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06화 (301/1,794)

템빨 23권 - 20화

“싫다.”

그리드가 건네는 <크루제의 바지> 정보를 확인한 페이커가 단칼에 거절했다.

예상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에 그리드는 당혹스러웠다.

“아니, 왜? 이 좋은 걸 왜 안 사겠다는 거야? 난 네가 기뻐서 방방 뛸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서 문제다.”

크루제의 바지는 현재 그리드가 제작할 수 있는 아이템보다 한 등급 위의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황금 같은 옵션만을 보유한 천계열 방어구가 심지어 방어력까지 높다니,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래서 부담스러웠다.

“그리드, 너는 우리에게 너무 많이 베푸는 경향이 있다.”

“…엥?”

내가 언제?

반문하려는 그리드에게 페이커가 특유의 담담한 말투로 설명해나갔다.

“장비칸을 전설의 대장장이가 제작한 아이템으로 도배할 수 있는 사람이 20억 플레이어 중 과연 몇이나 될까? 템빨단원밖에 없겠지. 우리는 항상 네게 감사하고 있고, 그렇기에 보답하고 싶다. 계속 무엇인갈 요구할 처지가 안 돼.”

그리드는 어이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너희들한테 공짜로 아이템 만들어준 적 있어? 너희는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내게 아이템을 구매해가는 고마운 고객이라고. 결코 내가 베푸는 입장이 아니야.”

템빨단원들은 그리드에게 아이템 제작을 의뢰할 때마다 필요한 제작재료와 제작법을 제공한다.

그리드는 공짜로 제작법을 습득하고, 또한 돈도 들이지 않고 아이템을 만든 뒤 그것을 동료들한테 판매할 때 또 돈을 받아왔다.

누가 봐도 그리드가 혜택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리드는 늘 고마웠다.

“너희들이 꾸준히 제작법을 구해다준 덕분에 나는 더 많은 아이템을 제작할 수 있게 됐고, 스킬 경험치도 쌓으면서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어. 심지어 돈까지 벌어가면서. 이번에도 그래. 난 너한테 이걸 공짜로 주겠다는 게 아니라 판다니까? 합당한 가격을 받고?”

“…본인의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세상에 부자는 많다.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을 템빨단원들보다 더 비싼 돈 주고 살 수 있는 부자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살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리드는 템빨단원들의 아이템을 제작할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빴으니까.

즉, 그리드는 모든 기회비용을 템빨단원들에게 쏟아 붓고 있다는 뜻이었다.

페이커와 동료들은 늘 미안했다.

“사실 넌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길드에 묶여서…”

“개소리.”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말을 끊었다.

“길드에 묶여? 개뿔. 템빨단을 만든 건 내 의지였다. 너희들은 내 초대에 응해준 고마운 동료들이고.”

“결과적으로 더 큰 이득은 우리가 보고 있잖나? 그러니까 그 바지도 사지 않을 거다. 네가 사용하도록 해.”

다 차치하고 최소한, 좋은 것만큼은 양보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음을 헤아린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뜻은 알겠다만, 타이츠를 내피로 입으면 옵션 효과가 사라지는데?”

민첩성 상승, 도약 능력 상승, 하반신을 사용하는 스킬의 위력 상승.

이것들은 이론적으로 타이츠가 가볍고 편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옵션이다.

위에 무거운 갑옷을 덧씌우면 사라지게 된다.

워낙 현실성을 추구하는 Satisfy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몰입도를 높여주는 중요한 시스템 중 하나라고는 하나, 진짜 여러모로 피곤하다.

“하지만 방어력은 고스란히 적용받지 않나?”

“아니, 제기랄. 답답하네. 고작 방어력 좀 더 올리자고 이 좋은 걸 내피로 썩히라고? 애초에, 단순히 방어력만 높일 수 있는 내피는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

실제로 삼겹갑에 사용 된 내피도 방어효과만큼은 훌륭했다.

“…”

“고집 피우지마. 그리고 잊지 마라. 내가 너희들에게 보내는 호의는 결과적으로 템빨단이, 그리고 이 내가 잘되길 바라서라는 걸.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위해서라도 강해지는 것만 신경 써줘. 쓸데없는 생각 따위 개한테나 줘버리고.”

