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5권 - 3화
소란이 일단락된 후.
반파 된 로드의 침실 복구공사를 지켜보던 그리드가 카심에게 무엇인가를 요청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카심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만족스러운 대답을 확인한 그리드가 라우엘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아니,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자신의 집무실에 발을 들였다.
“이 방, 차라리 네가 쓰지 그래? 네 집무실보다 배는 넓잖아.”
길드와 영지 운영에 관련한 모든 업무를 라빗과 단 둘이 처리하는 라우엘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업무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었던 그리드가 제안하자 라우엘이 정색했다.
“제가 당신의 대리로서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전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앉으셔야할 자리에 감히 제가 앉는 일은 영원토록 없을 겁니다.”
‘방 하나 갖고 유난 떨기는.’
최근에는 사극을 보고 영향 받은 것 같다.
충신의 역할에 몰입하는 라우엘에게 피식, 상냥하게 웃어준 그리드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라우엘에게 현재 템빨단의 상황을 상세히 보고 받았다.
그리드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극검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군.”
이번 전쟁의 결과로서 코크로 섬을 잃는 것은 필연과도 같았다.
거리적으로 워낙에 동떨어져 있는 까닭에 지킬 수 없음을 라우엘과 그리드는 사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득이 더 컸기에 전쟁을 강행했다.
실제로 2개의 영토와 아슈르 백작, 그리고 파트리안의 7천 군사를 흡수하는 등 템빨단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극검에게 있어서 코크로 섬은 특별한 영토였던 것이다.
결코 잃고 싶지 않은.
그 애틋한 마음을 뒤늦게 깨달은 그리드가 선언했다.
“나도 코크로 섬으로 간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으로서 영토 방위는 이미 익숙한 일이다.
그리드는 코크로 섬에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틀어박혀있을 자신이 있었다.
“내 땅이야. 내가 지켜 보이겠어.”
극검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다소 감정적으로 다짐하는 그리드였다.
라우엘이 방관할 리 없다.
“안 됩니다. 주군의 성장이 정체될 경우 템빨단은 결과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됩니다.”
“하지만 극검을 저대로 혼자 놔둘 순 없다.”
소중하지 않은 동료가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중에서도 극검은 각별한 존재였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 앞에서도 ‘두 유 노우 갓리드?’를 당당히 외치는 인물.
그리드를 늘 응원하고, 신뢰하며,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그는 심지어 길드와 영토조차도 그리드에게 통째로 넘긴 전력이 있다.
그 진실 된 마음에 보답해주지는 못할망정 가장 힘들어할 때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가서 극검을 돕겠다. 그리고 내 성장은 걱정 마. 코크로 섬에 머물면서 병사들의 아이템을 제작하다보면 스탯과 스킬 레벨이 계속 오를 테니까. 난 어디에 있든지 쉬지 않고 강해질 수 있어.”
물론, 사냥해서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는 성장의 속도가 훨씬 더 느릴 테지만.
그리드의 고집이 꺾이지 않는 그때였다.
-갓리드, 오지 마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코크로 섬은 템빨단의 일각에 불과하며 언제까지고 지킨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네가 여기에 오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한 거야.
극검으로부터 귓속말이 날아왔다.
라우엘의 짓이었다.
그리드가 계속해서 고집을 피우자, 라우엘은 극검에게 귓속말을 보내어 그리드를 말려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갓리드 너는 마스터다. 일개 길드원인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길드원들 일일이 챙기려다가 중심을 잃지 말고 너는 네가 해야 할 일을 가장 우선시해줘. 강해지고, 또 강해져서 코크로 섬 따위야 언제든지 다시금 빼앗아주면 좋겠다.
“…”
그리드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았다.
무엇이 우선인지,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었기에 극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그럼 난 동대륙으로 간다.”
그리드의 레벨도 어느덧 317이다. 뱀파이어의 도시는 이제 더 이상 그에게 극적인 경험치를 주지 못했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뱀파이어의 도시들은 직계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최소 백작위 이상의 직계들이었기 때문에 위험성도 터무니없이 높다.
그렇다고 번헨 열도를 공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파그마에 의해서 데스나이트가 된 역대 전설들을 꺾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드는 강하지 않았다.
정체 된 상황.
새로운 대륙으로 향하기에 이처럼 적절한 타이밍도 없다는 것이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잘 다녀오세요.”
빙그레 웃으며 배웅하는 라우엘에게 그리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로 나 없이 괜찮은 거지?”
“예, 그럼요. 원래는 좀 위험했지만 당신께서 카심님을 영입해주신 덕분에 사정이 또 달라졌습니다.”
사실, 안전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라우엘은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았다.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고 싶었기에 다소 과장을 보탰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좋아, 그럼 난 떠나기 전에 아이린과 작별의 인사를…”
대답을 듣고 안심한 그리드가 라우엘을 뒤로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후다닥.
곧장 아이린의 침실로 뛰어가는 그리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부인과 사랑을 나누려하는 듯하다.
그를 보면서, 라우엘은 무척 흥분했다.
‘주군, 당신께 어서 빨리 깜짝 선물을 드리고 싶군요.’
스테임 후작이 그리드를 지지하겠다는 용단을 내린다면, 템빨단은 세력의 규모가 일시에 확대되고 그리드를 왕으로 추대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리드는 동대륙에서 사냥하다 보니까 왕이 되어있는 아주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드가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기뻐하는 모습을, 라우엘은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
동대륙으로 보내줄 스틱세이를 찾아가기 전.
“부인, 선물이오.”
“어머… 낭군님도 참. 응큼하셔요.”
