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21화 (316/1,794)

템빨 24권 - 11화

“6층은 아니야.”

6층은 그리드 가족들의 거주지다.

그리드가 잡지 인터뷰에서 밝힌 사항이다.

본인은 펜트하우스에서 독립 된 생활을 하고 있다며.

“예,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드 인터뷰는 죄다 챙겨 봤거든요. 이래 뵈도 그리드 팬이라서…”

“하하, 지금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의 팬이지.”

그러니까 더욱 더 그리드를 섭외해야한다.

6층은 패스한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가 그대로 7층에 올랐다.

7층은 옥상이었다.

잔디가 깔려있는 옥상.

잉어들이 노니는 작은 연못과 고급 목재로 제작한 테이블, 불어오는 미풍에 흔들리는 화초들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정원의 풍광.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정원 끝에는 외벽이 투명 유리로 제작 된 작은 저택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소문 자자한 그리드의 펜트하우스다.

“와… 죽이네요.”

“크음, 나도 언젠가는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군. 다음 생에나 가능할 것 같지만.”

전문가들이 평하기를, 그리드는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신흥재벌로 부상할 수 있는 존재였다.

과연 대단한 인물답게 사는 곳도 특별하다.

감탄한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옥상 전경을 살피는 그들의 귓가로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다, 당신은…?”

백옥 같은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대비되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미녀.

커다란 눈동자가 마치 호수처럼 깊다.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를 마중 나온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옆이 트인 검정 스커트에 흰색 와이셔츠를 매치하여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한 코디를 완성한 상태였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바라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다. 그토록 멋지게 느껴지던 옥상 정원도 그녀 앞에선 초라할 따름.

유라의 미모에 넋을 잃은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 중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이국래 국장이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 유부남의 저력이다.

“어째서 유라씨가 이곳에…?”

과거, 그리드의 방송관련으로 OGC를 방문했던 전력이 있는 유라이다.

그녀 탓에 눈물을 머금고 그리드의 몸값을 천정부지까지 띄웠던 이국래 국장이 바짝 긴장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키는 그에게 유라가 살포시 웃어보였다.

“제가 이곳에 있는 게 이상한가요? 저와 영우씨의 사이, 어렴풋이 짐작하고 계시지 않아요?”

“아…!”

역시나 연인 사이였구나!

‘부러운 인간…’

재력, 명성, 미녀 삼위일체를 다 갖춘 그리드다.

능력 좋은 유부남인 이국래 국장조차도 그리드의 삶이 터무니없이 부러웠다.

모태솔로인 박종수PD의 질투는 하늘을 찔렀고.

‘다음 생에는 그리드로 태어나고 싶다…’

그렇듯 오해에 휩싸인 두 사내를 보면서 유라는 은근히 한숨을 쉬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우씨가 내 연인이었다면 기쁠 것 같다만.

‘현실은 자산관리사…’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시궁창 같은 현실을 외면한 유라.

다시금 미소지은 그녀가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를 정원 한쪽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탁. 탁.

테이블 옆 연못에 자리 잡은 작은 물레방아가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

“영우씨의 사냥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고 싶으신 거죠?”

“예, 맞습니다.”

긴 말이 필요 없어 좋다.

찾아온 이유를 정확하게 알아주는 유라에게 이국래 국장이 즉답했다.

그에 호응하듯이 유라 또한 곧바로 조건을 제시했다.

“지불하셔야할 금액은 에누리 없이 200억이에요. 또한, 방영권은 독점할 수 없고 개인 방송국을 운영 중인 버니버니님과 양분하셔야 해요.”

“헐…”

박종수PD가 당혹을 금치 못했다.

무슨 어려운 촬영도 아니고, 그저 사냥하는 모습 찍어서 방영하는 대가로 200억을 내야한다니?

심지어 독점 방영도 아닌데!

이는 업계의 생리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처사였다.

‘에누리도 없다니 당연히 거절하시겠군.’

박종수PD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그때.

“…알았습니다. 바로 계약서 쓰도록 하죠.”

이국래 국장이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구, 국장님?”

노망이라도 났습니까?

