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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61화 (356/1,794)

템빨 25권 - 23화

“대장…”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이 불러보지만, 화이트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앉은 채, 말없이 얼굴을 감싸고 있을 뿐이다.

자신을 비웃고 깔보는 에녹에게 아무런 대꾸조차 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한심함에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걱정하는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

부끄러워 그들을 외면하는 화이트.

불편한 광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화이트에게 다가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있어요?”

“…?”

“당한 게 분하면 갚아줘야지. 멍하니 있을 시간에 궁리하고, 노력해서 실력으로.”

그리드는 무시와 멸시에 일가견이 있다.

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받아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이트의 심정이 어떨지 헤아리고 있었다.

<대장장이의 자애>까지 더해져서 화이트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무럭무럭 커졌다.

“X같은 기분은 가슴에 묻지 말고 바로바로 훌훌 털어버려야 병이 안 돼. 그러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꺼내 봐요. 당신이 구상한 주작궁의 도안.”

“예? 아, 알겠습니다.”

화이트가 그리드를 섭외한 이유는 풀무질을 맡기기 위함이었다.

그리드는 불만 잘 다루면 됐다. 그가 굳이 도안까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또한 도안은 하얀 망치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것으로 아무에게나 함부로 보여줘선 안 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이트는 얼떨결에 분위기에 넘어가서 그리드에게 도안을 건네주고 말았다.

[<주작궁(모작:하얀 망치ver)의 도안>을 획득하였습니다.]

<도안:주작궁(모작:하얀 망치ver)>

등급:노말~에픽

노말 등급 정보

..

레어 등급 정보

..

에픽 등급 정보

..

크기 1미터 20센티미터. 단궁보다 약간 더 크고 장궁보다는 많이 작습니다.

활대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뉘었습니다.

중앙에는 환평산 대나무가 재료로 사용되고, 양쪽 고자는 혹뽕나무가 재료로 사용됩니다.

설계 그림을 확인하고 첨부 된 설명 문구를 읽어나가던 그리드가 화이트에게 질문했다.

“환평산 대나무와 혹뽕나무의 특징은?”

“환평산 대나무는 섬유질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특등품 대나무로 꼽히며, 혹뽕나무는 강유를 겸비하여 부드러우면서도 강합니다.”

“즉, 이것들을 재료로 사용해서 만든 활은 탄력이 극대화된다 이거군요?”

“예? 아, 맞습니다. 잘 부러지지도 않을뿐더러 화살을 멀리 날릴 수 있죠.”

나무꾼이 뭐 이리 잘 알지?

화이트가 어리둥절해지는 그때, 그리드는 한쪽 재료상자에 담겨있는 나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대나무와 뽕나무 모두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군.’

서대륙산 대나무나 뽕나무와는 비할 바가 안 된다. 동대륙산 나무들이 품질이 훨씬 더 우수했다.

‘마나가 충만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가?’

좋다.

분명 좋다.

‘하지만…’

주작궁은 이름부터가 불의 기운이 담긴 활이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을 자랑할지라도 결국은 나무인 대나무와 뽕나무가 불길의 열기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반신반의한 그리드가 도안의 다음 부분을 확인하였다.

완성 된 활대의 외부를 적화마의 가죽으로 감싸 멋과 함께 방화성을 챙겼습니다.

“적화마의 가죽은 뭡니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도 털끝 하나 타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녀석의 가죽입니다. 무척 탄탄하고 불에 대한 내구도가 높죠.”

“…흐음.”

여기까진 납득이 간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화염의 생성과정이다.

하얀 망치의 대장장장이들은 불을 소환하는 활을 만들기 위해서 과연 어떤 발상을 했을까?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채 도안의 마지막 부분을 확인한 그리드가 얼굴과 도안을 동시에 구겼다.

‘화석을 사용한다’는 문구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안을 함부로 구겨버리다니?

그리드에게 믿지 못하겠단 표정을 짓는 화이트였다.

그를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그리드가 도안을 다시 펼치면서 중얼거렸다.

“이건 안 돼.”

화석?

희귀한 광석이라고는 하지만 서대륙에서도 접할 수 있다.

많이 사용해본 제작재료였기 때문에 그리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철궁이나 복합궁이라면 또 모를까, 단순한 목궁으로는 화석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워. 균형이 어긋나기 십상이다. 만약 화석의 무게를 낮춘답시고 화석의 함량을 줄였다가는 화력이 약해질 것이고.’

이 도안대로 활을 제작할 경우, 주작궁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니기엔 자격이 한참 부족한 결과물이 탄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역시, 재료는 백린목을 사용하는 게 정답이야. 이건 확실하다.’

주작궁의 형태와 특징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화이트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화이트, 당신은 주작궁을 직접 본 경험이 있겠죠?”

“물론이지요. 제 고향의 보물이니만큼 멀리서나마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습니다. 큰 행사 때면 영주님께서 주작궁을 들고 행차하셨거든요.”

그리드를 바라보는 화이트의 눈빛에서 호감이 옅어졌다.

도안을 함부로 구겨놓은 그리드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호감도가 떨어진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야 얼마든지 남아있었으니까!

“당신이 만든 도안은 주작궁의 본디 형태를 최대한 본 뜬 것이고?”

“네… 본디 주작궁의 활대에는 가죽이 덮여있지 않았고 온전히 나무로만 이루어졌기는 하지만… 어떻게든지 그 형태에 가깝게 구현해보고자 노력한 결과물이지요.”

“주작궁 활대의 색은 백색이었고?”

