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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55화 (350/1,794)

템빨 25권 - 18화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이동하는 수단은 무척 다양할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수단은 번헨 열도를 이용하는 방법뿐이다.

그리고 이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번헨 열도를 경유해서 동대륙까지 건너온 사람?

지난 3년 동안 채 서른 명밖에 되질 않는다. 무려 20억 명의 유저 중에서 말이다.

1인 인스턴트 던전, 번헨 열도.

10번대 섬까지만 진입해도 자긍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그곳을 돌파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던 것이다.

즉, 동대륙에 진출한 플레이어들은 기본적으로 엄청난 실력자라는 뜻이 됐다.

하지만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운 좋게 일찍 안개 섬을 만나 동대륙으로 건너올 수 있었던 지극히 소수의 ‘운빨러’들도 있었다.

***

‘그래도 내가 서대륙에서는 나름 최상위권 강자였는데 말이야.’

‘이곳에서는 시작의 마을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피라미가 되리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

‘제기랄, 내 팔자야. 동대륙이 이런 곳인 줄 알았더라면 영영 안 왔을 텐데.’

‘남들보다 일찍 안개 섬을 만나서 좋아했더니만… 쩝.’

판게아 북쪽거리의 허름한 술집.

신세를 한탄하는 사내들이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 4명은 전원 플레이어였다.

벌써 한 달도 더 전에 동대륙에 도착하였으나 아직까지도 판게아를 벗어나지 못한, 평균 310레벨의 ‘초보자’들이다.

“빌어먹을 크라우젤 같으니라고.”

이들이 남들보다 빠르게 동대륙으로 건너오면서 품었던 가장 궁극적인 목표.

그건 단순한 레벨링 따위가 아니다.

새로운 콘텐츠를 선점함으로서 온갖 칭호와 스킬, 그리고 히든 아이템 등을 독점하는 일이야말로 이들이 동대륙에서 추구하는 목표였다.

하지만 동대륙에 도착해서 보니 시기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

동대륙 시작의 마을 판게아는 이미 앞서 크라우젤이 휩쓸고 지나간 상황이었고, 그 여파로 인해서 새로운 에피소드에 진입한 판게아의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서대륙으로부터 플레이어가 넘어온 순간 판게아는 위기에 처했고, 그 플레이어는 판게아를 침공한 몬스터들을 격퇴함으로서 영웅이 되었다라…”

역시 선두주자는 유리한 법이다.

판게아 최초의 방문자로 추측되는 크라우젤은 가늠하기 어려울정도로 큰 이득을 취했을 게 분명했다.

그 탓에 우리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돼버렸고 말이다.

‘썩을… 한 달 내내 판게아 곳곳을 누벼봤지만 특별한 퀘스트를 받은 적이 없어. 중요한 퀘스트는 죄다 크라우젤이 혼자 해치워먹은 거야.’

‘다른 ‘진짜 강자’들처럼 판게아를 떠나서 새로운 영지로 진출하는 것이 최선인 것 같지만…‘

크라우젤에게 패퇴해서 북쪽에 터를 잡은 몬스터들이 꾸준히 성장한 상태다. 지금의 놈들은 괴물이다.

‘우리의 실력으로는 북쪽으로 이동하기 어렵지…’

‘에이, 재수 없는 크라우젤 놈.’

지금의 판게아에서는 당초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앞서 온 크라우젤이 히든 퀘스트 대부분을 클리어하였으며 환경적으로 난이도가 너무 높아져버렸다.

뭐로 보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판게아를 벗어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북쪽으로 이동해야하건만, 북쪽에는 크고 강력한 햄스터들이 군락을 펼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잔심부름 퀘스트라도 수행하면서 마을 인근 잡몹들을 잡다보니까 레벨이 꽤 오른 건 좋아.”

“그래, 우리는 확실히 성장하고 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지금의 우리는 뛰어나. 그 유명한 7대 길드나 템빨단의 랭커들도 우리보단 약할걸?”

“동대륙이 좋긴 좋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우리로서도 결국 여왕 쥐 앞에서는 한낱 파리 목숨에 불과해. 우리만으로는 결코 여왕 쥐를 잡을 수 없어.”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동대륙에 도착한 신입을 잘만 이용하면 여왕 쥐의 시선을 끌고 그 틈에 우리는 군락을 빠져나갈 수 있게 된다.”

이들이라고 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놀고만 있던 게 아니다.

잡다한 온갖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여왕 쥐의 약점을 알아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성과를 거뒀다.

여왕 쥐가 ‘황금 호두’에 사족을 못 쓴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황금 호두는 각자 약속한 수량만큼 챙겨왔겠지?”

“응, 10개.”

“넷이 합하면 40개… 이거면 충분하고도 남을 게다.”