라는 말은 간신히 삼키는 박종수PD에게 이국래 국장이 한숨 쉬었다.

“에누리 없다잖나.”

사실, OGC 이사진은 그리드의 사냥 ‘독점’ 방영권을 얻는 대가로 백지수표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현재 전 세계가 궁금해 하고 있는 그리드 레벨링의 비밀을 독점적으로 공개할 수 있다면, 천문학적인 광고수익을 올림과 동시에 OGC의 인지도를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었으니까.

솔직히 200억도 아깝지 않았다.

버니버니와 방영권을 양분해야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따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본사는 작년, 영우씨가 교황청에서 적기사들과 싸우는 장면을 방영한 대가로 50억이라는 거액을 지불한 바 있습니다. 그때 유라씨가 말씀하셨지요? OGC에 충분한 보답을 해주겠노라고. 유라씨와 영우씨 모두 OGC 방송에 적극적으로 출연해줄 거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그 후 어땠지요? 당신들은 OGC의 러브콜을 몇 차례나 거절하였습니다. 그 점은 매우 서운합니다.”

이국래 국장이 말하고자하는 부분은 간단했다.

“이번 거래를 계기로 우리의 관계를 한층 더 발전시킨다면 좋겠습니다. 다음부터는 OGC의 러브콜에 호응해주십시오.”

유라의 답변도 간단했다.

“출연할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해주신다면 언제든지 긍정적으로 검토해볼게요.”

출연할만한 가치!

시덥잖은 프로그램 따위엔 출연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가 궁리하여 만든 프로그램들이 그토록 하찮게 보였단 말이지…!’

OGC를 세계 최고의 게임전문방송사라고 자부해온 이국래 국장과 박종수PD가 자극 받았다.

“좋습니다… 반드시 가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해보이고 말지요. 당신이 군소리 없이 출현하게 될 정도로 훌륭한 프로그램을!”

“기대할게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될 전설의 프로그램이 제작되는 것은 이로부터 1년 후의 일이었다.

***

“저 정말로 이대로 가요? 미국에서부터 비행기 타고 날아온 사람을 이렇게 쉽게 떠나보내도 되는 겁니까? 예?”

세계 최고의 게임BJ 버니버니.

그리드를 방송 소재로 삼고 싶다는 일념으로 머나먼 이국땅까지 찾아온 그는 원하던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드의 사냥 과정을 취재하고 방영하는 내용의 계약 말이다.

물론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해서 감정이 복받쳐 오른다.

그리드가 캡슐에서 나오질 않았으니까!

“정말 너무하네! 먼 길 온 사람한테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급기야 흥분하는 그에게 유라가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다.

“랭커에게 일상생활이 가능할 거라고 보시나요? 식사 시간과 수면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게임만 하고 계신 분이에요. 설령 미국 대통령이 온다고 해도 영우씨의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어요.”

사실 유라의 처지도 버니버니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없는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물심양면 돕고 있건만, 그리드는 그녀와 차 한 잔 마셔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서운하네.’

살면서 이토록 푸대접 받아본 적이 있던가?

이젠 오기가 생긴다.

“…?”

갑자기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유라를 본 버니버니가 깜짝 놀랐다.

“고고하기로 유명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다니, 신기하군요.”

“저 자신도 신기해요.”

그리드를 상대로 느끼는 감정들은 늘 생소하다. 그래서 즐겁고 기분이 복잡하다.

생각하며 미소 짓는 유라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

템빨단 2.

템빨단 2군의 이름이다.

누가 봐도 허접한 이름이었다. 비웃고 놀리는 사람도 적잖게 많았다.

하지만 정작 템빨단 2에 속한 길드원들은 이름에 큰 불만이 없었다.

원래는 ‘템빨단 인력소’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뻔했다가 템빨단 2가 된 것이니, 그나마도 감지덕지였던 것이다.

“은기사 길드와 합병함으로서 발족시킬 수 있었던 우리 2군의 평균 레벨이 드디어 200을 돌파했습니다.”

