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15화 (310/1,794)

템빨 24권 - 5화

[일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상태이상 ‘스턴’에 걸립니다.]

[저항하였습니다.]

“크윽…!”

생명력 10분의 9를 일격에 잃은 크라우젤.

격통을 견뎌내고자 이를 악 문 그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럭은 그를 굳이 뒤쫓지 않았다. 언제든지 잡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레벨 초기화에 스턴 저항이라… 당신, 역시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한 거구나? 그중에서도 1티어라는 검성일 가능성이 높고. 아이고, 우리 아레스 형님께서도 어서 빨리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하셔야하는데.”

최상위 플레이어들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횟수가 일반적인 플레이어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았고, 이에 따라서 정보력도 뛰어났다.

특히 아레스의 길드는 도시와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 정복하는 것이 주된 활동 내역이었던 탓에 옛 문헌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레전드리 클래스의 특징을 이미 상당 부분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뭐, 여기까지는 예상대로지만 불사도 못 터뜨린 건 좀 충격적이야. 당신이 칭호를 한 20개쯤 모았던가?”

그중에 생명력과 방어력을 올려주는 칭호가 있을 거라고 감안해도 럭의 레벨은 무려 335다.

이제 갓 100레벨을 넘겼을 크라우젤을 일격에 해치우지 못한 건 의외였다.

예의 무표정을 되찾은 크라우젤이 입을 열었다.

“검사의 맨주먹에 쓰러질 정도로 나약하진 않아서 말이지. 나를 쓰러뜨리려면 검을 쥐어라.”

“하핫, 이제야 좀 크라우젤님 답네. 그렇지. 크라우젤은 오만해야지. 명색이 하늘 위의 하늘이시니까 말이야. 내가 찾아온 용건은 잘 알고 있겠지?”

“다짜고짜 공격해놓고 새삼스레 묻는 것도 웃기는군. 원하는 건 내 목일 테지?”

“응, 당신의 수급을 취해야겠어. 근데 한 번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번.”

“…”

크라우젤은 럭과 대화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퇴로를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저 바위를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나.’

크라우젤은 늪지대 중앙에 우뚝 솟아있는 바위를 주목했다.

검성이 된 후 다시 습득한 <백광보>의 묘리를 살려서 한 번에 바위까지 도약한 후, 뒤쫓아 오는 럭을 반격기로 떨쳐내어 늪지대에 빠뜨릴 계획을 세웠다.

늪지대에 빠지면 이동속도가 최대 90퍼센트까지 하락했기 때문에, 럭을 늪지대에 빠뜨릴 수만 있다면 충분히 도망칠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하지만 문제는 바위까지의 거리가 무려 11미터라는 점이었다.

백광보를 연속적으로 2번 사용해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고, 현재의 크라우젤은 레벨이 낮았으므로 마나량이 적었다. 백광보를 2번 연속으로 사용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첫 번째 백광보를 사용함과 동시에 마나 물약을 복용해야하는데.’

허공에서 보법을 밟으면서 인벤토리로부터 물약을 꺼내 마시는 행동.

결코 어렵지 않다. 10명의 플레이어 중에서 4명은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 일련의 행동을 0.7초 내에 수행해야만 했다.

늪지대에 빠지지 않고 바위까지 한 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백광보 이후 두 번째 백광보를 0.7초 안에 연계시켜야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는 생각하고 있어. 비겁한 것도 알아. 당신이 약해진 틈을 노리고 견제하는 거 말이야. 참 부끄러운 일이지.”

“…”

“하지만 이쪽 사정도 이해해줘. 당신이 이대로 무난하게 커버리면 아레스님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으니까 좌시할 수가 없어. 앞으로 세 달. 딱 세 달만 참아. 세 달 동안만 당신을 쫓아다니면서 죽여줄 테니까.”

적어도 세 달 동안은 사냥을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뜻이다.

딱히 비정상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특정 단체가 일개 플레이어를 잔인하게 괴롭히고 짓밟는 일은 본래 비일비재했다.

과거에 크라우젤도 많이 당했었다.

아직 크라우젤의 진짜 실력을 몰랐던, 당시 최고의 길드들이 크라우젤을 견제한답시고 툭하면 척살령을 내렸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때의 크라우젤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덤벼오는 모든 적들을 역으로 처단하고 도리어 군림했다.

반면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의 크라우젤은 약하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보다 몇 배나 더 강해질 수 있었지만, 당장 레벨이 109밖에 안 됐다.

과거의 그리드가 1년 동안 게임해서 80레벨을 찍었던 것과 비교하면, 단 보름 만에 109레벨을 찍은 크라우젤의 레벨 업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지만.

“뭐야? 조금도 동요 안 하네? 한 번쯤은 봐달라고 애원할 줄 알았는데?”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크라우젤의 반응을 본 럭이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크라우젤이 반문했다.

“하룻강아지가 짖는다고 해서 동요할 호랑이가 있나?”

