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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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26권 - 1화
“으, 으음…”
화이트를 비롯한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은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불 지펴달라고 섭외한 나무꾼이 어째서 우리의 선두에 서는가?
‘뒤에 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주작궁의 도안을 너무 대단하게 만든 사람이라서 도통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당최 정체가 뭐지?’
‘어쩌면 화이트 대장의 말씀처럼…’
‘무릉도원에 오르기 직전의 귀인일 수도…’
‘다름 아닌 백린목을 벌목해온 사람이니까 말이야.’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이 수군거리면서 무대에 오르는 동안.
“우우우-! 우우우우우우!!!”
“화이트 이 겁쟁이 녀석!! 다른 대장간은 모두 대장들이 선두에 섰는데 왜 너 혼자만 신참을 앞세우는 거냐!!”
“뒤로 숨는 것을 보니 부끄러운 건 또 아나보지?”
관중들의 야유가 점차 심해졌다.
푸른 불꽃의 대장 에녹은 화이트의 곁까지 다가와서 이죽거렸다.
“뭘 굳이 또 대회에 참가하고 그랬나? 어차피 결과는 지난 3년 동안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안 그런가? 만.년.꼴.찌. 친구.”
“…”
화이트는 에녹을 상종하지 않았다.
타인을 깔보고 비웃기를 즐기는 유형의 인물에게 일일이 반응해봤자 재미만 주는 꼴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무시하면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나가리라 보았다.
하지만 에녹은 집요했다.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군. 능력도 없는 주제에 굳이 나대면서 하얀 망치의 명성을 갉아먹다니… 아, 아니지. 하얀 망치의 명성은 더화이트가 죽은 시점에 이미 지하까지 추락했던가? 어리석게도 철갑귀 토벌대에 끼었다가 개죽음을 당한 그날 말이야.”
“놈!!”
“큭큭! 이제 보니까 어리석은 건 부전자전이었어!”
도를 넘기 시작하는 에녹이었다.
화이트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머리가 노래질 정도로 화가 나서 이성이 날아간 그가 에녹의 면상에 주먹을 꽂으려는 순간이었다.
“왈왈. 왈. 가만 보면 꼭 병신들이 개소리를 지껄여요.”
“…?”
주먹을 날리려던 화이트와, 그런 화이트를 보고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에녹.
두 사람이 동시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의 흑발 사내를 발견했다.
하얀 망치의 정체불명 신입, 그리드였다.
에녹에게 피식,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 뀌어준 그리드가 말했다.
“미친개는 매가 약이지. 조금만 기다려봐. 굳이 화이트 스승님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이 내가 널 박살내줄 테니까.”
“화이트 스승님…?”
화이트와 에녹이 동시에 놀랐다.
화이트의 어안이 벙벙해졌고 에녹은 푸하하하!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것 참 환장하겠군! 화이트! 네놈이 주제도 모르고 스승노릇을 하고 다녔더냐! 본인부터가 실력이 미천한 주제에 누굴 가르친다고? 푸핫! 푸하하핫!! 아이고, 배야!! 다른 대장장이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다면 모두가 배꼽이 빠져라 웃겠구나!!”
“윽…!”
화이트의 새카만 얼굴이 아주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사실은 엄청나게 빨개진 것이지만 피부가 워낙 검다보니 티가 잘 안 나는 것이었다.
화이트는 정말로 부끄러웠다.
이번만큼은 에녹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
패배자로 살아온 지난 3년 동안의 삶.
자존감을 잃을 대로 잃은 화이트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는 순간.
“고개 들어요. 땅 보는 일에 익숙해져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으니까.”
화이트의 옆구리를 찔러 정신을 일깨워준 그리드가 확언해보였다.
“오늘,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일궈왔을 하얀 망치 대장간은 대회에서 우승할 것이고.”
스윽.
그리드의 손가락이 화이트의 심장을 겨눈다.
두꺼운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혀있는 굳은살을 뒤늦게 확인한 화이트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대장장이의 손…?’
뒤늦게 그리드의 진짜 정체를 알아챈 화이트.
경악하는 그에게 그리드의 확언이 이어졌다.
“당신은 판게아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거야.”
오늘날의 우승은 비록 내게 의지하여야만 거머쥘 수 있을 테지만, 앞으로는 아닐 것이다.
화이트는 대장장이의 자애를 발동시킨 장본인.
나와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는 순간 대장장이의 기술 레벨이 큰 폭으로 오를 운명이었으니까.
***
“에녹 저 녀석은 점점 더 비뚤어지는구먼.”
“누구보다도 더화이트를 존경했던 녀석이니까. 철갑귀 토벌대에 지원한 것으로 모자라 실력이 부족한 화이트를 후계자로 선택한 더화이트에 대한 실망감이 누구보다도 컸던 게지.”
“하긴, 따지고 보면 불쌍한 건 화이트가 아니라 저놈이지. 뭐, 그렇다고 해서 저놈의 뒤틀린 인성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무시하게. 지금의 에녹과 화이트는 우리가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인물들이잖나.”
에녹은 실력이 뛰어나나 인격적으로 타락했고, 화이트는 독보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나 젊은 시절을 헛되이 날린 게으름뱅이다.
실력과 연륜까지 겸비한 검은 모루, 붉은 집게의 대장들이 보기엔 둘 다 한참 미숙한 애송이였다.
“흠, 그래. 우리는 우리의 대결에 집중하도록 함세.”
