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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305화 (300/1,794)

템빨 23권 - 19화

“당신에게 바다 신의 가호가 따르기를.”

왕궁을 떠나는 그리드와 템빨단을 맥스옹이 직접 배웅하였다.

왕자들과 수백 명의 수인족 병사들이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혹시 자신들의 왕이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을까, 사위를 경계하며 반드시 왕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그리드는 어이가 없었다.

맥스옹이 누군가?

외적의 침략을 당한 나라를, 죽어가는 자신의 백성들을 외면했던 인물이다.

왕으로서의 자격이 조금도 없었다. 비난받아 마땅했다.

한데 왕자들과 병사들이 그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하자 납득이 가질 않았다.

‘백성을 외면했을지언정 결국은 왕. 단지 왕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들은 맥스옹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건가?’

가엽고 딱하다.

수인족이란 불쌍할 정도로 수동적이고 어리석은 종족이다.

세이렌이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를 여실히 깨닫는다.

“하지만 다스리는 입장에선 좋습니다.”

라우엘이 속삭여왔다. 음흉한 것이 꼭 악마의 음성 같았다.

“멍청하고 충성심 강한 백성일수록 왕의 배를 불려주죠. 세이렌을 얻게 된 것은 정말로 큰 행운입니다.”

“…”

너무 타산적인 거 아닌가.

누군가는 라우엘을 비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아니었다.

그리드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욕심이 많았고 도의보단 실속을 따졌다.

단, 조금이나마 현명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백성이 똑똑할수록 나라가 더 부강해지잖아? 장기적으로 보면 부강한 나라일수록 왕의 배를 더 불려줄 테고.”

물론, 똑똑한 백성을 다스린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고 피곤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히 감수해야할 부분이다. 애초에 정치가 쉽겠는가?

“하하!”

라우엘이 웃고 말았다.

비웃음이 아니다.

“맞습니다. 사실은 저 또한 주군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라우엘은 그리드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드에게는 눈앞의 욕심에 눈이 머는 어리석음도, 결국은 밑바닥을 드러내게 마련인 가식도 없었으니까.

‘앞뒤 분간 않고 실속만 따지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천둥벌거숭이가 하루아침에 어른으로 진화한 듯하다.

그만큼 그리드의 성장은 빠르고 눈부셨다.

‘그래, 이제 크라우젤님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접자.’

굳이 크라우젤이 없더라도 템빨단은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리드를 보고 확신한 라우엘이 감회에 젖어있는 동안.

“주군.”

피아로가 그리드의 앞으로 다가와 기사의 예를 갖췄다.

“비록 제 육신은 주군과 멀리 떨어져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늘 함께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필요해지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언제, 어디일지언정 당장 달려가겠나이다.”

“알았다. 세이렌을 잘 부탁한다.”

“예, 그리고 이걸…”

주섬주섬.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낸 피아로가 그것을 그리드에게 건넸다.

검정 타이츠였다.

허리 부분부터 발목 부분까지 몸에 꼭 붙는 스타킹 모양의 바지.

Satisfy에서는 보통 어쌔신이나 무도가, 그리고 궁수들이 착용하는 방어구였다.

“이건?”

“백발의 여인을 처단하고 획득한 전리품입니다.”

“백요가 뱉은 거라고…!”

라우엘의 표현을 빌리자면 태양급 강자.

크라우젤과 동급의 실력자라 들었고, 실제로 그녀는 강했다.

피아로가 확정 즉사 스킬을 사용하여 빠르게 승부를 본 이유도 그녀를 오래 날뛰게 만들면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물이 드롭한 아이템이라면, 대체 얼마나 특별한 것일까?

두근두근!

그리드가 기대하며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띠링~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기능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크루제의 바지>

등급:레전드리(세트)

내구력:무한 방어력:430

*받는 피해 40퍼센트 경감.

*민첩성 10퍼센트 상승.

*도약능력 30퍼센트 상승.

*하반신을 사용하는 스킬의 기능 20퍼센트 상승.

*세트 효과:???

전설의 재단사 크루제가 만든 걸작입니다.

무한한 신축성을 자랑하며 절대 찢어지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350

“헉.”

미친 옵션이다.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킬 정도로 놀랐다.

‘받는 피해 40퍼센트 경감에 민첩성 10퍼센트 상승?’

일반적으로 피해 경감류 옵션은 ‘베기에 당할 시’, ‘찌르기에 당할 시’, 혹은 마법 공격이나 물리 공격에 당할 시 등에 효과 발동으로 세분화된다.

하지만 이 타이츠는 단순히 ‘받는 피해’를 40퍼센트 경감시켜준다는 옵션을 갖고 있었다.

이는 즉, 어떤 형태의 공격을 당하든지 간에 무조건 데미지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스탯을 고정된 양만큼 상승시켜주는 게 아니라 퍼센티지로 상승시켜주는 옵션까지 지녔으니 한 마디로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내구력이 무한…’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으로도 재질을 파악할 수가 없다.

이를 토대로 유추하고, 또한 아이템에 크루제의 이름이 붙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전설의 재단사 크루제가 직접 창조한 원단을 이용해서 제작한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아.’

일종의 파브라늄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거 진심 개쩌네.’

하지만 그리드가 사용하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다.

헤비아머와 비교하면 방어력이 매우 낮다는 점이었다.

그리드는 탱커로서의 능력을 부각시키는 전투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에 방어력을 중요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한계가 드러나는군.’

내가 만약 크라우젤만큼의 컨트롤 솜씨를 발휘할 수 있었다면 꼭 이 타이츠를 착용했을 것이다.