“썩을, 뭔 호두가 이렇게 비싸냐고. 나 이거 사느라고 파산해버렸다.”

“나도 여태까지 게임하면서 번 돈 다 썼어.”

황금 호두는 이름 그대로 황금처럼 빛나는 호두였다.

맛과 영양가가 일반 호두와는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영약으로서 그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복용 시, 무려 1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10퍼센트 상승하고 보통의 확률로 능력치 5개를 영구히 상승시켜준다.

최강의 버프 물약임과 동시에 열화판 엘릭서의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어 할만큼 환상적인 영약이었다.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게 문제였다.

애초에 구하기가 어렵고 동대륙 모든 국가의 귀족과 왕족들이 즐겨먹는 간식이었던 까닭에 물량이 너무 한정적이었다.

가격?

무려 16만 골드다. 그것도 개당 16만 골드!

한화로 환산할 경우, 이 작은 호두가 한 알당 무려 2억 원을 호가한다는 뜻이 됐다.

아무리 효능이 뛰어나다고 해봤자 엘릭서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는 ‘확률’에 기대야하는 영약.

재벌이거나 도박중독자라면 또 모를까, 도박성 짙은 이 호두를 자기가 먹겠답시고 제값 주고 구매하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 것이었다.

“하… 이런 비싼 아이템을 고작 몬스터 유인용으로 구매하다니.”

“그만들 한탄해. 우리는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에 투자하는 거니까 아까워할 필요 없어.”

“앞서 판게아를 떠났던 놈들도 이 호두를 이용해서 군락을 벗어난 게 분명하다고.”

쥐뿔도 없는 판게아를 벗어나서 황금의 땅을 개척할 수만 있다면 원하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되리라.

괜찮은 히든 아이템, 칭호, 스킬 중 하나만 얻어도 투자한 돈이 아깝지 않은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강해져서 동대륙으로 돌아가 갑질하다보면 금세 부자가 될 것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기대감에 사로잡히는 플레이어들.

그들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엥? 여기서 같은 유저를 다 보네요?”

건장한 체구의 흑발 사내였다.

키는 대략 181센티미터 안팍.

넓은 어깨와 쫙 펴진 가슴, 전신에 딱 알맞게 붙은 근육이 이상적이다.

당연히 사내 또한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아이디가 보이질 않았다.

사내가 검은 안대와 가면을 써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는 까닭이었다.

‘이 녀석이 바로 이번에 새로 동대륙을 방문한 신참이군.’

‘목표물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이게 웬 떡이야?’

플레이어들은 들떴으나 내색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정중한 태도로 사내를 맞이했다.

“저희도 놀랐습니다. 동대륙에서 우리 같은 플레이어를 또 만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거든요.”

“동대륙까지 오신 걸 보면 님도 우리처럼 상당한 고렙인가 봐요? 이렇게 만나서 반갑네요.”

“그런데 그 가면은 뭡니까?”

“치장용 아이템인가요? 다소 위협적으로 보이는 게 멋지네요. 하지만 안대는 시야를 가려서 불편하지 않을지…”

쏟아지는 환영인사와 질문.

가면의 사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성추행범으로 몰려서 경비병한테 쫓기게 된 바람에 잠시 가면을 쓰게 됐습니다. 미안하지만 잠깐만 저랑 일행인 척 좀 해주세요.”

“????”

다짜고짜 초면부터 스스로를 성추행범이라고 소개하다니?

정확하게는 성추행범이 아니라 성추햄범으로 ‘몰렸다’고 소개하였지만, 그건 신빙성이 없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도둑놈이라고 인정하는 도둑놈이 있던가?

없다.

이 가면 사내가 경비병에게 성추행범으로 찍혔다는 것은 즉 진짜로 성추행범이라는 뜻이 된다.

플레이어들이 짐짓 당황했다.

‘게임상에서 NPC를 성추행하는 변태들이 종종 있다고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이런 쓰레기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군.’

쓰레기 성추행범으로 낙인찍힌 사내.웃는 듯, 우는 듯 보이는 기괴한 가면으로 얼굴의 반쪽을 가린 이 사내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그는 지금 상황이 무척 황당했다.

이단의 식당 현관 앞에서 얀페이에게 안마를 해준 후.

대장간으로 향하려는데 경비병들이 쫓아오는 게 아닌가?

공공장소에서 여성을 희롱한 지독한 성추행범이라는 누명을 씌우면서 말이다.

‘제기랄… 뭐 이딴 엿 같은 경우가.’

전설의 손재주.

사용하기에 따라서 엄청나게 유용하긴 했으나 역시 위험부담이 크다.

