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24권 - 15화
현실시간으로 1년 3개월, 게임 시간으로는 3년 9개월.
라우엘이 그리드를 섬긴 기간이다.
그리드의 잠재력을 간파했던 처음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라우엘은 실로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템빨단을 키워왔다.
Satisfy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위대한 업적.
<왕국 건설>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길었다…’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즐거웠다.
그리드와 템빨단원들.
마음 맞는 동료들과 함께 무수한 사건사고를 겪고 역경을 해쳐온 과정.
그리드가 길드 이름을 템빨단으로 지었다던가, 그리드가 길드 이름을 템빨단으로 지었다던가, 그리드가 길드 이름을 템빨단으로 지었다던가하는 등 진절머리 나는 순간들도 참 많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모든 일들이 흐뭇하고 보람찼다.
“…”
라우엘의 집무실.
그리드와 귓속말을 나눈 후 감회에 젖어있던 라우엘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페이커가 서있었다.
늘 그렇듯이 소리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제 적응한 라우엘이 놀라지도 않고 물었다.
“척후병들의 정찰 결과가 나온 겁니까?”
레이단의 병사들은 피아로와 아스모펠에게 훈련을 받아왔다.
사하란 제국 최정예 집단인 <적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 출신인 그들에게 훈련 받은 병사들이 비범하지 않을 리 없다.
레이단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레벨이 높았고, 다른 영지의 동레벨 병사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뛰어난 스탯과 스킬을 자랑했다. 거기에 그리드의 템빨까지 보태졌다.
한 마디로 정예. 그것도 최정예병들이다.
그중에서도 척후병들은 따로 페이커에게도 교육을 받았다. 보다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방법을.
그렇기에 라우엘은 척후병들의 실력을 믿었다.
역시나, 페이커가 멋진 답변을 내놨다.
“파트리안의 병력배치도를 입수해왔더군.”
“오오!”
라우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뻐하며 보고서를 요구하는 그에게, 페이커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드의 전력을 노출해도 되는 건가?”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기 위함이라지만, 그리드의 사냥 장면을 방송으로 송출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페이커는 의문이었다.
현재 그리드가 지닌 힘이 공개 될 경우, 일부 특정 세력에게 그리드 공략법을 제공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어졌으니 걱정이었다.
‘이분도 참.’
늘 과묵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이 적지만 페이커도 역시 템빨단원이다.
늘 그리드를 걱정하고 있다.
충성심이나 의리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하다. 우정과 애정이다.
‘나보다 더 오랫동안 그리드님을 봐온 분이시니까…’
빙그레.
흐뭇하게 미소지은 라우엘이 페이커에게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보냈다.
“세상이 ‘현재’ 그리드님의 완전한 힘을 알게 될지라도 걱정할 거 없습니다.”
그리드의 가장 큰 강점은 유연한 템빨에 있다.
때와 장소에 맞게끔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 착용하여 전혀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오늘의 그분과 내일의 그분은 또 다르니까요. 세상은 평생토록 그분을 가늠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어떤 강자가 그리드의 오늘날 전력을 파악하고 약점을 분석하여 덤벼오더라도 그리드를 위협할 수는 없다.
그 사이 그리드는 새로운 아이템을 제작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테니까.
***
블란드.
대륙의 10대 마법사 중 하나인 아슈르 백작의 유일한 혈육.
그리드에게 볼모로 붙잡힌 그가 레이단에 체류한 기간이 벌써 3년째다.
그동안 피아로에게 많은 것을 배운 그는 이제 모든 농기구를 다룰 줄 알았고, 논밭의 마나를 자신의 힘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알았다.
아버지를 닮아서 타고난 마법적 재능이 뛰어나고, 스테임 후작으로부터 검술을 사사하여 준수한 검술실력까지 갖췄던 그.
이제는 피아로의 농법까지 터득하여 새로운 경지에 진입하였으니 사람들은 그를 <논밭 위의 마검사>라 칭하였다.
논밭에서의 그는… 정말로 강했다.
“레이단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어떻습니까?”