“작년에는 방심하다가 에녹에게 우승 자리를 빼앗겼다지만.”
“올해는 이전처럼 우리들의 2파전이 될 테지.”
씨익!
서로를 적수로 인정하는 검은 모루 대장 벽산과 붉은 집게 대장 라호추.
판게아 최고의 대장장이었던 더화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거물들이 투지를 불태우는 모습이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벽산! 라호추! 올해도 멋진 승부 부탁한다!”
“구관이 명관이지! 할배들 파이팅!”
“작년에 만든 주작궁은 화력이 너무 약했어! 올해는 제대로 화끈하게 만들어봐!!”
우와아아아아아!!
참으로 대조되는 분위기다.
하얀 망치 대장간은 관객들의 질타와 야유, 그리고 조롱을 받는 반면 검은 모루와 붉은 집게는 환호와 응원을 받았다.
꾸벅.
익숙하지만, 역시 마음은 아프다는 듯.
착잡한 표정을 지은 화이트가 그리드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우선, 저와 같은 대장장이인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무꾼으로 오해하여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제가 기운을 잃지 않도록 배려해주셔서.”
“딱히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
겸손의 미덕을 발휘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말문을 닫았다.
이곳은 서대륙이 아닌 동대륙.
이곳에서의 자신은 몇 개나 되는 영지를 거느린 영주도, 귀족도, 템빨단의 수장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아니던가?
사회적 지위를 고려한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그냥 성격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된다.
상기한 그리드가 말을 바꿨다.
“그래, 뼛속 깊이 감사하도록.”
후후훗! 콧대를 세우는 그리드에게 화이트가 의문을 표했다.
“한데 왜…? 당신께서는 왜 저를 돕는 겁니까?”
그리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야 당연히 나를 위해서죠. 앞으로 당분간 이곳 판게아에 머물러야하는데, 누군가에게 은혜를 입혀두면 마음껏 신세를 질 수 있으니까.”
“…그 누군가가 하필이면 저였던 이유는 뭡니까?”
“…”
그리드는 난처했다.
그리드가 굳이 하얀 망치를 찾아와서 화이트를 돕게 된 이유?
딱히 없다.
그저 하얀 망치의 위치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화이트를 만났고, 퀘스트를 받다보니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버지를 잃은 뒤부터 의지할 곳 없이 비난만을 받아온 그에게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리드는 특별했다. 본인 또한 그리드에게 특별하길 바랐다.
지금까지는 보잘 것 없는 조연의 삶을 살아왔지만, 사실은 내게도 인생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던 게 아닐까?
그래서 하늘은 그리드를 내 앞에 내려준 게 아닐까?
생각하며, 기대하는 화이트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목도한 그리드가 당황하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가식이 아닌, 진정어린 자애의 미소였다.
“당신은 특별하니까.”
그 옛날, 누구보다도 못났던 자신에게 지금의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주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
그리드는 화이트에게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다.
“오로지 당신만이 위대한 이 몸의 도움을 받을 자격을 갖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오로지… 나만이…”
몇 번이나 곱씹는 화이트의 가슴이 차츰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백린목을 벌목한 것으로 모자라서 주작궁의 도안을 순식간에 완성시킨 정체불명의 대장장이.
함부로 가늠할 수 없는 존재가 나를 특별하단다.
이에, 벼랑까지 떨어졌던 자존감이 꿈틀꿈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대회에서 하얀 망치가 우승하는 것은 하얀 망치의 힘으로만 해내야하는 게 아닌가?
도움을 준다니 감사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손을 빌려서 우승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였다.
‘자격도 없으면서 대회에서 우승해봤자 그 후엔?’
자격이 없었음이 금방 들통나고 그나마 남아있던 과거의 영광조차도 잃게 되리라.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역시… 역시 대회에 대한 도움만큼은 받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갈등하다가 힘겹게 말하는 화이트에게 그리드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은 받아들여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특별하다고. 대회가 끝난 후에 당신은 우승자로써의 자격을 자연히 갖추게 될 겁니다.”
***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은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사용 횟수가 3개씩 늘어난다.
대부분의 스킬 마스터 레벨이 10인 점을 감안해봤을 때 그리드가 사용할 수 있는 창조횟수는 총 30회로 유한하다는 뜻이 됐다.
하여, 그리드에게는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을 신중히 사용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만약 창조 스킬을 한 번이라도 함부로 사용했다간 그리드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말인 즉, 그리드가 주작궁에 창조 스킬을 사용한 것은 신중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란 뜻이다.
‘필시 가치가 있으리라 믿었다.’
대회의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외침을 들으면서 <하얀 망치>의 자리에 선 그리드.
주작궁의 도안을 펼치는 그의 얼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궁극의 희열이었다.
‘이 활을 지슈카에게 준다면.’
그리고 먼 훗날 자신의 수천수만 병사들에게 무장시킬 수 있다면.
‘무적이네.’
와르르르!
그리드가 주작궁의 도안을 완성시키자마자 달려가서 벌목해온 나무를 인벤토리로부터 꺼냈다.
새하얀 나무.
백린목이었다.
“뭐라고?”
수만 명의 관중과 수백 명의 대장장이들이 일제히 눈을 의심했다.
“그, 그리드님.”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 그리드.
혹여 긴장하기라도 할까 염려하는 화이트였으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 받아온 그리드는 후천적 무대체질이었으니까.
지금의 그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고 도리어 너무 즐거웠다.
“자, 그럼 제작을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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