생각하면서 씁쓸하게 미소지은 그리드가 지슈카와 페이커, 그리고 레가스를 놓고 고민했다.

‘셋 중 누구한테 이걸 팔까.’

대뜸 던져주고 경매에 붙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리드는 지양했다.

세 사람 모두 크루제의 바지를 욕심낼 게 분명한 상황.

가격경쟁을 벌이다가 서로 감정이 상할 수도 있었다.

‘관계에 균열이라도 생겨선 안 되지.’

세 사람의 우정을 감안해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래도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는 편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리드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내가 셋 중 한 명을 선택해서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게 좋다, 이건데…’

호감 순으로 정하면 어떨까?

어쩌면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착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내게 잘해주는 세계 최고의 미녀, 지슈카.

언제나 묵묵히 나와 동료들의 곁을 지켜주는 듬직한 전우, 페이커.

처음만난 그날부터 나를 무한히 신뢰해주었던 마음씨 좋은 친구, 레가스.

“제길.”

셋 다 좋다.

우위를 점칠 수 없을 정도이므로 호감 순으로 결정하는 건 무리가 있다.

‘…애초에 이건 리더로서의 자세도 아니지 않나?’

개인감정보다는 효율을 우선시하는 게 정답일 터다.

그럼 다시 생각해보자.

‘우선 지슈카는 패스.’

노출신을 기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물론 그것도 이유에 포함 됐지만, 그보다는 지슈카가 이 타이츠의 옵션 효과 중 하나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 크다.

하반신을 사용하는 스킬의 기능 20퍼센트 상승.

궁사인 지슈카가 하반신을 사용하는 스킬이라고 해봤자 차징 기능이 귀속 된 발차기 하나밖에 없다.

반면 레가스와 페이커는 다리를 사용하는 스킬을 무수히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럼 둘 중에 누구를…’

고민해보던 그리드가 이내 결정했다.

‘역시 페이커가 좋겠다.’

아수라 레가스는 투지라는 특수 게이지를 보유하고 있다.

적에게 입히는 데미지와 받는 데미지에 비례해서 상승하는 게이지로서 특수 궁극기를 사용할 때 필요한 자원이다.

‘방어력이 너무 높아지면 투지 게이지가 축적되는 속도가 느려진다.’

반면 어쌔신인 페이커는 투지 게이지가 없을뿐더러 워낙 종이 몸이다.

안 맞는 것을 전제로 싸워야할 정도다. 그에게 천갑옷치고 높은 방어력을 보장하는 이 타이츠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특히 어쌔신의 공격력은 민첩성의 영향도 받으니까.’

도약 강화 옵션 또한 페이커의 신속을 극대화시켜줄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드가 결정하는 사이, 유페미나가 <매스 텔레포트>의 캐스팅을 끝냈다.

팟!

파파파파파파팟!!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 전원이 동시다발적으로 레이단으로 이동됐다. 유페미나도 함께였다.

수인족 왕의 눈물은 맥스옹이 조달해주기로 약조하였으므로, 이제 그녀는 굳이 세이렌에 머물지 않아도 되었다.

“아…”

혼자 남게 된 피아로가 문득 당황했다.

레이단에 두고 온 오러 마스터 휴렌트가 뒤늦게 떠오른 것이다.

“음…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

“낭군님!”

사실 그리드는 무척 바빴다.

첫째, 템빨단원들이 세이렌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일일이 감정하고 숨겨진 기능을 밝혀내거나, 혹은 새로운 제작법을 습득해야했고.

둘째, 국가대항전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딴 보상으로 얻게 된 아다만티움을 재료로 삼은 새로운 아이템을 구상해야했다.

셋째, 이야루그트와의 상하관계를 정립하는 일도 잊어선 안 된다.

넷째, 대한민국이 국가대항전에서 준우승한 보상으로 획득한 경험치 상승 버프가 끝나기 전에 사냥에 집중할 필요성도 있었다.

등등.

이외에도 그리드는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한가할 수 있을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바쁜 와중에도 가족을 잊지 않았다.

가장 먼저 아이린을 찾아갔다.

“그래도 로드가 있어준 덕분에 나 없는 동안 크게 적적하진 않았겠소.”

와락, 품에 안겨온 아이린이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로드는 로드, 낭군님은 낭군님이십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소중하지만 달라요. 로드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고, 낭군님은…”

말하다 말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찹살떡처럼 하얗고, 부드럽고, 탄력이 있는 아이린의 두 뺨이 갑자기 붉게 달아올랐다.

“그… 그…”

굉장히 부끄러운 생각을 떠올렸나보다.

그리드를 올려다보던 푸른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구른다.

“허…”

한동안 못 본 사이에 더욱 더 귀엽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리드는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다이아몬드 클래스 캡슐의 진정한 위력을 발휘해야할 때임을!

“슬슬 둘째를 갖는 것도 좋겠구려.”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아이린을 번쩍 들어 안더니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꺄악~”

그리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아이린이 발을 구르며 싱글벙글 웃었다. 천진난만한 소녀 같았다.

하지만 잠시 후.

침실에서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소녀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하 생략.

***

복제술사는 한계가 명확한 클래스이다.

필요한 스킬들을 늘 복제하고 다닐 수도 없었을 뿐더러, 스킬을 복제해봤자 1회 사용하면 소멸해버렸기 때문에 전투 지속력이 현격히 떨어졌다.

전투 관련 스킬을 최소한이라도 보유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유페미나는 늘 아쉬웠다.

마법이나 스킬을 ‘습득’하는 게 불가능한 복제술사의 태생적 한계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이야기다.

세이렌에서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획득한 <무무드의 마법서>가 그녀의 한계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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