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07화 (302/1,794)

템빨 23권 - 21화

“그리드님!”

“응?”

아이린과 깊은 사랑을 나누고, 페이커와의 동료애를 되새김질한 직후.

칸의 대장간으로 향하는 그리드를 누군가가 불러 세웠다.

유페미나였다.

“뭐가 그리 급해서 호들갑이야?”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다.

‘무무드의 마법서가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 건가?’

하지만 그리드는 섣불리 기대하지 않았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무무드의 마법서가 기대 이하의 효력을 발휘했다면 실망이 클 터였으니까.

김칫국 마시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리드에게 유페미나가 와락, 안겨들었다.

다람쥐를 연상하게 만드는 조그마한 미소녀가 그리드의 넓은 가슴에 쏙하고 들어가는 모습, 누가 봐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리드가 당황했다.

“이, 이봐, 갑자기 왜 이래?”

비록 유부남일지언정 연애 경험은 전무한 그리드이다.

아이린을 제외한 여성과의 스킨십이 여전히 익숙치 않았다.

황급히 유페미나를 떼어내고 어버버거리는 그에게 유페미나가 재차 안겨들었다.

“고마워요…! 정말로 고마워요!!”

“…아.”

울 정도로 기쁜 일을 겪은 거냐.

나까지 기뻐진다.

“고맙긴. 축하해.”

뿌듯한 미소를 피어올린 그리드가 유페미나의 밝은 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그의 커다랗고 단단한 손길이 유페미나는 너무 좋았다. 상냥하면서도 듬직했다. 친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다.

“헉…?”

유페미나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리드가 문득 경기를 일으켰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로드와 시선이 마주친 까닭이었다.

“어, 언제부터 보고 있던 게냐?”

하필이면 오해를 살만한 장면을 목격 당하다니!

지은 죄도 없건만, 두려움과 죄책감을 느끼며 조심스레 묻는 그리드에게 로드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빠마마가 예쁜 누나를 껴안을 때부터 봤떠요.”

“내가 껴안은 게 아니라 껴안긴 거잖아!!”

흥분한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는 황급히 유페미나를 떼어내더니 로드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호, 혹시라도 엄마에겐 말하지 마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부탁하는 그리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드는 밝게 웃을 따름이었다.

“저 예쁜 누나가 아빠마마 애인이구나!”

“뭐, 뭣…”

유부남에게 따로 애인이 있을 거라는 발상을 하다니?

과연, 벌써부터 200명의 애인을 거느린 카사노바답다.

“큰일 날 소리! 로드야, 저 누나는 아버지의 애인이 아니라 동료…”

“첫 번째 애인? 두 번째 애인? 아빠마마 멋쪄요!”

“…멋지다고?”

유부남이.

심지어 아버지가 바람피운다고 오해하면서 그걸 멋지다고 말하다니!

적어도 이성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로드의 가치관이 나와 많이 다르구나, 깨달은 그리드가 벌써부터 미래의 며느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누가 너한테 시집올지는 모르겠다만…”

미래의 네 마누라가 불쌍하다.

아들에게 심한 생각을 품는 그리드였다.

***

“와, 이건 상상을 초월하네.”

칸의 대장간.

유페미나에게 퀘스트 정보를 공유 받은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레전드리 등급부터 시작하는 성장형 클래스가 보상이라니?

파그마의 기술과 브라함의 마법이 완전히 융화되어야 비로소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던 신화의 경지를, 무무드의 후계자는 무무드의 마법기술만으로도 노려볼 수 있단 뜻이 된다.

이는 즉.

‘무무드는 최소 로드급의 천재였나?’

스스로를 최고라고 자화자찬하기 바쁜 브라함마저도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존재라더니, 과연 굉장하다.

감탄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의 영혼이 말해왔다.

‘새삼 놀랄 것도 없다. 무무드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나는 물론이고 뮐러마저도 초월했을 테니까.’

“…”

단신으로 대악마들을 봉인시켰던 검성 뮐러.

그와 필적하는 수준도 아니고 초월했을 거란다.

‘그것 참 대단하네.’

내 동료가 최강의 클래스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된 건가.

질투하기보다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리드였다.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배알도 없는 놈.’

‘동료에게 질투할 정도로 속 좁은 것보단 낫지.’

애초에, 동료가 강해지는 건 그리드에게 무조건 득이 된다.

‘특히 나보다 강한 동료가 생기면 의지할 수도 있고, 여러모로 좋잖아?’

‘헛소리.’