“허, 그걸 어찌…? 맞습니다. 주작궁의 활대는 마치 백린목처럼 새하얀…”

여기까지면 됐다.

그리드는 더 이상 긴 말 않고 즉각 행동에 나섰다.

“아이템 창조.”

[어떤 아이템을 창조하시겠습니까?]

“활.”

[어떤 재질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백린… 아니, 가만.”

백린목은 용철과 비견되는 나무다. 강철보다 훨씬 더 단단해서 탄성이 약했다.

그래서 그리드는 다소 망설여졌다.

주작궁을 직접 본 적 있다는 화이트가 만든 주작궁의 도안은 ‘탄력을 중시하는 활’의 형태를 갖고 있었으니까.

만약, 주작궁이 화이트의 해석대로 탄력을 중시하는 활이 맞다면 백린목을 재료로 사용해선 안 됐다.

‘하지만 화이트가 잘못 해석한 거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그리고 그리드는 화이트보다 본인의 안목을 더 믿었다.

오만이 아니다.

전설의 대장장이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합당한 자부심이었다.

“백린목을 재료로 사용하겠다.”

그리드가 선택을 내렸다.

***

“뭐하는 걸까요?”

“글쎄…?”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이 어리둥절했다.

나무꾼 그리드가 갑자기 주작궁의 도안을 요구하더니, 이를 한참 동안 살펴본 후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무언가 열심히 그리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대장장이 중 한 명이 흠칫 놀랐다.

“설마! 우리가 지난 3년 동안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완성시킨 주작궁의 도안을 베껴서 빼돌릴 생각은 아닐까요?”

“하하, 그 무슨 바보 같은 소리.”

“말도 안 돼.”

백 번 양보해서 그리드가 도안 도둑이 맞다고 해보자.

설마 당사자들 앞에서 대놓고 도안을 베끼고 앉았겠는가?

“고의적으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노리는 게 아닌 이상… 헉?”

설마, 정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점을 노리는 도둑놈인가?

일제히 경계태세를 갖춘 대장장이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리드를 대놓고 적대하기 시작하는 그들을 화이트가 제지했다.

“사람을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래, 며칠 전의 나처럼 말이다.

며칠 전의 나는 그리드를 단편적으로만 보고서 제멋대로 오해하고 판단하지 않았던가?

대장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주제에 대장장이를 지망하는 파렴치한으로 말이다.

‘귀한 분인지도 모르고. 흐음…’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거슬리긴 한다.

뒤돌아 쭈그려 앉은 채 무엇을 저리도 열심히 그리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로 동료들의 말대로 그리드는 우리 도안을 빼돌리기 위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 바보도 아니고 눈앞에서 당당히 도적질을 할 리는 없… 흐으으음.’

불안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점을 재차 상기한 화이트가 슬그머니 그리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리드가 허공에다가 그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곁눈질로 훔쳐보더니 기겁했다.

마치 토끼처럼 껑충 뛸 정도로 그는 크게 놀랐다.

그리드가 그리고 있는 그림.

그건 주작궁의 도안이 맞았다.

하얀 망치가 지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주작궁의 도안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높은 도안 말이다.

“아,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나무꾼인 당신께서 어찌 도안 제작에 이만한 소질을…?”

끝끝내 그리드를 나무꾼이라고 오해하는 화이트.

그에게 피식 웃어준 그리드가 완성 된 도안의 정보를 확인했다.

<주작궁(모작)>

등급:에픽~레전드리

에픽 등급 정보

..

유니크 등급 정보

..

레전드리 등급 정보

..

전설의 대장장이가 구현한 판게아의 보물입니다.

그 가치, 원본과 겨루어도 크게 손색이 없습니다.

‘좋아.’

이제 관건은 대회 도중 제작할 주작궁의 완성 등급에 달려있다.

그리드가 넋을 잃고 있는 화이트에게 질문했다.

“대회 진행 시간이 8시간이라고 했던 가요?”

화이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예, 맞습니다. 활 한 자루 만드는데 주어지는 시간이라고 보기엔 너무 길지만, 명색이 판게아의 보물을 재현하는 대회이다보니…”

‘길기는 개뿔.’

시간이 너무 짧다.

하나의 활을 만들어도 심혈을 기울여서 하루 이틀을 소비하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8시간은 턱도 없었다.

‘그걸 사용할 땐가.’

20번째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한 대가로 얻은 새로운 힘.

‘아이템 승급!’

그리드는 완벽한 주작궁을 재현하지는 못할지언정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그럼 출발합시다.”

***

“하얀 망치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우우! 우우우우우!!”

화이트가 아닌 그리드를 필두로 대회장에 입장하는 하얀 망치의 대장장이들.

3회 연속 대회 꼴찌에 빛나는 그들에게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화이트와 대장장이들은 위축되는 반면 그리드는 기쁨을 만끽했다.

‘더.’

더 욕하고 무시해라.

‘너희들이 우리를 무시하면 무시할수록 더 극적인 결과가 연출될 테니까.’

씨익!

건강한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짓는 그리드.

미리 무대 위에 오른 채 그를 지켜보는 다른 대장간의 대장장이들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저놈은 뭐야?”

“처음 보는데… 신입 아니야?”

“어째서 화이트가 아니라 신입이 선두에 선 거지?”

“화이트 녀석이 사람들 보기가 창피하니까 신입을 방패로 세우고 입장하는 걸 테지.”

“거참 끝까지 한심한 놈이로구만.”

수십만 관중들과 수백 명의 대장장이들.

이들은 저 듣도 보도 못한 신입이 잠시 후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킬 거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드의 전설적인 행보가 동대륙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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