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5권 - 5화
“은근히 힘드네.”
동대륙의 중력은 서대륙의 중력보다 훨씬 더 강하다.
이로 인해서 그리드는 빠른 스태미나 소모, 근력과 민첩성 저하 등의 페널티를 받았고 그 여파는 상당히 컸다.
판게아 중심부부터 백린목 숲까지.
고작 1시간 전력으로 달렸답시고 벌써 지쳐버렸다. 만약 서대륙이었다면 20분쯤 더 달려도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도중에 플라이를 썼다면 비교적 편했겠지만.’
하지만 쓰지 않았다. 하늘을 날았다가는 혹시라도 눈에 띄어 귀찮은 일이 발생할 우려가 있었으니까.
‘후후훗! 이제 나도 제법 현명해졌단 말이야!’
본인의 발전에 흡족한 그리드가 언덕 아래 백린목 숲의 전경을 시야에 담았다.
도심 속에 존재하는 순백의 숲.
규모가 썩 크진 않다.
흰 나무가 약 1천 그루가량 밀집해있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아름다웠다.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새하얀 백린목의 풍성한 잎사귀, 멀리서 보면 보송보송한 것이 마치 거대한 목화솜 같다.
‘숲 외곽의 한옥들과 잘 어울리는군.’
사극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눈 쌓인 겨울의 고즈넉한 고려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적어도 이곳만큼은 기대했던 동양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고나 할까.
‘여기에 돗자리 펴고 앉아서 김장김치 찢어 먹으면 리얼 밥도둑…’
소주도 땡긴다. 잠시 쉴 겸, 당장 로그아웃해서 김치에다가 소주 한 잔 곁들이고 싶다.
하지만 음주 Satisfy는 패망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술기운에 장비를 강화했다가 홀딱 말아먹는 이가 비일비재한 실정이었다.
그리드는 지존을 목표로 하는 이상 음주도 자제해야했다.
“술 먹을 시간에 운동을 하고 체력을 키워서 열심히 게임 해야지…”
마음을 다스린 그리드가 언덕을 내려가 숲에 진입했다.
‘100년 묵은 녀석을 베어오라 이거지?’
현대사회에서 나무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많다. 굳이 줄기를 잘라서 나이테를 확인하지 않아도 나무의 나이를 아는 일쯤이야 우습다.
그건 Satisfy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시스템을 이용하면 간단하다.
특히 그리드에게는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이 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은 Satisfy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감정 아이템과 스킬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최상급 감정 아이템이 6~10의 정보를 밝혀낸다 치면,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은 10~12의 정보까지 밝혀내는 수준이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백린목.
키가 족히 5미터나 되는 녀석에게 손을 얹은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하자 정보가 나열됐다.
띠링~
<백린목(白燐木)>
상태:매우 건강
나이:607살
원산지는 무릉도원으로 추정됩니다.
흔히 <신선의 나무>라고 불리며, 환국의 국목(國木)입니다.
줄기와 가지가 오로지 하늘을 향해서 곧게 뻗습니다.
결코 휘지 않아 높은 기개와 품격을 상징하는 이 나무의 단단함은 용철(龍鐵)과도 비견됩니다.
“환국은 동대륙에 있는 나라 중 하나의 이름일 테고… 용철은 뭐지?”
무릉도원과 신선의 존재는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과거, 크라우젤의 아이템을 수리해주는 과정에서 신선이라는 클래스가 존재한단 사실을 숙지했으니까.
하지만 용철만큼은 생소했다.
“이거 광물 이름 같은데.”
서대륙에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이에 그리드는 들떴다.
‘역시, 동대륙에만 존재하는 광물이 따로 있었던 거야.’
동대륙은 서대륙과 자연환경부터가 틀리다.
서대륙에 없는 것이 동대륙에는 있을 수 있고, 동대륙에 없는 것이 서대륙에는 있을 수 있음을 예상했었고 예상은 들어맞았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겠어.’
앞으로 대장장이로서의 저변이 확대될 것을 상상해보자 너무 큰 기대가 되는 그리드였다.
룰루랄라.
급기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기 시작한 그가 주변의 다른 백린목들을 감정해나갔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나무들이 죄다 나이가 많다?”
백 살?
우습다.
숲의 백린목들은 나이가 대부분 500살 이상이었다. 1,000살이 넘은 녀석들도 있었다.
