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5권 - 4화
‘뭐가 이렇게 커?’
그리드가 놀란 이유는 판게아의 규모에 있었다.
‘시작의 마을이라기에 그냥 작은 촌 동네일 줄 알았더니.’
반전이다.
판게아는 마을이라고 지칭하기엔 어폐가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아무리 시선을 돌려봐도 성벽의 끝을 볼 수 없었다.
에트날에서 2번째로 크다는 레이단보다 훨씬 더 큰 것 같았고, 심지어 인구수도 많았다.
레이단은 규모에 비해서 사람이 턱없이 부족한 반면, 이곳 판게아는 어디로 시선을 돌려 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 영주는 좋겠군…’
영지민들이 바치는 세금만으로 떼돈을 벌어들이고 있을 터.
사막 도시와 요새 도시 등.
돈 안 되는 영토만 보유하고 있는 그리드의 입장에선 마냥 부럽기만 하다.
“어라?”
끊임없이 눈동자를 굴리면서 주위를 관찰하던 그리드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인종이 다양하네?’
그리드는 동대륙을 동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지닌 동양인들이 살아가는 고풍스러운 정취의 대륙일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판게아의 주민들은 동양인 같이 생긴 사람도 있는 반면 서양인이나 중동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생김새의 사람도 많았다.
거리에 즐비한 건축물들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건물은 조선시대 한옥처럼 생겼고, 또 어떤 건물은 중세유럽의 성당처럼 생겼으며, 중동의 대저택 같은 건물도 있었다.
“헐. 이거 완전 짬뽕…”
오늘 점심으로 짬뽕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일단 뒤로하고.
신비로운 정취를 뽐내는 옛 동양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했건만, 다소 실망스럽다.
‘하지만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어. 어떤 국적의 플레이어가 오더라도 딱히 눈에 띄거나 적응 못할 일은 없을 테니까.’
판게아는 결국 시작의 마을(?)에 불과하다.
지금의 형태에는 동대륙을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플레이어들을 위한 안배가 담겨있을 것이다.
‘내가 상상했던 동양 배경의 나라나 도시는 또 다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겠지.’
그리드의 추론은 합당했다.
동대륙은 서대륙 이상으로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두리번두리번.
그리드는 몇 시간이고 판게아를 서성거렸다.
거리 가득한 상점들과 사람들을 관찰하고 규칙과 정서, 문화를 파악해나갔다.
적응을 위한 노력이었다.
옛날처럼 생각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초조하지도 않다.
‘별거 없네. 역시 사람 사는 동네는 다 거기서 거기군. 이제 슬슬 대장간으로 가볼까.’
판게아를 충분히 탐색했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새로운 호기심에 휩싸였다.
동대륙의 대장장이들은 어떤 식으로 작업하며, 또한 어떤 무구를 제작하는지 그는 궁금해졌다. 공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전설의 대장장이답게 대장장이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어르신, 실례지만 잠시 길 좀 묻겠습니다.”
그리드가 지나가는 뚱뚱한 노인 한 명을 불러 세우고 물었다.
“대장간은 어디에 있죠?”
파오우라는 이름의 노인 NPC가 그리드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반문했다.
“판게아가 처음인가?”
“네, 먼 곳에서 왔거든요.”
서대륙 출신이라는 말은 피했다. 서대륙에 대한 동대륙인들의 인식을 아직 알 수 없었으니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다.
무척 현명해진 그리드였다.
“아아, 그랬구만. 하지만 어디 대장간이 한두 개여야지…”
생각해보던 파오우가 중앙광장을 기준으로 설명해줬다.
“동쪽 길목 어귀에는 하얀 망치 대장간, 서쪽 길목 어귀에는 검은 모루 대장간, 남쪽 길 세 번째 블록에는 붉은 집게 대장간, 북쪽 길 마지막 블록에는 푸른 불꽃 대장간이 있네. 이 네 개의 대장간이 판게아에서는 가장 유명하니까 이중 하나를 찾아가면 흡족한 물건을 구매할 수 있을 게야.”