“뭐…?”

럭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파앗!

크라우젤이 즉각 행동에 나섰다.

백광보를 전개, 지면을 박차고 도약함과 동시에 태양을 등질 수 있는 각도로 움직였다.

그러자 동시에 은신이 전개되었다.

불과 1초에 불과한 은신이었지만 효과는 충분했다.

크라우젤을 시야에서 놓친 럭이 당황하는 찰나.

크라우젤은 마나 물약을 꺼내 마셨고 또 곧바로 백광보를 연계했다.

쐐애애애애액-!

크라우젤의 시야에 늪지대의 풍광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급기야 목적지로 설정했던 바위를 코앞에 두게 된 그의 귓가로 럭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고, 놀랐네. 는 개뿔. 내가 고작 그 정도도 예상 못했을까.”

어느덧 검을 뽑아 쥔 럭이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적색의 오러가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표적은 당연히 크라우젤이었다.

쿠콰콰콰콰쾅!!

오러가 지나간 자리의 늪지대가 출렁인다. 깊이가 조금만 더 깊었어도 해일이 일어났을 기세다.

“큭…!”

날아오는 오러를 피하고자 크라우젤이 가슴을 뒤로 크게 젖혔다.

그러자 그의 코끝을 스쳐지나간 오러가 한쪽에 우거져있는 거목들까지 날아가 쓰러뜨렸다.

크라우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오러의 폭풍에 휩쓸린 바위가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던 까닭이다.

“하핫!”

럭이 웃었다.

그는 발 디딜 곳 사라진 크라우젤이 그대로 늪지대로 떨어지는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은 그의 기대를 쉽게 무너뜨렸다.

레벨과 스탯이 전과 비할 바 없이 떨어진 상태라고는 하나, 크라우젤은 크라우젤이다.

신의 경지에 오른 컨트롤 솜씨를 구사한 그가 허공에 나부끼고 있는 바위의 잔재들을 밟아서 이동하더니 순식간에 늪지대를 벗어나버렸다.

“뭐야!!”

럭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슨 무협지도 아니고, 설마 크라우젤이 허공에 비산하는 돌멩이들을 밟고 이동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늪지대를 사이에 두고 안전거리를 확보한 크라우젤이 럭에게 선언했다.

“힘을 되찾고 나면 오늘의 빚을 반드시 되갚아주겠다.”

“이익…!”

이를 간 럭이 또 한 번 오러를 쏘았다.

하지만 맞아줄 크라우젤이 아니었다.

패시브화 된 초감각과 타고난 혜안을 이용한 그가 아슬아슬하게나마 오러를 회피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이탈했다.

“젠장! 그딴 보법은 대체 어디서 습득할 수 있는 거냐!!”

괜히 여유를 부리다가 목표물을 놓쳐버린 럭.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는 그의 절규가 고요한 늪지대에 메아리쳤다.

***

‘아직 위험하다.’

늪지대를 벗어나며 상태창을 확인하는 크라우젤의 안색이 어두웠다.

벌써부터 스태미나가 고갈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이다.

저레벨의 비애였다.

‘안 되겠군.’

럭의 추적을 우려한 크라우젤이 내린 선택은 로그아웃이었다.

천외천.

하늘 위의 하늘이라 칭송 받으며 절대 지존으로 군림하였던 그가 이처럼 계속, 계속 도망치는 모습.

누군가가 보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는 대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크라우젤 본인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무적이 아니었으니까.

패배하고, 도망쳐본 경험이 그는 무수히도 많았고 익숙했다.

물론 그 대상은 대부분 플레이어가 아니라 NPC, 혹은 몬스터였고, 플레이어에게 패배해본 경험은 단 한 번밖에 없었지만.

***

“어머니? 일찍 일어나셨군요.”

캡슐에서 빠져나온 크라우젤이 부엌에서 요리 중인 어머니를 발견하고 당황했다.

“이런 일은 가사도우미에게 맡겨두시지, 왜 직접…”

혹 무리하시는 거 아닐까, 걱정하는 크라우젤에게 그의 어머니가 웃어주었다. 마음속까지 따뜻해지는 상냥한 미소였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아침밥 정도는 직접 차려주고 싶어서 말이야.”

“…감사합니다.”

정녕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병마와 싸워 이겨내신 어머니께.

또한 어머니의 쾌유를 기원해준 그리드와 템빨단원들에게.

문득 그리드를 떠올리게 된 크라우젤이 근심했다.

‘아레스의 세력 확장이 이대로 계속되면 1년 안에 에트날까지 넘보게 될 텐데.’

템빨단이 최강의 길드라는 사실을 크라우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레스의 길드는 군대다. 보다 더 체계적이었고 강력한 병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애초에 전장에서 발휘되는 아레스의 광역 버프 ‘패시브’ 스킬은 밸런스에 어긋나는 사기급 힘이었다.