와구와구.
농부들의 새참 시간.
에트날 왕국 최고 명문가의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흙투성이가 된 채 허겁지겁 감자를 먹고 있는 블란드.
그에게 다가온 라우엘이 질문했다.
양손에 쥐고 있던 감자를 입에 구겨 넣은 블라드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볼모 생활을 돌이켜 봤자 수치스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을 텐데요. 우리는 당신을 볼모로 대한 적이 없으니까요.”
“…”
“당신은 늘 존중 받았고, 자유로웠으며, 심지어 새로운 배움까지 얻었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레이단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
라우엘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레이단으로 끌려온 후, 블란드는 처음 농기구를 손에 쥐었던 그날을 제외하면 무엇인가를 강제로 행한 적이 없다.
감시 받지도 않았고 어떤 제약이나 차별을 당하지도 않았다.
사실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블란드는 도망치지 않았다.
레이단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러웠으니까.
편했다.
왕국 최고의 명문가 후계자이자 대마법사의 아들로서, 늘 사람들의 편견과 기대를 받으며 자라온 그에게 있어서 평범한 농부로서의 삶은 즐거운 것이었다.
차별 없이 대해주는 템빨단원들과 레이단 백성들이 고마웠다.
“뭐… 나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하는 블란드.
입속에 가득 쑤셔 넣은 감자를 오물거리면서 뺨을 붉히는 그에게 라우엘이 재차 질문했다.
“아슈르 백작님도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신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
깜짝 놀란 블란드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도끼눈을 떴다.
“라우엘 백작! 그 무슨 망발입니까! 당신 설마…!”
그리드 공작이 렌 왕자와 전쟁을 벌였고, 그 틈을 노린 아스란 왕자가 렌 왕자를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
세상은 모르는 진실을 블란드는 알고 있었다. 레이단에 있으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그는 예상하고 있었다.
아스란 왕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레이단을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며, 언젠가 레이단은 에트날 왕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될 거란 사실을.
나의 아버지께서 전화에 휩쓸리실 것임을.
하지만 그 시기가 이토록 빠를 줄은 몰랐다.
“반군이 되어 왕실을 적대하고 파트리안을 위협할 작정인 겝니까…!”
아버지를 걱정하며 외치는 블란드에게 라우엘이 2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였다.
“당신의 말에는 두 가지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가 에트날 왕실을 적대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반군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드 공작각하께서는 에트날 왕실이 아니라 선왕 비스바덴께만 충성을 서약하셨던 몸. 선왕께서 서거하신 시점부터 우리는 에트날 소속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즉, 에트날 왕실을 적대하게 될지언정 이를 반란이라고 지칭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
궤변이다.
하지만 원래 정치라는 게 이렇다. 조금의 틈만 있으면 이를 근거로 쉽게 명분을 챙긴다.
블란드는 부정하지 못했고, 라우엘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파트리안을 위협할 생각이 없습니다. 대륙의 10대 마법사 중 하나인 아슈르 백작이 다스리는, 에트날 최고의 요새도시를 어찌 감히 위협하겠습니까? 우리는 단지 포용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힘이 필요하고.”
“설마 제게 아버지를 설득하라 이겁니까? 에트날을 버리고 그리드 공작각하를 섬기라고!”
아슈르 백작의 가문은 대대로 에트날 왕실을 섬겨왔다. 이제 와서 에트날을 배신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상들 뵐 면목이 없어서라도 아슈르 백작은 결코 왕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었다.
확신하는 블란드였으나 라우엘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어야할 사람은 본래 아스란이 아닌 렌 왕자입니다. 하지만 외세의 힘을 빌려온 아스란이 렌 왕자를 시해함으로서 왕위를 찬탈했죠. 이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며, 현 시점의 에트날 왕실은 정통이 아닙니다. 현 왕실에 아슈르 백작이 충성해야할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
블란드의 투명한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귓가로 입을 가져간 라우엘이 속삭였다.