‘백 년 묵은 나무를 베어오라기에…’
백 년 묵은 나무를 구하는 것이 꽤나 골치 아픈 일인가 보구나, 생각했었건만 전혀 아니다.
참 쉬운 퀘스트다. 경험치 12퍼센트를 공으로 먹게 생겼다.
“이놈들로 정했다.”
각각 103살, 106살 나이의 백린목 앞에 선 그리드.
히죽 웃은 그가 퀘스트용으로 받은 도끼를 꺼내들었다.
<화이트의 도끼>
등급:노말
내구력:150/150 공격력:53
하얀 망치 대장간의 주인 화이트가 제작한 도끼입니다. 엄청난 내구도를 자랑하여 더 많은 나무를 벨 수 있습니다.
인근 나무꾼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스테디셀러입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109
옵션이 전무하다는 점이 아쉽지만, 내구도만큼은 인정할만한 도끼다.
사용 조건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공격력도 상당하다.
만약, 화이트가 서대륙에서 활동했다면 그가 만든 도끼는 서대륙의 초보자 플레이어들에게 ‘무기’로서 불티나게 팔려나갔을 것이다.
“칸과 비슷한 실력자…”
화이트의 나이는 아직 30대 중반으로밖에 안 보였다. 한데 장인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칸과 벌써부터 비견된다는 것은 그가 NPC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굉장한 일이다.
‘네임드 NPC도 아닌데 말이야.’
동대륙의 대장장이들이 서대륙의 대장장이들보다 전반적으로 앞서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특별한 노하우가 굉장히 많은 것 같다.
‘환경의 차이 때문일 거다.’
서대륙 국가들은 각 영토마다 대장간의 숫자를 제한하는 반면, 동대륙에는 그런 제약이 없다.
대장장이 숫자부터가 동대륙이 서대륙보다 월등히 많았고, 숫자가 많다는 것은 더 큰 경쟁구도를 의미했다.
동대륙 대장장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 꾸준히 발전을 거듭해왔을 것이다.
서대륙 대장장이들보다 더 치열하게 기술을 연마해왔을 테니 상대적으로 뛰어난 것도 납득이 간다.
“결과적으로 동대륙 국가들의 병사들이 서대륙 국가들의 병사들보다 강하겠군.”
서대륙 병사들보다 동대륙 병사들이 더 나은 장비를 무장하고 있을 테고 이는 전투력의 차이로 직결되리라.
“뭐, 그래 봤자 내 병사들보다는 못하겠지만.”
<전설의 대장장이>의 비호를 받는 레이단의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템빨러 아니겠는가!
자부심에 도취 된 그리드가 <암흑의 룬>에 귀속되어 있는 <라티나의 힘>을 개방했다.
“죽은 자의 왕이 될 수도?”
…스킬명을 의문형으로 외쳐야하다니.
괜히 민망해지는 그리드의 좌우 지면이 들썩거리더니 누리끼리한 해골 2마리가 튀어나왔다.
반달을 거꾸로 눕혀놓은 것 같은 도끼눈의 해골들.
템빨골 1과 2였다.
그리드가 템빨골 1에게 화이트의 도끼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한쪽에 자리를 깔고 앉으면서 말했다.
“쉬면서 스태미나 회복하는 동안 나무 해놔. 아무리 골1이 너라도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딱딱! 딱!
마치 대답하듯이 이를 맞부딪친 템빨골 1이 눈앞의 백린목을 도끼로 힘껏 내리쳤다.
퍽!
기세 좋게 날아간 템빨골의 도끼가 백린목을 때리는 순간!
“……!”
두 눈을 휘둥그레 뜬 템빨골이 부르르, 경기를 일으켰다. 온 몸의 관절을 비틀어대면서 난리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다.
‘쟤 왜 저래?’
영문 모를 행동에 그리드가 두 눈을 껌뻑이는 그때.
[템빨골 1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템빨골 1이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템빨골 1이 와르르, 산산조각 나면서 무너져 내렸다.
반면 백린목은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멀쩡한 상태다.
그리드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너란 녀석 진짜…”
너무할 정도로 쓸모가 없구나.
나무를 때리면서 발생한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산산조각나는 해골이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쯧, 혀를 찬 그리드가 멀뚱멀뚱 서있는 템빨골 2에게 말했다.