템빨단 2에 속한 길드원 대부분이 생산직계열이다. 레벨 올리는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평균 레벨이 200을 넘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템빨단 내의 파티사냥이 기대 이상으로 활성화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결과였고, 향후 템빨단이 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의 종류가 다양해지게 되었으니 여러모로 경사였다.

라우엘은 이를 성대하게 기념함으로서 길드의 전체 사기를 증폭시킬 계획을 세웠다.

“어떻게 기념할 건데?”

“싸우고, 쟁취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에서 기념하는 방법이라야 간단하죠. 전쟁합시다. 그리고 이겨서 승전의 기쁨을 나눕시다.”

템빨단은 소수정예 인원으로 시작한 길드다.

하여, 길드를 정착시키고 세를 불리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요했고, 그 과정의 평화 탓에 표면적으로는 친목집단쯤으로 비춰지고 있는 실정이었지만, 그건 큰 오해다.

본래 템빨단이란, 그리드를 왕으로 추대하고 권력을 얻은 뒤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집단이었다.

전쟁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드가 뱀파이어의 도시에 틀어박혀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전쟁을 하자고?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지금이기 때문에 전쟁을 해야 하는 겁니다.”

현재 세상의 이목은 그리드에게 집중되어 있다.

군대를 움직이기에 이만큼 자유로운 타이밍도 없다.

에트날 왕국의 지도를 펼친 라우엘이 한 곳을 지목했다.

파트리안.

에트날 왕국의 북부와 서부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요새도시.

“아스란이 왕위에 오른 뒤부터 북부와의 교류가 힘들어졌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겁니다.”

아스란의 그리드 견제는 노골적이지 않고 천천히 진행됐다.

표면적으로는 레이단에 선물공세를 퍼붓는 등 그리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처럼 행동했으나, 그건 화전양면 전략에 불과하다.

아스란이 레이단에 선물을 보낼 때마다 북부의 세금이 조금씩 올랐고, 아스란이 그리드에게 친서를 보낼 때마다 북부와 서부를 잇는 길목들이 하나씩 폐쇄됐다.

명목이야 늘 그럴듯해서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라우엘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북부에 있는 우리의 영토 바이란이 고립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때부터 아스란 왕이 본색을 드러낼 거고요.”

그 전에 파트리안을 점령하고 북부와 서부를 잇는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우리가 파트리안을 침략하면 아스날 왕은 바이란으로 군대를 보낼 텐데. 그럼 우린 북부를 완전히 소실하고 서부에 고립되는 거 아니야?”

“하아, 어리석은 반트너.”

나름 생각해보고 의견을 말하는 반트너의 반들반들한 대머리를 라우엘이 쓰다듬었다.

측은지심이 깃든 눈빛을 보내면서 말이다.

“북부의 지배자가 그리드님의 장인어른임을 잊으셨습니까? 스테임 후작이 알아서 아스란 왕을 견제해주실 겁니다. 말인 즉, 실제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대상은 아스란 왕 따위가 아니라 플레이어라는 겁니다.”

템빨단이 파트리온을 침략하게 될 경우, 파트리온 소속 플레이어들에게 방어관련 퀘스트가 뜰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템빨단은 에트날 왕국과 적대하는 세력으로 분류되고, 에트날 왕국 소속의 플레이어 전체에게 템빨단 토벌 퀘스트가 뜨게 된다.

“관건은 그 퀘스트가 뜨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어들의 이목이 그리드님께 집중 된 지금이야말로 최고의 침략 적기죠.”

침략 시기에 맞춰서 그리드의 사냥 방송을 전 세계로 송출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방송의 시청률은 국가대항전의 시청률과 동격일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리드의 레벨링 속도에 대한 의문을 해소함과 동시에 노하우를 얻고 싶은 사람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니까.

그리드의 사냥 방송이 시작되는 순간 Satisfy의 실시간 접속자 수가 대량으로 줄어들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행군은 비교적 은밀하게 진행될 수 있고, 플레이어가 텅텅 빈 파트리온 따위 순식간에 장악해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해하셨습니까, 무지의 반트너여? 큭큭큭!!”

오글오글!

손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채 웃는 라우엘의 모습은 중2병 환자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중2병 덕분에 그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