 이곳은 그리드님 당신의 위대한 작품이 앞으로 평생토록 자리를 지키게 될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아… 네.”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알겠다.

내 레전드리 주작궁.

앞으로 평생 되찾지 못할 거란 사실.

‘동대륙에 널린 게 백린목이니까 새로운 주작궁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만…’

과연 또 다시 레전드리 등급의 주작궁을 만들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아?”

부들부들, 치를 떨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석봉… 아니, 속봉 영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작궁의 활적인 기능만을 복원한 것이지 주작의 기운을 복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굳이 제가 만든 주작궁이 필요하십니까? 쓸모없는 거 아니에요?”

주작궁에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그리드였다. 돌려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한속봉은 크게 오해하고 말았다.

“귀인께서는… 정녕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네?”

“주작궁을 복원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건만, 귀인께서는 제게 더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음을 마음에 두고 염려하시는 겁니까.”

“…?”

쓸데없이 좋을 대로 해석하는 한속봉 탓에 그리드가 당황하는 그때.

“귀인께서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초왕과 비견될 정도로 덕이 넘치십니다. 보고 있노라면 그저 존경심만 피어오르는군요. 하여, 만약 결례가 안 된다면 제가 귀인께 감히 한 가지 칭호를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칭호라고!’

Satisfy에서 칭호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특정 능력치를 올려주거나 새로운 스킬, 혹은 권력을 주기도 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칭호였고, 그리드가 이를 마다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주시죠! 칭호!”

기뻐하며 외치는 그리드에게 한속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이 넘친다하여 덕공(德公). 거기에 판게아의 판을 따서 판덕공(PAN德公)이라 하지요.”

“판덕…공.”

어감이 심히 별로다.

실망하는 그리드의 뇌리로 브라함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내가 직계 뱀파이어로써 지공(智公)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처럼 인간 전설들 또한 하나 같이 공(公)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검성 뮐러는 압공(壓公), 대장장이 파그마는 화공(火公) 등. 공의 칭호는 전설 개개인의 대표적인 능력이나 이미지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전설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실제로 파그마는 화공의 칭호를 얻은 뒤부터 망치질과 검무에 화염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지.’

“오…”

그리드의 실망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새로운 기대감에 휩싸인 그가 브라함에게 물었다.

‘그럼, 덕공인 내게는 무슨 능력이 생길까?’

그와 동시였다.

[칭호 <판덕공(PAN德公)>을 획득했습니다!]

[패시브 스킬 <덕공의 아직 완전치 못한 자비>가 생성됩니다!]

<덕공의 아직 완전치 못한 자비>

분류:패시브

몬스터 사냥 시, 일정 확률로 목숨을 빼앗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살려줍니다.

“야이 XX.”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간만에 욕설을 지껄이는 그리드였다.

그를 브라함이 위로했다.

‘흥, 바보 아니랄까봐 공의 칭호도 허접한 것을 얻었구나. 뭐, 하지만 너무 괘념치 마라. 본래 공의 칭호란 일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이 붙여주는 것. 아주 어쩌면 훗날 새로운 공의 칭호를 얻을 수도 있을 테지. 뭐, 네가 평생 허접한 칭호를 달고 있을지언정 내가 잘 보살펴준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을 테고.’

“아, 몰라. 나한테 자꾸 이러면 게임 접는 수가 있어.”

이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상상치 못했다.

덕공의 위력을!

***

S.A그룹 본사.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회장 임철호에게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의 보고가 들려왔다.

[공의 칭호가 등장했습니다.]

“뭐라고?”

임철호가 깜짝 놀랐다.

공의 칭호란 전설을 계승하거나 성장시킨 플레이어만이 획득할 수 있는 상징적인 힘.

매우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얻기가 쉽지 않았다.

무수한 업적을 쌓고 Satisfy의 주민들에게 완벽한 인정을 받아야만 태동하는 힘이었다.

“모르페우스? 공의 칭호가 등장하는 시기는 앞으로 최소 1년 8개월 후라지 않았던가?”

[기적의 5인방 중 하나. 그리드가 또 한 번 예측을 깨뜨렸습니다.]

“그리드…! 하하! 이번에도 그자인가?”

임철호는 그리드에게 큰 호감을 품고 있었다.

보잘 것 없던 사내가 내가 만든 게임을 토대로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으니, 보고 있으면 흐뭇하고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기대감에 사로잡힌 임철호가 물었다.

“그가 이번엔 또 어떤 새로운 발상으로 네 예측을 깨뜨린 거지?”

[새로운 발상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NPC를 존중하고 아껴줌으로써 큰 호감을 얻었고, 이 반복적인 행위가 정확히 79번째 이뤄졌을 때 공의 칭호가 개방됐습니다.]

“음… 그건 그리드의 특기지.”

그리드가 NPC의 호감을 사는 일.

매번 의도하는 일은 아니었고, 간혹 오해로 발생하는 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임철호와 모르페우스는 당연히 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얻은 공의 칭호는?”

[판덕공입니다.]

“판…덕공?”

덕공 앞에 별도의 상징을 지닌 판자가 들어갔다는 말은 즉, 아직 그리드가 순수한 덕공은 되지 못했단 뜻이다.

뭐, 그건 당연했다.

벌써부터 완벽한 공의 칭호가 등장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으니까.

임철호가 당황하는 부분은 그리드가 얻은 공의 칭호가 하필이면 덕공이라는 부분에 있었다.

“덕공… 그건 대장장이랑 상성이 안 맞지 않나?”

다른 분야의 전설과 궁합이 맞도록 설계 된 공의 칭호인데?

“아니, 왜 화공을 못 얻고 덕공을… 아이고, 이거 또 난리를 치고 있겠구먼.”

그리드가 지랄발광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쯧쯧, 임철호가 혀를 찼다.

“그러게 왜 매번 NPC들에게 착하게 잘 대해줘가지고…”

그리드가 타고난 마음이 사실은 착하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리라.

임철호는 그리드가 흐뭇하면서도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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