“…그래.”

피식.

언제나 무표정한 페이커가 드물게 미소 지었다.

동서양 혼혈인의 장점만을 모아놓은 외모를 지닌 그가 웃자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진짜 염병.’

어째서 템빨단엔 이렇게 잘생긴 사람만 있을까?

솔직히, 같이 다니다보면 너무 초라해진다.

이들이 한국으로 이민을 오고난 후, 현실에서도 매일 같이 붙어 다니게 된다면?

친구가 생겨서 기쁜 마음은 잠시일 터. 어쩌면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었다.

‘다음부터 새로운 길드원을 받을 때는 나보다 못생긴 사람 위주로… 그래, 딱 반트너 정도의 아저씨만 영입하도록 할까?’

본인의 남자다운 외모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작용하는지 그리드는 여전히 잘 몰랐다.

그가 진지한 고민을 해보는 사이, 페이커가 조심스레 말해왔다.

“그… 결제는 할부로 부탁해도 될까?”

“…”

크루제의 바지의 가치로 한화로 약 60억 에 해당하는 골드를 요구했으니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해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지만 꼭 알아둬야할 게, 나 이거 절대로 비싸게 파는 거 아니다? 사용조건 안 붙어서 부자 아저씨들한테 더 비싸게 팔 수 있을 거야.”

“…잘 안다.”

싸지도 않다는 사실.

그래도 할부이자는 요구하지 않는 그리드에게 감사함을 느끼면서, 페이커는 또 한 번 다짐했다.

‘네가 보내는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강해지겠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그래, 설령 천외천 크라우젤일지언정 내가 있는 이상은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협할 수 없도록 말이다.

감히 크라우젤을 상대로?

누군가는 페이커의 마음가짐을 오만하다고 비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포함한 템빨단원 전원은 페이커의 진가를 알고 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힘은 그리드와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었으니까.

유페미나가 템빨단의 <숨겨진 보석>이라면, 페이커는 템빨단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이다.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페이커는 누구보다도 더 강해져야할 의무가 있었다.

***

<무무드의 마법서>

등급:??

천재 마법사 무무드의 마법이 담겨있는 고서입니다.

사용 시 효과:??

사용 조건:??

무게:10

“…흐음.”

그리드의 침실과 마주보고 있는 유페미나의 방.

동료들과 회포를 풀고 돌아온 유페미나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무무드의 마법서>가 지닌 가치를 감히 가늠해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등급 미상.’

일반적으로 마법서의 등급은 마법의 등급에 따랐다.

예를 들어서 A급 마법 <파이어 스톰>을 습득할 수 있는 마법서의 등급은 A로 책정된다.

즉, 마법서의 등급은 D~S로 세분화되는 게 원칙이란 뜻이다.

한데 미상이라니?

‘단일 마법을 습득하는 마법서가 아닌 건가?’

예를 들면, 여러 등급의 마법을 다양하게 동시에 습득하기 때문에 등급을 표기할 수 없다던가?

‘어쨌든 이게 마법을 익히는 마법서인 건 확실한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유페미나는 마법사가 아닌 바, 마법을 복제할 수는 있어도 습득할 재주는 없었기에.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마법서만 날릴 수도…’

사실 유페미나는 이 마법서를 제드노스나 라엘라에게 판매하고 싶었다.

그게 여러모로 안정적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말렸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으로도 가치를 판별할 수 없는 마법서.

아주 어쩌면, 레전드리 등급의 전직서보다 더 뛰어난 가치를 지닌 마법서가 아닐까, 그리드는 조심스레 추측했었다.

“브라함이 말했던 적이 있어. 무무드는 자신보다도 천재적이었고, 그렇기에 두려워하며 경계했었다고. 한 마디로 전설의 대마법사 이상의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야. 그의 지식이 담긴 마법서를 섣불리 판매했다가, 나중에서야 진짜 가치를 알게 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다가 게임 접지 말고 그냥 네가 사용하도록 해. 만약 네 염려대로 마법서가 효과도 없이 소멸할지라도 남한테 넘기는 것보다야 덜 후회할 거라고 본다.”