새삼 깨닫게 된 그리드가 앞으로 공공장소에서만큼은 손의 사용을 봉인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경비병을 피해서 들어온 술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4명의 플레이어를 차례대로 살폈다.

‘레인, 뮤크, 에반, 오시호츠.’

4명의 플레이어 모두 낯설었다.

동대륙에 넘어온 이상 최소 3차 전직자일 것으로 추정됐으나, 아이디와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아 비공식 랭커들 같았다.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정보나 좀 캐볼까.’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어디서, 누굴 만나든지 간에 그들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겠단 생각을 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사람관계를 이용할 줄 알았다.

“어디 좋은 사냥터에서 득템이라도 하고 오셨나 봐요? 술집에 모여앉아 회포를 푸시는 것을 보면.”

‘오.’

4명의 플레이어들이 일제히 눈을 반짝였다.

먹잇감이 스스로 접근해오고 있었으니 무척 반가운 상황이었다.

‘정체를 모르겠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하다만.’

초면부터 아이디 까라고 말했다가는 경계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가면 사내를 낚기 위해서 궁금증을 억누른 플레이어들이 넌지시 던졌다.

“네, 오늘도 엄청난 득템을 해서 기분이 좋아 한 잔 하고 있었지요.”

“동대륙에 온 후로는 매일매일 천국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돈과 경험치를 쓸어 담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엄청나게 좋은 사냥터를 알고 있거든요. 뭐, 님도 동대륙까지 넘어온 실력자이니만큼 사냥터를 발견하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탁월하시겠지만.”

귀를 쫑긋 세운 가면 너머 그리드의 눈이 반짝였다.

‘엄청나게 좋은 사냥터라니!’

그리드가 동대륙에 넘어온 궁극적인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레벨 업이다. 그리드는 이들의 말에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동대륙에 넘어온 지 채 3일이 안 돼서 아는 게 거의 없지만…’

이걸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이들이 날 끼워주지 않을 수도 있다.

판단한 그리드가 허풍을 떨었다.

지금은 어차피 정체가 노출되지 않은 상황.

템빨단 수장 그리드로서의 체면 따위 버리고 본성대로 행동한다.

“당연히 저도 어마어마하게 좋은 사냥터를 몇 개 알고 있습니다. 이참에 서로 정보를 공유할까요?”

‘어디서 잔머리를.’

플레이어들은 가면 사내의 동대륙 도착 시기를 알고 있었다.

하여 가면 사내가 자신들에게 이빨을 털고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줬다.

“아, 그러십니까? 그것 참 서로 잘 됐군요. 좋아요. 낯선 땅에서 플레이어끼리 서로 도와야지요.”

“맞아, 맞아. 우리가 이용하는 사냥터는 워낙 넓고 몹도 많아서 사람 하나 더 낀다고 해서 피해볼 것도 없고.”

씨익.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 플레이어들이 가면 사내, 그리드에게 권유했다.

“마침 술도 다 먹어가던 차인데, 말 나온 김에 일어나시죠. 우리가 환상의 사냥터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리드가 흔쾌히 수락했다.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요. 그럼 저도 나중에 제가 갖고 있는 사냥터 정보를 공유해드리도록 하죠.”

씨익!

플레이어들보다 더욱 더 사악한 미소를 피어 올리는 그리드였다.

각자, 서로를 이용해먹고자 똘똘 뭉친 그들이 북문을 나가서 향한 곳은 큰 독 쥐 군락이었다.

이를 본 그리드가 실망을 금치 못했다.

‘아, 뭐야? 좋은 사냥터라는 게 여기였어?’

확실히, 큰 독 쥐 군락은 좋은 사냥터‘였다’.

하지만 여왕 쥐가 퇴치당한 지금은 아니다.

여왕 쥐 사망 이후 리스폰되는 큰 독 쥐들은 구심점을 잃어 약화 된 상태.

평균 레벨이 30가량 떨어졌고 주는 경험치는 대폭 줄었다.

‘여기 말고 다른 곳 없나.’

그리드가 쯧, 혀를 차는 그때였다.

‘헉. 뭐지?’

‘그 괴물 같던 햄스터들이 어째서 하루아침에 약해진 거야?’

‘너무 들뜨지들 마. 햄스터들에게 무슨 변고가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왕 쥐는 여전히 건재할 가능성이 높아. 호두에 환영 마법은 잘 걸어놨겠지?’

‘응, 저 가면 쓴 놈은 이 호두가 사실은 황금 호두라는 사실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최상급 감정 아이템을 쓰더라도 단순한 호두로만 보일 테니까.’

미끼가 되어줄 신참이 제 발로 우리 앞에 나타나줬을 때부터 쭉 예감이 좋다.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제대로 성사될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그건 오해였다. 그리드에게는 오예가 될 가능성이 높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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