설령 눈앞의 여자가 무무드의 후계자가 될지언정 과연 너보다 강해질 수 있을까?

브라함은 이 말을 삼켰다.

그리드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순순히 인정해주기에는 그의 속이 너무 좁았으니까.

“축하한다, 유페미나.”

진심으로 전하는 그리드에게 유페미나가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당신께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칫, 놀고들 앉았네.’

같잖은 의리를 보고 빈정거린 브라함이 그리드를 도발했다.

‘뭣보다 한 가지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만, 굳이 최강을 논하자면 역시 바알의 계약자다. 검성 뮐러조차도 바알의 힘을 얻은 파그마와는 비할 바가 못 되었었어. 너는 알아야한다. 바알의 계약자와 싸워서 무무드의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바알의 계약자.

제1악마 바알과 계약한 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번헨 열도에서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전대 바알의 계약자가 바로 파그마였다.

‘파그마는 진즉 죽었고… 그렇다면 당대 바알의 계약자는 누구지?’

질문해오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친절히 답변해주었다.

‘네 부하들이 알고 있다.’

“엥?”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해하는 그리드.

“왜 그러세요?”

의아해하는 유페미나에게 그리드가 반문했다.

“혹시 바알의 계약자가 누군지 알아?”

“아뇨, 공교롭게도 모르겠어요. 저는 바알의 계약자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들어봐요.”

“흠.”

지옥과 대악마에 대한 정보는 플레이어들에게 생소한 부분이다. 유페미나가 모르는 것도 납득이 갔다.

결국, 그리드가 길드 채팅창을 이용했다.

{바알의 계약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

{모르겠는데요.}

{그게 뭐야?}

너도나도 모른단다.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브라함에게 투덜거렸다.

‘애들이 알기는 개뿔. 웬일로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했더니만, 거짓말이었어?’

‘질문을 바꿔봐라.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만났던 네크로맨서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라우엘과 지슈카, 폰, 레가스, 반트너 등.

극소수의 인원이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우연히 아그너스와 마주쳤단 사실을 그리드는 모르고 있었다.

하여 반신반의하며 다시 질문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네크로맨서 본 사람?}

{…}

지금 그리드가 찾고 있는 인물이 아그너스라는 사실을 알게 된 라우엘과 지슈카가 당황했다.

그들은 그리드가 평생 아그너스와 엮이지 않기를 바라온 입장이었기에.

잠잠해지는 채팅창을 보고 구린내를 맡은 그리드가 재차 물었다.

{네크로맨서 본 사람 없어?}

{주군, 어디십니까?}

결국 라우엘이 나섰다.

그리드의 위치를 확인한 그가 당장 칸의 대장간으로 달려와 물었다.

“바알의 계약자라는 인물은 어째서 찾으시는 겁니까?”

힐끗, 그리드가 눈짓을 보내자 유페미나가 퀘스트 정보를 라우엘에게 공유해주었다.

내용을 읽은 라우엘이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이럴 수가…! 레전드리 등급부터 시작하는 성장형 클래스라니…!”

하지만.

‘하필이면 아그너스와 적대해야하는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한다니… 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전생의 내 업보가 그리드님과 동료들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기는구나… 다 내가 잘났던 죄다…’

라우엘의 고운 얼굴에 암운이 드리웠다.

그를 엿본 그리드가 재차 물었다.

“기뻐하기보다는 걱정부터 하네? 바알의 계약자가 도대체 누구기에 라우엘 네가 두려워하는 거지?”

“후우.”

심호흡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라우엘이 결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꺼냈다.

“아그너스…입니다.”

“아그너스?”

아그너스의 이름은 그리드에게도 익숙했다.

크라우젤과 유라가 랭킹에서 내려온 지금, 통합랭킹 5위에 위치하게 된 하이랭커.

유페미나, 카츠와 함께 서버 초기에 에픽 전직자가 됐던 인물이다.

흑마법사 시절의 유라는 말했었다.

그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확실히 거물이기는 하네.”

그리드 또한 아그너스가 강하리란 사실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3인의 에픽 전직자>로 아그너스와 한데 묶이는 유페미나, 카츠만 봐도 강했고, 무엇보다도 바알의 계약자는 브라함이 조금 전 ‘최강’이라고 표현한 클래스였으니까.

그래, 아그너스는 필시 강할 것이다. 어쩌면 크라우젤과 동급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 정도면 두려워할 정돈 아니지. 템빨단의 힘은 플레이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니까. 찾아내서 덮치자.”

퀘스트를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플레이어를 찾아가 습격한다?

이는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상이었다.