‘그리드의 말이 백 번 옳아.’

사실, 유페미나는 그리드의 본질을 모르는 몇 안 되는 템빨단원 중 하나다.

그리드가 찌질이었던 시절에도 그리드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오해했을 정도니까.

유페미나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특히 지금의 그리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조언을 새겨들었다.

“그래, 내가 익히도록 하자.”

결정을 내린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

유페미나가 즉시 무무드의 마법서를 펼쳤다.

[<무무드의 마법서>를 읽습니다.]

[무무드의 마법지식이 당신의 두뇌에 흘러들어옵니다.]

[능력치 <지력>이 5천 미만입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식 습득에 실패…]

절망스러운 알림창이 떠오른다.

유페미나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세이렌의 수호자>칭호 효과로 바다 신의 가호가 깃든 상태입니다. 무무드의 지식이 당신에게 호의를 보냅니다.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지식이 개편됩니다.]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완료하였습니다.]

[<무무드식 마법트리>가 개방됩니다.]

[<무무드식 화속성 마법>을 습득하기에는 체질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무드식 목속성 마법>을 습득하기에는 체질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무드식 지속성 마법>을 습득하기에는 체질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무무드식 수속성 마법>을 습득합니다.]

[<무무드식 무속성 마법>을 습득합니다.]

<무무드식 수속성 마법>

등급:레전드리(성장형)

1단계:마력을 물과 얼음으로 전환시킬 수 있으며 이를 원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캐스팅 시간과 재사용 대기 시간은 마법의 형태에 따라서 다르게 책정됩니다. 보다 효율적인 사용을 위해서는 연구를 거듭해야할 것입니다.

<무무드식 무속성 마법>

등급:레전드리(성장형)

1단계:마력에 <마법 방어 무시 30퍼센트>효과가 귀속됩니다.

[히든 전직 퀘스트 <무무드의 영혼 해방>이 생성됩니다.]

<무무드의 영혼 해방>

★히든 전직 퀘스트★

살아생전.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의 수제자였던 무무드는 천재적인 재능으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천재는 단명하는 법.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했던 그는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죽음을 목전에 두었습니다.

하지만 누구 앞에서도 자신의 병마를 드러내지 않았고, 연구에 몰두하여 ‘누구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론’의 체계를 확립시켰습니다.

마법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었습니다. 이로서 무무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짧은 생을 타고났을지언정,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니 그는 너무 기뻤고 충만감을 만끽하였습니다.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스승 브라함에게 업적을 갈취당한 그는 큰 충격과 원한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뼈아픈 배신감에 휩싸여 분노를 불태운 그는 브라함에게 복수를 다짐하였습니다.

브라함을 초월하는, 자신만의 마법공식을 새로이 만들고 세이렌으로 찾아가 강력한 오브까지 손에 넣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복수를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짧은 생.

원한에 집착하기보다는 잠시라도 행복을 구가하고 싶었기에.

세이렌에서 만난 수인족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행복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어서도 고통을 받고 맙니다.

<바알의 계약자>에게 백골이 된 시신을 빼앗기고, 그 시신에 이승을 떠났던 영혼이 귀속되어 의지와는 다른 살육을 벌이는 인형이 되어버렸습니다.

무무드가 아꼈던 세이렌을 구원하고, 무무드의 원한어린 사연을 알게 된 당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무무드의 영혼을 새롭게 얻은 힘으로 해방시켜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바알의 계약자 ‘????’가 손에 넣은 무무드의 리치를 파괴하고 영혼을 해방.

퀘스트 성공 보상:성장형 레전드리 클래스 <무무드의 후계자>획득. <무무드식 마법> 전부 개방.

퀘스트 실패 조건:없음.

“…뭐, 뭐야, 이거?”

유페미나가 벙쪘다.

무무드의 마법서가 지닌 가치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였으므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드와 템빨단을 위해서 오랜 세월 세이렌에서 고생해온 그녀.

드디어 보답을 얻고 새로운 날개를 펼친다. 그리고 비상할 수 있는 기회를 쟁취했다.

템빨단의 전력이 대폭 상승하는 순간이었다.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