“설탕 뿌리지 않은 감자처럼 순수하고 정직한 블란드여… 당신의 아버지가 거짓 왕에게 속아 춤추는 꼭두각시가 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면, 당신 또한 이번 출정에 동행하여 아버지께 진실을 알리고 설득해주기 바랍니다. 그 과정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언정 이 내가 곁을 지켜드리지요.”
오글오글!
블란드의 손발이 오그라졌다. 동시에 전신의 근육이 수축되며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생전 처음 느끼는 오글거림에 당황한 블란드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이내 냉정을 되찾고 고심해본 끝에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께도 레인보우 포테이토의 맛을 전해드리고 싶었으니까요.”
단지 대대로 왕실을 섬겼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국가에 헌신해온 아버지.
블란드는 더없이 고단하고 무의미했을 그분의 삶에 새로운 즐거움을 전파하고 싶었다.
결심하는 그를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본 라우엘이 이내 하늘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우스 왕국이 있는 방향이었다.
‘낚싯대는 준비됐으니, 이제는 미끼를 챙겨볼까.’
***
“영주대리 라우엘 백작각하의 명령이다!”
“4시간 후에 출정한다!”
레이단에는 총 아홉 명의 기사가 있다.
그중 하나는 오래 전부터 그리드를 섬겨온 쥬드였고, 나머지 여덟은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새롭게 육성한 젊은 기사들이다.
이 젊은 기사들의 검술, 농술, 용병술은 무척 훌륭한 수준으로, 아직 제국의 적기사들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지만 흑기사들보다는 훨씬 더 뛰어났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이 직접 선별한 이들이니만큼 발전 가능성은 적기사 이상이다.
분주히 뛰어다니며 병사들을 점검하던 그들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사령관님은?”
“설마, 오늘도 나타나지 않으실 작정인 건가?”
수인족의 왕국 세이렌이라는 곳을 다녀온 이후.
사령관 아스모펠은 며칠 동안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 날 갑자기 증발해버렸다.
지난 한 달 동안 레이단 어디에서도 보이질 않았다.
걱정에 휩싸인 기사들이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의 귀족 분들께 행방을 여쭤보았지만, 걱정 말라는 답변만이 돌아올 뿐.
그 누구도 아스모펠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랐다.
워낙 강하고 현명하신 분이니만큼 그동안 큰 걱정은 안 했지만…
하지만 설마 출정을 앞둔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을 줄이야!
총사령관 피아로가 세이렌으로 떠나있는 지금, 사령관마저 자리를 비우면 누가 군을 제대로 통솔할 수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던 여덟 명의 기사들이 문득, 막사 한쪽에 조용히 서있는 선임기사 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스모펠님을 대신해서 저분이 군을 통솔하게 되시는 건가?”
“소문에 의하면 오랫동안 그리드 각하를 섬기면서 무수한 공적을 쌓으셨다는데…”
“아스모펠님을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실 줄은 몰랐군.”
“그리드 각하께서 직접 선별한 기사라니까 당연히 대단한 분이겠지. 심지어 오랫동안 윈스톤을 수호하는 역할까지 수행하다 오신 분이잖나.”
저들끼리 수군거린 젊은 기사들이 이내 쥬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쥬드 경, 병사들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언제라도 출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
쥬드는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도열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엄숙하였기에 젊은 기사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설마 우리가 어떤 실수라도 한 건가?’
‘병사들을 잘못 선별했나?’
긴장하는 젊은 기사들.
그들에게 한동안 잠자코 있던 쥬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리. 어디. 가나?”
“…?”
‘재미있는 분이네?’
소문 대단한 선임기사의 실체를 아직 모르는 젊은 기사들이었다.
한편, 쥬드와 여덟 기사 앞에 도열하고 있는 레이단의 3천 병사들.
그들 중 한 명의 병사가 눌러쓴 투구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일개 병사부터 다시 시작해서 차근차근 공적과 경험을 쌓지 않는 이상 그리드 공작각하께 인정받지 못한다.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나는 일개 병사로서 최선을 다 하겠다.’
이 일개 병사의 정체, 놀랍게도 사령관 아스모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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