“골2야, 너는 골1이랑 다르길 바란다.”
이 순간 그리드는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허약한 템빨골 1은 스탯을 지력에만 투자시켜서 스켈레톤 메이지로 키우고, 그나마 나아보이는 템빨골 2를 스켈레톤 워리어로 키우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템빨골 2는 템빨골 1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레벨과 스탯 전부 똑같다.
까앙!
딱! 따닥! 딱딱!!
도끼로 백린목을 후려친 템빨골 2 또한 템빨골 1과 마찬가지로 경기를 일으키더니 난리 블루스를 추었다.
그리고 곧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런 미친.”
흙으로 되돌아가는 템빨골 2를 보고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그리드.
이내 욕설을 지껄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진 화이트의 도끼를 주워들었다.
“하여튼 쓸모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들!”
고작 나무 하는 일조차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다니!
차마 노에나 랜디를 써먹기에는 양심에 찔렸던 그리드가 몸을 대충 푼 후 백린목을 도끼로 때렸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쩌엉!
[<화이트의 도끼>의 내구도가 37 하락합니다.]
[손목에 강한 통증을 느낍니다. 일시적으로 마비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생명력이 1,700 하락합니다.]
[백린목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윽?”
단단하다.
최소 강철급이다.
깜짝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그리드가 깨달았다.
‘용철이라는 거, 나무와 비교되기에 단단하지 못한 광물로 예상했었는데 사실은 엄청나게 단단한 광물이었구나?’
이제야 납득이 간다.
고작 장작이나 해가면 되는 퀘스트의 보상이 무려 경험치를 12퍼센트나 올려주는 이유.
‘이 퀘스트, 쉬운 게 아니었어.’
그리드가 추측하건데, 일반적인 대장장이는 100퍼센트의 확률로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전설의 대장장이이므로 경우가 달랐다.
화이트의 도끼를 버리고 <+9실패작>을 무장한 그가 자세를 잡았다.
“고작 나무 베기를 검까지 뽑아야할 줄은 몰랐다.”
꾸욱.
실패작을 두 손으로 거머쥐는 그리드.
저벅.
눈꽃처럼 떨어지는 백린목의 새하얀 잎사귀들 사이에서, 그가 현란하면서도 기품이 흐르는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한다.
파그마의 검무, 연(聯)의 전조였다.
무려 레전드리 등급의 스킬이 노리는 대상은, 그리드 앞에 잠자코 서있는 백린목이다.
“연(聯)!”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피핏!!
수십 회 그려진 청백색의 검광이 백린목을 덮쳤고,
[<+9실패작>의 내구력이 4 하락합니다.]
[<+9실패작>의 내구력이 5 하락합니다.]
[<+9실패작>의 내구력이…]
[손목에 강한 통증을 느낍니다. 일시적으로 마비됩니다.]
[속목에 강한 통증…]
[저항하였습니다.]
[저항…]
[생명력이 1,801 하락합니다.]
[생명력이 1,730…]
[백린목에게 피해를 주지 못했습니다.]
“헉?”
+9실패작으로 사용한 연(聯)으로도 데미지를 못 준다고?
‘제길, 도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야?’
“그래! 누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무능하다고 욕해서 미안하다. 애초에 너희들이 감당할 상대가 아니었구나.
템빨골들에게 뒤늦게나마 속으로 사죄한 그리드가 새로운 검무를 펼쳤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현존 최강의 스킬 중 하나>라고 추앙받는 극살(極殺)의 전개였다.
서걱!
백린목이 갈라졌고,
“…뭣!”
그리드는 경악했다.
퍼어어어어어어어어엉-!!
갈라진 백린목으로부터 폭발한 광염이 그리드를 덮쳤다.
[백린목에게 강력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충격을 받은 백린목이 폭발합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고정되며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릉…….
한없이 고요하던 백색의 숲이 격동한다.
넝마가 된 몸을 간신히 가누는 그리드의 머리는 혼란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세상에.”
고작 장작 패러 왔다가 불사 패시브가 발동하다니?
이건 개 같은 경우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 정말이지 색다른 체험이다.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넋을 잃고 있던 그리드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웃음밖에 안 나오는 것이다.
그의 발치에는 비교적 멀쩡한 백린목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폭발을 일으키기 직전, 극살(極聯)에 베여 떨어져나간 파편의 일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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