아이린과 만나 담소를 나눈 뒤 침실로 이동한 그리드가 아이린에게 한 장의 잠옷을 건네주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하얀색 원피스형 잠옷이었다.
무려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
<직계 뱀파이어의 잠옷>이다.
입으면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효과를 지녔다.
처음에는 별 쓸데없는 효과가 다 있다 싶었지만.
‘레전드리인 이유가 있었어!’
잠옷을 입은 아이린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고혹적이었다.
<직계 뱀파이어의 잠옷>은 과연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답게 더 없이 뛰어난 치장용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부인!”
“낭군니임.”
로드를 낳은 후로 더욱 더 성숙해진 아이린의 몸매를 만끽하며, 그리드가 전설의 손기술을 전개했다.
그리드의 크고 두꺼운 손가락이 살결을 훑을 때마다 아이린이 토해내는 신음소리가 격동적인 선율이 되어
***
“아직은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길드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광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스틱세이를 찾아온 그리드.
그가 부정적인 의견을 들었다.
“현재 서대륙에서 강력한 기술로 분류되는 상위 스킬 중 대다수가 동대륙으로부터 유입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것만 봐도 동대륙의 전반적인 수준이 서대륙을 상회함을 알 수 있죠.”
그리드도 알고 있다.
실제로, 피아로가 검호 시절 사용했던 <무상검법>의 스킬 설명에도 동대륙 기원이라는 설이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동대륙인들이 보다 강한 스킬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가혹한 환경 탓일 터.”
아마, 동대륙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은 서대륙에 서식 중인 몬스터들보다 훨씬 더 강할 것이라는 게 현자 스틱세이의 추론이었다.
이에 그리드는 긴장하지 않고 도리어 들떴다.
“강한 놈들과 싸우다보면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거 아니야. 스틱세이, 나는 더 빨리 강해지고 싶다.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빨리 동대륙으로 보내줘.”
보다 빨리 강해지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 그리고 동료들에게 의지가 되고 싶어서였고.
두 번째 이유는 크라우젤을 넘어서고 싶어서였다.
그리드는 랭킹 1위 시절의 크라우젤이 세웠던 모든 기록을 깨부수고 지존이 되는 게 꿈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라면 당연히 품게 되는 열망이다.
“아니요.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보다 더 성장하신 후에 출발하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뱀파이어의 도시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사냥터가 아닙니까?”
오염 된 번헨 열도를 정화하고 기능을 복구시켜줄 몇 안 되는 희망 중 한 명.
그게 바로 그리드다.
또한 내 생명의 은인이며, 내 소중한 제자인 로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스틱세이는 그리드가 보다 안정적으로 행동해주길 바랐다. 혹시라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겪어 좌절하는 일이 없길 소망했다.
“신의 축복, 혹은 저주를 받은 자… 그리드님 당신의 목숨이 하나가 아님을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맞다.
목숨이 단 하나 뿐인 NPC와 비할 수는 없지만, 플레이어 또한 죽으면 막대한 손실을 입는다.
우선 경험치가 하락했고, 아이템을 잃을 수도 있었으며, 특정 퀘스트를 실패함으로서 잠재력이 약화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야 어디 게임 해먹을 수 있을까?
‘실패하는 게 두려워서 머뭇거리느니 차라리 CD게임을 하고 말지. 세이브 팍팍 해대면서.’
냉소한 그리드가 스틱세이에게 질문했다.
“스틱세이, 당신은 곱셈 배우기 어렵다고 더하기로만 숫자 계산 할 거야?”
“…”
“아니잖아? 누구에게나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할 시기는 찾아오는 법이고, 지금의 내가 그래.”
“…납득했습니다.”
수준 낮은 예시라고는 하지만 그리드의 발언은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아집이 쌓인 탓일까.
자신의 생각이 너무 좁았단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스틱세이가 그리드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그것은 본래, 그리드가 번헨 열도에서 획득한 포인트를 사용해서 직접 구매해야했던 물품이다.
<동대륙 이동 포털 스크롤>
동대륙 시작의 마을 <판게아>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무게:0.1
“좋았어.”
공짜는 늘 옳은 법!
공짜로 얻은 스크롤을 보고 활짝 웃은 그리드가 작별을 고했다.
“다녀올게.”
번쩍!
스크롤을 즉각 사용한 그리드가 빛에 휩싸이더니 사라진다.
그를 보고 깜짝 놀란 스틱세이가 붕어처럼 입만 뻥긋 거리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아니… 서대륙으로 귀환할 수 있는 스크롤도 받아 가셨어야죠…”
***
[사해를 건너 동대륙에 도착하였습니다.]
[플레이어로서는 31번째입니다.]
[서대륙과의 거리가 너무 멉니다. 서대륙에 접속 중인 플레이어와 모든 형태의 연락이 차단됩니다.]
[자연에 흐르는 기운이 무척 짙습니다. 마나 회복 속도가 10퍼센트 상승합니다.]
[중력이 너무 강합니다. 근력과 민첩성이 10퍼센트 하락합니다. 생명력 회복 속도가 저하됩니다.]
[자연적 영향으로 강제적입니다. 저항할 수 없습니다.]
“마법사 계열 직업군한테만 너무 유리한 거 아닌가?”
투덜거려 보지만, 마나 소모율이 높은 스킬들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그리드였기 때문에 사실 큰 불만은 없다.
“그보다 31번째라니…”
그새 또 새로운 몇 명의 플레이어가 동대륙에 발을 들였나보다.
“엥?”
동대륙 시작의 마을, 판게아.
주변을 살피던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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