“이곳에는 대장간이 굉장히 많나 보군요?”
“적당히 있지. 100곳은 안 될 게야.”
대장간에서 생산되는 물품은 무구뿐만이 아니다.
식칼, 과도, 망치, 농기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물품 또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도시일수록 대장간은 수요가 높았다.
서대륙 국가들은 지방 영주를 견제하기 위해서 각 영토마다 대장간 숫자를 제한해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노인 파오우에게 꾸벅, 예의바르게 인사한 그리드가 하얀 망치 대장간으로 이동했다.
소개받은 4개의 대장간 중에서 굳이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단지 가까웠기 때문이다.
***
[하얀 망치 대장간에 입장하였습니다.]
[서대륙의 대장장이는 동대륙의 대장장이와 다른 안목을 지녔습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직업 효과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쩝.”
본래, 그리드는 대장간에 방문할 때마다 중급 이상의 대장장이들에게는 호의를, 고급 이상의 대장장이들에게는 경배를 받았다.
뛰어난 대장장이들은 그리드의 골격과 손만 보고도 그리드가 자신들보다 훌륭한 대장장이임을 알아보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동대륙 대장장이들은 아니란다.
이에 그리드가 실망했다.
대접 받지 못하게 생겨서?
아니, 그딴 저급한 이유가 아니다.
동대륙 대장장이들의 실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예상에서였다.
‘안목이 없다는 건 즉, 실력이 부족하다는 뜻.’
동대륙에서 배울 대장일은 없다.
‘당초의 계획대로 레벨 업과 새로운 칭호 획득에만 집중하자.’
움찔.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장간을 떠나려던 그리드가 문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따아아아아앙-!
망치가 철을 때리는 소리가 이토록 청아할 수도 있던가?
귀를 의심하면서 놀란 그리드가 발걸음을 되돌렸다.
그리고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표정을 지은 채 대장간 안쪽까지 들어갔다.
그곳에는…
따앙! 따앙! 따앙!!
화르륵!!
푸욱. 푸욱.
치이이이익!
커다란 용광로를 중앙에 둔 10명의 대장장이가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모루 앞에 앉아 망치질에 열중했고, 누군가는 뜨겁게 달아오른 철을 물에 식혔으며, 또 누군가는 쉬지 않고 풀무질을 하였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실력을 순식간에 파악한 그리드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원 고급 대장기술을 익히고 있는 대장장이다.’
동대륙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
무능해서가 아니라 ‘다르기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동대륙 대장장이들의 기술은 서대륙 대장장이들의 기술과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을 뿐, 격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앞선다.’
특히 단조 기술이 뛰어나다.
금속을 계속 겹겹이 쌓아서 하나로 만드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는 엄청난 체력과 인내심, 그리고 섬세함을 요하는 작업으로서 그리드도 애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서대륙의 일반적인 대장장이들은 이와 같은 작업을 기피했다. 대부분 쉽게 작업하는 쪽을 택하는 실정이었다.
‘이쪽이 직업의식부터가 월등해. 대장간이 많아서 경쟁률이 높다보니까 벌어진 현상인가?’
사용하는 기구들을 보면 탐구심도 강한 것 같다.
‘철을 단조할 때는 철로 만든 망치를 이용하고, 미스릴을 단조할 때는 미스릴 재질의 망치를 이용하는군…’
금속의 성질에 어긋나지 않게끔 주의하면서 단조의 효율을 높이다니.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도 떠올리지 못했던 발상이다.
‘담금질에 사용하는 물에 풀어 넣은 저 액체는 또 뭐지?’
이곳에서 배울 점이 제법 있을 것 같다.
기대이상의 수확에 들 뜬 그리드가 대장장이들의 작업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는 그때였다.