물론 그리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았다.

왕이 되려면 힘을 쌓아야하고, 힘을 쌓는 과정이 늘 정의로울 수는 없었으니까.

새로운 적을 무수히 만들게 되리라.

이미 예상하고 각오한 바이다.

라우엘은 그리드의 결단력과 행동력에 감격하면서도 진정시켰다.

“아그너스를 적대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입니다. 우선, 아그너스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의 광기에 매료된 플레이어는 무척이나 많고, 실제로 여러 개의 중소규모 길드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어요. 그와 충돌하게 되면 무조건 전쟁을 각오해야하지만 우리에게는 여력이 없습니다.”

사하란 제국을 등에 업고 에트날의 국왕이 된 아스란.

그리드에게 렌 왕자를 시해하였다는 누명을 씌운 뒤 템빨단을 견제하고 있는 그가 당면한 문제다.

“우리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 대상은 반드시 에트날 왕실이 되어야 합니다.”

“흠… 너무 소극적인 거 아닌가? 우선 유페미나를 무무드의 후예로 전직시키면 우리의 전력이 대폭 상승하게 되잖아? 유페미나부터 빨리 키우면 에트날 왕실이랑 아그너스의 세력을 동시에 다 박살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애초에 기본 전제가 잘못 됐습니다. 아그너스는 강합니다. 찾아내어 덮친다고 해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요. 기껏 덮쳤다가 적대하게만 되고 유페미나님의 전직은 실패한다면? 우리의 영지들은 그 길로 불바다가 되어버릴 겁니다.”

그리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뭔 소리야? 나랑 템빨단의 주력들을 투입하면 플레이어 하나쯤은 쉽게 해치울 수 있지 않나?”

“아그너스는 이미 플레이어의 범주를 초월하였으니까요.”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만났던 시점부터 그는 강력한 리치들과 데스나이트를 대동하고 있었다.

국가대항전 등의 대외활동은 일체 않고 꾸준히 성장에만 힘써온 그의 행보를 고려해본다면, 당시보다 지금은 훨씬 더 강해져있을 것이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단순히 전투능력만 놓고 보면 그가 주군보다 몇 배나 위입니다. 그리고 템빨단의 주력을 투입시킬만한 여유도 없고요. 세이렌에 다녀온 사이 영지 곳곳의 내정시설이 악화되어 다들 각자의 임무를 맡아 떠난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도태되지 않으려면 레벨 업도 해야 하고.”

“…”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믿어주고, 추켜 세워왔던 라우엘이…

‘나보다 다른 놈을 훨씬 더 강하다고 말해?’

브라함도 바알의 계약자를 상대로 무무드의 영혼을 해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하긴 했지만, 브라함은 브라함이고 라우엘은 라우엘이다.

설마 라우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충격적이다. 자존심이 상한다.

그리드가 부들부들 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라우엘은 괘념치 않았다.

“또한 아그너스는 사이코패스입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요. 굳이 그와 상종해봤자 좋을 게 없습니다. 평생 시달릴 거예요. 솔직히, 제 마음 같아선 템빨단이 평생 그와 엮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만…”

유페미나가 이런 대단한 퀘스트를 얻게 된 이상 이젠 어쩔 수 없다. 반드시 쓰러뜨려야할 적으로 인식함이 옳다.

“우선 에트날 왕국 내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전력을 가다듬은 후, 그때 자세한 계획을 짜도록 하시죠.”

“…알았다.”

그리드는 라우엘을 신뢰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주 대리를 맡긴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라우엘의 선택이나 조언을 부정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새롭게 익힌 마법에 익숙해지고 강화시키는데 힘쓰도록 할 거에요. 결국에는 제 퀘스트. 제가 강해져서 해결할 문제니까 너무 괘념치들 마시고요.”

대화가 일단락되자 유페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들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피력한 그녀가 꾸벅, 인사한 후 마탑으로 향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이해하기 위함이었다. 라우엘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서 업무를 보러 갔다.

혼자 남은 그리드는 용광로 앞에 섰다.

오로지 크라우젤만을 목표로 삼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 새롭게 등장한 강적, 아그너스는 무척이나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보다 몇 배나 세다고…? 플레이어의 범주를 초월했어?”

부정해주마.

꾸욱,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신의 광물 아다만티움을 꺼냈다.

국가대항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보상으로 얻은 것들이다.

이것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더욱 더 강해질 수 있을까?

이미 쉬지 않고 궁리해온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의 집중력이 최고다. 보다 대단한 아이템을 만들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끓어올랐다.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