거기에다가 럭이나 스캇을 비롯한 아레스의 부하들은 과거의 자신을 위협했을 정도의 실력자들이다.

‘스캇보다 한 수 아래라는 럭만 해도…’

<무조건 반격>이라는 패시브 스킬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

공격을 맞을 때마다 자신을 때린 대상에게 100퍼센트 확률로 반격하는, 회피가 불가능한 형태의 절대적인 패시브 스킬.

강한 공격력을 발휘하는 템빨단원들에게 그는 완벽한 카운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내가 빨리 커야한다.’

그리드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템빨단에 가입할 생각은 역시 없다.

하지만 그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꼭 길드에 가입하는 방법뿐일까?

당연히 아니다.

크라우젤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그리드를 도울 방안을 세웠고, 그중 하나가 바로 아레스 세력의 견제였다.

아레스의 <약탈>스킬 대상에 그리드와 템빨단이 포함되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고, 크라우젤은 다짐해보였다.

‘그전에 당장 내 입장이 문제긴 하다만.’

한숨 쉬는 크라우젤에게 그의 어머니가 아침밥상을 내어주셨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를 한 입 맛 본 크라우젤.

‘어머니의 맛… 여전하구나.’

눈시울을 붉힌 크라우젤이 어머니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어머니… 앞으로도 식사는 가사도우미에게 맡기도록 하죠.”

“…”

요리에 재능이 없는 어머니였다.

***

간신히 늪지대를 벗어난 럭.

아직 민첩성과 체력이 낮은 크라우젤이 설마 벌써 숲을 벗어났을 리는 없다고 판단한 그가 주변일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라우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크라우젤은 발자취 하나조차 남겨놓지 않고 완벽하게 증발해버렸다.

“아무래도 로그아웃한 것 같은데 그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네. 흔적 지우는 솜씨가 완전히 암살자 수준이잖아?”

아니, 도대체가 못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

너무 만능이라서 어이가 없다.

‘역시 크라우젤은 위험하다. 이대로 방치해선 안 돼. 하지만 나 혼자서 견제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고… 제길, 인원을 더 투입해야겠는데.’

럭은 어째서 이렇게까지 크라우젤에게 집착하는 걸까?

한 번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아레스와 함께 병력을 이끌고 소도시를 침략했던 럭은 마침 그 도시에서 <수호자>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던 크라우젤을 만나 발목을 붙잡혔고 그때 확실히 깨달았다.

강한 힘을 지닌 인물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든지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그렇기에, 럭은 크라우젤이 힘을 수복하는 일을 어떻게든지 저지하고 싶었다. 최소한 시기를 늦추고 싶었다.

모든 건 아레스 제국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

일본.

국가대항전 이후 국제적인 스타가 된 데미안이 한 언론매체와 인터뷰 중이었다.

평소에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해왔던 그가 오늘은 특별히 인터뷰에 응한 이유?

인터뷰 내용이 그리드와 관련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드가 이제 와서 랭킹에 등록한 이유가 뭐라고 보시나요?”

“증명이죠. 그리드님께서는 남들과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른 자신의 레벨링 속도를 만천하에 알리고 스스로의 위대함을 증명하실 계획 같습니다.”

“그리드의 레벨링 속도가 빠르다고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요?”

제2회 국가대항전 당시.

<공성전> 종목에서 그리드와 파티를 맺었던 ‘어떤 익명의 한국인’ 플레이어의 제보에 따르면, 당시에도 그리드의 레벨은 306이었다고 한다.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벌써 16일이 지났는데도 그리드의 레벨은 그대로에요. 그의 레벨링 속도가 형편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대목 아닐까요?”

국가대항전에서 종합순위 2위를 차지한 한국의 경험치 버프는 무려 27퍼센트짜리다.

또한, 최근 300레벨 이상의 플레이어들에게 이상적인 사냥터가 대규모로 공개 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게임 시간으로 45일이 넘는 기간 동안 1개의 레벨도 올리지 못한 그리드.

그의 레벨링 실력은 누가 봐도 형편없었다. 만약 그가 뛰어났다면 지난 16일 동안 최소 3레벨은 올렸어야 정상이다.

황당해하는 기자에게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재 그리드님의 레벨은 307이십니다만?”

“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306레벨이었는데?

“아, 랭킹에 등록하기 전에 경험치를 많이 쌓아놓은 상태였나 보네요. 그러면 고작 반나절 만에 레벨이 오른 이유가 설명 되죠.”

멋대로 해석하는 기자에게 데미안이 콧방귀 뀌었다.

“당신, 어째선지 그리드님의 위대함을 부정하고 싶은 눈치 같은데 제가 한 가지 진실을 알려드리죠.”

“진실이요?”

“랭킹 1위의 왕좌는 그리드님께서 차지하게 될 겁니다.”

“…아, 네.”

그날 밤.

데미안의 인터뷰 내용이 공개되자 일본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데미안은 역시 세상물정 모르는 그리드 오타쿠라는 비난이 주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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