“너도 우리 대장간에서 대장일을 배우고 싶은 거냐?”
그리드에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아프리카인처럼 새카만 피부와 두꺼운 입술을 지닌 거구의 사내였다.
목 근육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목이 마치 그리드의 허벅지처럼 두껍다.
그의 이름은 화이트였다.
그리드를 대장장이 꿈나무쯤으로 오해한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대장일을 배우고 싶다는 마음가짐만큼은 훌륭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너 같은 사람이 하루에도 몇 명이나 찾아온다. 우리로서는 아무나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의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우선 네게 자격이 있는지부터 증명해봐.”
“아니, 난 그저 잠시 견학을…”
그리드가 뭐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이었다.
화이트가 다짜고짜 도끼 하나를 건네주었고, 그리드의 눈앞으로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띠링~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장작 패기!>
난이도:???
하얀 망치 대장간의 주인 화이트가 당신을 시험합니다.
판게아 북쪽 끝에 있는 백린목 숲에서 백 년 묵은 백린목 두 그루를 베어오세요.
퀘스트 클리어 조건:백 년 묵은 백린목 두 그루를 베어온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경험치 12퍼센트. 하얀 망치 대장간에 견습으로 취직 가능.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 없음.
‘아니, 장난 하냐? 얼탱이가 없네.’
그리드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무려 317레벨인 이 몸에게 고작 장작이나 패오라니?
심지어 퀘스트 보상이 견습 대장장이로 취직하는 것이다.
세상에나, 전설의 대장장이를 견습으로 들이려는 미친놈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필시 배울 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큰 시간을 투자할 정도는 아니야.’
본질적인 기술의 수준은 이들보다 내가 월등히 앞선다.
내가 이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발상일 뿐이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다.
퀘스트까지 수행해가면서 시간을 투자할 정도의 가치는 없다.
‘애초에, 뭔 동대륙씩이나 되는 곳에서 이딴 초보자용 퀘스트를 주는 거지?’
버근가 싶다.
발끈해서 거절하려던 그리드가 문득 깜짝 놀랐다.
냉정을 되찾고 보니, 퀘스트 클리어 보상으로 경험치를 12퍼센트나 준다고 하는 게 아닌가?
‘미친.’
317레벨 기준으로, 하급 뱀파이어 500마리를 해치워야 획득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경험치양이었다.
한데 고작 나무 두 그루만 베어오면 이 엄청난 경험치를 준단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지만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
마치 귀여운 로드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낸 그리드가 재차 확인했다.
“정말입니까? 나무 두 그루만 베어오면 되는 겁니까?”
“그래.”
화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그리드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당장 다녀오죠!”
이곳이 바로 천국인가!
‘동대륙 최고!’
초보자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드는 들 뜬 채 도끼를 짊어지고 숲으로 달려갔다.
퀘스트 정보에 떠오르는 지도를 재차 확인하며 멀어지는 그를 보면서 화이트가 흥, 콧방귀 뀌었다.
“본인이 백 년 묵은 백린목을 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백 년 묵은 백린목은 용철만큼이나 단단하고 활화산처럼 흉포하다.
명성 자자한 나무꾼이라도 벨 수 없었고, 어지간한 도사가 와도 그 불꽃을 억누를 순 없었다.
괜히 신선의 나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만약 그걸 장작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완벽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테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대장장이를 꿈꾸는 자라면 누구라도 아는 상식이다.
하지만 방금 흑발의 청년은 그 상식을 갖추지 못했다.
대장일에 대해서 조금도 공부하지 않은 주제에 대장장이를 꿈꾸는 파렴치한이란 뜻이었다.
“최근에는 어중이떠중이가 몰려 들어서 골치란 말이지.”
재수 없다는 듯이 탁탁! 손을 털어낸 화이트가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어이, 너희들! 조금 더 집중하라고! 올해 대회에선 우리가 꼭 이겨야 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